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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에 싸인 사자신 스핑크스

고대 이집트왕 파라오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거대한 상. 5천년 역사의 수수께끼를 감추고 있다.
 

왼쪽 뒤쪽에는 카프라왕,오른쪽 뒤쪽에는 쿠프왕의 피라밋이 있다.대스핑크스는 카프라왕의 피라밋 참배길 옆에 이를 지키는 것처럼 버티고 있다. 그러나 피라밋과 같은 시기에 만들었다는 확증은 아직 없다.


그리스 신화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있다. 여왕 헬라가 이집트의 테베에 보낸 스핑크스가 지나는 사람에게 '아침에는 네발로 걷고, 낮에는 두발로 걷고, 저녁에는 세발로 걷는 동물이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를 내줘 바른 해답을 못하는 사람을 죽여버렸다. 그런데 영웅 에디푸스가 '그것은 인간이다. 어릴때는 네발로 기고 성장하면 두다리로 걷는다. 그러나 늙으면 지팡이를 짚게되어 세다리가 된다'고 바른 해답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스핑크스가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대스핑크스의 두부. 왕의 두건을 쓰고 앞 이마에는 왕가의 상징인 코브라를 달고 지금은 없어졌으나 턱수염도 있었다. 고왕국의 카프라왕이라고도 하고 중왕국의 아멘 엘름 하트 3세라고도 한다.


살아있는 조상(彫像)
 

원래 스핑크스는 이집트 기원이다. 스핑크스라는 이름도 '살아있는 조상'(彫像)이라는 뜻의 고대 이집트어 '셰프스안크'를 그리스인이 잘못듣고 그리스 풍으로 발음한데 기인한다.
 

인면수신상(人面獸身像·사람얼굴에 짐승의 몸을 한 상)이라고도 하나 실제로 얼굴은 사람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예를 들면 카르나크 신전의 스핑크스는 대개 크눔 신 모양을 한 수컷양의 머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신체는 거의가 사자 모습을 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사자는 강자의 상징이고 짐승의 왕이라고 여겼다. 인간계의 우두머리인 파라오가 이를 자신에게 비겨 신성을 불어넣고 스핑크스를 승리의 왕으로 받든 것이다. 이것은 이미 고왕국(기원전 2686년경~기원전 2181년 경)의 피라밋 텍스트 속에 '루우티'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는 신전의 문전에 두개가 마주하여 놓여진 사자모습을 한 신으로 스핑크스가 일찌기부터 신전 수호신 지위에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뒤 각 시대를 통하여 여러가지로 불려왔으나 대개 태양신과 관계되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04년경~기원전31년경) 이후는 스핑크스라 불렸다. 다만 아랍시대가 된 7세기 이후 현지에서는 '공포를 가져오는 자'를 의미하는 '아브라홀'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스핑크스를 대표하는 것은 물론 기자(Giza)의 대스핑크스이다. 1798년, 나폴레옹이 "5천년의 역사가 여러분을 지켜보고 있다"고 병사들을 격려했던것도 이 대 스핑크스 위에서였다.
 

이것은 근처에 있는 암산을 깎고 돌을 쌓아 정돈한 것이다. 길이 73.5m, 높이 약 20m이고 얼굴 폭은 4m이다. 머리에는 왕의 두건을 썼고 얼굴에는 왕가의 상징인 코브라를 새기고 지금은 없어졌으나 수염도 있었다. 표면에는 석회를 바르고 채색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이 대 스핑크스의 가장 깊은 수수께끼는 그 건조연대이다.
 

두 다리 사이에 토토메스 4세(기원전 1411년 경~기원전 1397년경)의 비문이 있다. 그 비문에는 즉위하기 전에 수렵을 하던 중 모래에 묻힌 스핑크스 옆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꿈에 스핑크스가 나타나 '모래 속에서 파내주면 두나라의 왕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사연이 쓰여있다.
 

따라서 이 시대 이전의 것임은 틀림없으나 정확히 언제인가는 많은 이집트학자의 검토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먼저 이집트학의 권위자인 영국인 '피틀리'는 제4왕조(기원전2610년경~2490년경) 제2대 쿠프왕 때 보다 오래 되지는 않았고 제3대 카프라왕 때 보다 뒤는 아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서는 카프라왕의 제2피라밋 참배 길 양쪽에 많은 묘가 있으나 참배길을 걸치고 있는것이 없다는 점을 들고 있다.
 

다음으로 프랑스인 '마스펠로'는 처음엔 건조기를 선사시대(기원전 3000년이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으나 뒤에는 카프라왕 자신이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대스핑크스의 얼굴은 카프라왕을 그린 것이며 피라밋은 왕의 묘이고 스핑크스는 신전의 수호신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인 '보르햘트'는 이에 대하여 대스핑크스의 얼굴은 "중왕국(기원전2040년경~기원전1786년경)의 파라오 아멘엘름 하트 3세를 닮았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리고 눈의 색이나 두부의 장식으로 보아 대 스핑크스는 대피라밋무리보다 뒤인 중왕국시대에 건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집트인으로 최초의 이집트학자인 '셀림 핫산'은 1935년 부터 4년간에 걸쳐 기자지구를 발굴했다. 그 결과 그는 카프라 왕 시대에 세워졌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①대스핑크스 참배길에는 도랑이 있어 쿠프왕시대보다 뒤의 시대임을 알 수 있다. ②제3피라밋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멘카울라왕의 것은 아니다. ③카프라왕의 피라밋과 신전의 설계를 대스핑크스의 그것과 비교검토해보면 일체화되게 설계되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것이 유력한 건조열대설로 고왕국인가 중왕국인가의 구별은 있으나 어느것이나 피라밋과 같은 시기에 그 참배길의 수호신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19세기 초엽의 기자의 피라밋과 스핑크스. 반 이상이 리비아사막의 모래 밑에 있었다. 아마 건설직후부터 휘몰아치는 모래에 묻히기 시작하여 이집트 고대왕국의 쇠퇴와 함께 그 모래의 두터움이 더해갔을 것이다. 나폴레옹의 원정군에 동행한 조사단이 일부를 발굴했으나 본격적인 발굴은 1935년이후에 시작되었다.


태양신의 성지
 

일본 와세다대학의 고대 이집트 조사대는 1966년 이후 20년에 걸쳐 조사를 계속하고 있다. 그 일원인 필자는 이런 유력한 학설과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966년에 처음으로 기자를 찾았을 때부터 필자는 두가지의 소박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카프라왕의 참배길이 동서축으로 어긋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많은 연구서에 '대 스핑크스는 자연의 암산을 깎아 조상을 만든 것이다. 그때문에 카프라왕의 피라밋에서 강기슭 신전으로 향하는 참배길은 동서 직선으로 만들수는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또 하나는 도시인 멤피스에서도, 또 부왕 스네펠의 두개의 피라밋이 있는 다슈르에서도 먼 기자에 왜 쿠프왕은 대피라밋을 세운 것일까하는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종래의 학자들은 '대피라밋을 세울만한 암반이 이곳 기자에 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설명에 납득이 가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사이스왕조(기원전 664년경)에 만들어진 '목록비판'(目錄碑板)은 대피라밋에 부속되어 있던 이시스신전의 비문을 베낀 것이라고 한다. 거기에는 대스핑크스가 대피라밋 건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쓰여있다. 필자도 이에 가까운 의견을 가지고 있다. 그 계기가 된것은 카프라왕의 피라밋 앞에 있는 두개의 신전이다. 이 신전은 피라밋을 향해 왼쪽에 있는 것이 카프라왕의 신전이라고 하고 오른쪽 것이 대스핑크스의 신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는 몇 번을 보아도, 아니 보면 볼수록 두개의 신전은 각각 이질의 것으로 보인다. 석재로 보면 카프라 왕의 신전은 거의가 화강암인데 비하여 대스핑크스의 신전은 석회암이다.
 

가장 기묘한 것은 그 건축 양식이다. 카프라왕의 신전은 고왕국시대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참배길의 접합부만이 북쪽에 치우쳐 그 양식에서 어긋나 있다. 이것은 만약 양식대로 카프라왕의 신전중앙에 참배길을 가져다 붙이면 북쪽에 대스핑크스의 신전이 있기때문에 참배길이 피라밋에 대하여 예각적으로 되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두개의 신전이 동시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 배치가 너무 부자연스럽다. 설계자는 대스핑크스 신전의 존재를 염두에 두고 카프라왕의 신전은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즉 대스핑크스신전을 카프라왕이 피라밋을 쌓기 이전부터 이곳에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는 대스핑크스는 쿠프왕의 피라밋 이전부터 이곳에 존재해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곳에 대 스핑크스가 있었기 때문에 쿠프왕이 이 기자 대지에 대 피라밋을 쌓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피라밋은 당시 '아케토 쿠프'라고 이름붙였다. 한편 대스핑크스는 '호르엔 아케토'라 불리고 있었다.
 

아케토란 태양을 의미하며 호르란 제3왕조(기원전 2650년경)이래 파라오의 화신이었던 호르스 신(神)을 가리킨다. 스핑크스는 사자모양을 한 태양신이며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었으므로 쿠프왕이 스스로의 피라밋에 '아케토 쿠프'란 이름을 붙여도 부자연스런 것은 아니다.
 

셀림 핫산 이래 대스핑크스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 다음 발굴자가 결정적인 유물을 발견하기까지 이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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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요시무라 사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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