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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혁명 이야기 나무 쟁기에서 유전자 조작까지

농기구와 화학비료 트랙터는 식량생산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유전공학은 아직도 기아에 허덕이는 인류를 해방시킬 것인가?

지금으로부터 1~2만년 전, 최후의 빙하가 양극으로 후퇴하면서 지구상에 따뜻한 기후가 찾아 왔다. 동시에 인간은 식물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식물의 재배란 생산물의 획득을 목적으로 인간이 의식적으로 종자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것을 가리킨다.

 

‘제1의 물결’
 

물론 인간이 유목생활을 했던 시대에는 그런 행위가 불가능하였지만 먹이를 항상 손에 넣으려는 욕구로부터 작물의 재배가 시작되었고, 동시에 정주생활을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호관계가 신석기 시대의 혁명의 기초가 되었다. ‘알빈 토플러’는 이 혁명을 ‘제1의 물결’이라 부른 바 있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동물의 사육보다 뒤늦었지만 동물의 사육보다 훨씬 중대하고, 혁명적인 큰 사건이었다.
 

인간이 ‘재배’라는 방법에 관심을 가질 기회는 수 없이 반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먹이로 얻은 나무 열매나 풀의 씨앗 그리고 과실 등이 그들이 살고 있던 움막 밖에서 싹틀 기회가 많았으리라. 때로는 나무 뿌리나 부러진 가지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이 현상을 인공적으로 이용하자는 생각은 사실상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전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식물일지라도 한번 재배가 시작된 경우에는 그 방법이 바로 다른 식물에 응용된다. 처음에는 특히 잘 자라는 식물이 우선 주목을 끌었을 것이다. 대개는 1년 이내에 수확되는 식물이었다. 곡류, 여러가지 야채, 콩류 등은 그러한 주목을 끌만한 가치가 있는 작물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작물들을 재배하기 위해서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고, 수확을 하는데는 무엇보다 농기구가 필요했다. 우선 쟁기는 청동기 시대 이후 경제적 의미가 가장 높았던 농기구였다. 더우기 생산성이 높은 점토질 토지가 집약적인 곡물생산을 위해서 개간되기 시작했을 때, 쟁기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이러한 과정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기원 후의 일이었다.

 

쟁기의 발달사
 

쟁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4천년 무렵 ‘우르’왕의 묘에서 출토된 ‘슈멜’의 인장에서 볼 수 있다. 쟁기는 이집트와 페르시아 지방에서 널리 사용되더니 점차 유럽지방에 보급되고, 기원전 4세기에는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이는 기술 전파의 한 가지 예이다). 그런데 동방의 여러 곳이나 그리스 지방 그리고 유럽의 북부나 미개인 사이에서 사용된 쟁기는 모두가 같은 일반원리에 의해서 제작되었다.
 

대체적으로 쟁기는 네 마리의 숫소가 끌게 된다. 이 때 두마리가 한 쌍이 되고 두 쌍이 앞과 뒤로 연결된다. 때로는 네 마리 모두가 옆으로 나란히 연결되어 쟁기를 끌게 된다(1080년 영국의 토지대장에는 명목상 8마리의 숫소가 끄는 쟁기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방법은 기원 후 1천년이 지난 뒤까지 널리 보급되고 이용되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철이 사용되기 이전에는 쟁기가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쟁기의 각 부분에 사용되는 목재 재료의 강도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철이 널리 사용되게 됨에 따 쟁기에도 부분적으로 철이 채용되었다. 팔레스타인의 ‘게라르’에서 기원 전 12~10세기에 출토된 쟁기의 날은 속이 텅빈 철제의 판이었다.
 

쟁기 이외에 중세때 사용된 농기구 일람표에는 많은 농기구가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농가에서 사용된 농기구는 쟁기 이외에 수레, 비료 운반차, 탈곡기와 선별기, 쇠스랑, 제초용 가위, 작은 낫, 큰 낫, 그리고 삽 등이었다. 중세 농민들은 자급적인 농사를 짓기 위해서 적어도 이런 정도의 농기구를 가져야만 했다. 또 17세기에 첨가된 농기구는 흙을 부수는 도끼, 나무망치, 땅과 풀을 깎는 삽, 가슴으로 눌러 땅을 파는 쟁기, 파종용 기구, 장방형 손도끼, 보리나 벼의 까끄라기를 취급하는 기구등이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도 농기구는 전통적인 형태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변화가 있었다면 전통적인 형태를 바탕으로 부분적인 변형이나 재료가 달라진 데 불과했다. 그러나 18·19세기에 농기구 특히 쟁기의 형태나 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화란에서 들여온 쟁기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서 만들어진 ‘로제담 쟁기’는 종래의 것에 비해서 가볍고, 쟁기를 끄는데 필요한 가축의 힘도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영국의 ‘J. 스몰’은 1767년경 스코틀랜드에 이 쟁기를 도입하였다. 그의 저서 ‘쟁기 및 우마차의 구조에 관한 연구’(1784)는 쟁기의 발달사 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초기에 걸쳐서 목재쟁기는 완전히 철제쟁기로 모습을 바꾸었다.

 

나무쟁기


천연비료에서 인공비료로
 

농기구의 발달은 계속 생산성을 높여 주었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 것으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비료의 사용이었다. 옛부터 비료 중 과린산석회의 효력을 인식해 왔지만, 이 비료가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19세기 후반부터였다. 학교장인 ‘엣셔’는 뼈가루를 시험삼아 땅에 뿌려본 결과, 놀랄만큼 수확이 늘어나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1835년 뼈속의 인산염을 황산으로 처리하면 물에 녹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한편 1840년 독일의 화학자 ‘J.폰·리비히’(1803~1873)도 이와 같은 견해를 발표하였다.
 

‘리비히’는 농예화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토지가 메말라가는 것은 흙속에 있는 광물질이 식물에 의해서 흡수되어 소모되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특히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Na, K, Ca, P 등을 함유한 화합물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덧붙혔다. 그는 천연비료를 사용하여 작물을 재배하는 실험을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리비히’는 ‘J.B. 브산코’(1802~1887)가 밝힌 콩과류의 경우처럼 모든 식물이 질소를 대기로부터 흡수한다는 학설에 바탕을 두었다.그 때문에 화학비료의 요소 중 질소를 빼놓았으므로 완전한 비료를 만드는 데는 실패하였다. 나중에 ‘리비히’는 이 잘못을 시정하였다.
 

어쨌든 화학비료의 개념이 널리 보급되기는 했지만 ‘엣셔’나 ‘리비히’도 이런 생각을 실제로 응용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시판을 위해서 처음으로 과린산염을 제조한 것은 의사이기도 한 ‘J. 마레’였다. 그는 1835년 황산으로 처리하면 벼만이 아니라 인산염 광석도 과린산염으로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6년후 '마레’는 인산염, 구아노, 칠리초석을 표백한 혼합비료의 생산에 적극 앞장섰다. 이로써 취급하기 쉽고 건조한 분말비료가 시장에 첫 선을 보이게 되었다.
 

‘마레’는 이 방면의 선구자였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과린산염을 대량으로 제조하는데 성공한 사람은 ‘J. 베넷트로즈’(1814~1900)이다. 그는 1834년부터 많은 실험을 반복하여 성공하였다. 그는 1843년 런던 근교에 대규모의 과린산염 공장을 설립하고 1870년까지 매년 약 4만t을 생산하였다.
 

인이 과린산염으로서 매우 간편하게 토지에 시비되었지만, 인은 식물에 대해서 필수 영양소의 한 종류에 불과하였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비료의 성분이 곧 질소의 화합물이다. 지금은 공중 질소 고정의 방법으로 질소비료가 합성되고 있다. 하지만 19세기 말기까지 질소성분의 비료로서 작물에 시비되었던 것은 천연의 질산나트륨(NaNo₃, 즉‘카릿슈’)이다. ‘카릿슈’가 매장된 광산은 세계 여러 곳에 있다. 공업적으로 중요한 것은 칠레 서해안의 ‘다라바가’지방에 있는 광산이다. 이 광상은 두께 약0.3~1.5m이다. 채취된 ‘카릿슈’는 분쇄되고 탱크안에서 포화용액으로 만들어진다. 그리고 뜨거운 물로 우려낸다. 용액을 냉각시키면 95%의 질산나트륨 즉 ‘카릿슈’가 된다. 세계의 소비량은 1900년에 1백35만t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비료로 사용되었다.
 

한편 19세기 후반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제3의 기본요소인 칼륨(K)의 원료에도 관심이 집중되었다. 1870년경까지 칼륨염은 전통적으로 식물의 재를 원료로 만들어졌다. 우선 목재를 태워 재를 회수한 다음, 물로 우려내고 짚으로 여과하였다. 그리고 용액을 철제의 남비에 넣어 증발 시켰다. 주요 산지는 캐나다였다. 1871년에는 연산 4백만t을 넘는 목재를 처리하는 5백19개의 공장이 캐나다에 있었다.
 

그러나 1870년경 독일의 ‘마그데부르그’부근에서 매우 큰 칼륨염 광산이 발견되고 조업이 시작되었다. 이는 목재회(木材灰)산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 예로서 1891년까지 캐나다의 목재회 제조공장은 1백28개소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19세기 말기에는 점차 소멸되어 갔다.

 

인공비료


공중 질소 고정에 성공한 ‘하버’
 

이처럼 화학비료의 사용과 함께 비료 공업에서 가장 혁신적이었던 것은 질소염의 한 가지 제조방법인 공중질소 고정법의 등장이다. 이 방법은 비료산업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했지만, 농업생산이라는 측면에서도 혁신적이었다. 다시 말해서 농업생산성에 일대 혁신을 가져 왔다.
 

사실상 20세기 초기까지 ‘고정된’ 질소원으로는 두 종류 즉 질산나트륨(NaNo₃)과 황산암모늄[(N${H}_{4}$)₂S${O}_{4}$]이었다. 그런데 질소를 함유한 비료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자 새로운 자원을 개발할 필요성이 널리 거론되었다. 따라서 공중질소를 화학적으로 결합시키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이 집중되었다. 질소와 산소의 혼합기체 속에서 전기를 방전시킬 때 산화질소가 생성된다는 것은 이미 18세기 말엽부터 알려져 있었다. 이 방법은 화학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효율이 극히 낮았다. 특히 엄청난 에너지 소모가 있었다.
 

마침내 공중 질소를 화합물로 고정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독일의 화학자 ‘F.하버’(1868~1934)가 고안하였다. 1900년대 초기 ‘하버’는 높은 압력과 철을 촉매로 하여 질소와 수소를 화합시켜 암모니아(NH₃)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 암모니아를 바탕으로 질소비료를 대량생산할 수 잇는 기초를 수립하였다. ‘하버’의 공중질소 고정법을 실용화시킨 사람은 독일의 화학자 ‘C.봇쉬’(1874~1940)였다.
 

이로써 20세기 초기에는 질소와, 인 그리고 칼리를 함유한 화합물을 공급하는 화학공업이 착실하게 발전하였다. 1900년 미국은 2백20만t의 인조비료를 소비하였고, 1950년에는 1천8백만t, 1965년에는 3천1백만t으로 껑충 뛰었다. 인조비료가 얼마나 식량생산에 크게 이바지 했는가를 여기서 볼 수 있다.

 

트랙터와 경운기의 등장
 

과학적 영농과 함께 농업생산성을 높혀준 것은 기계영농 즉 트랙터의 출현이었다. 새로운 기계나 새로운 형태의 동력 등을 농업생산에 응용한 것은 20세기 전반의 커다란 특징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내연기관을 동력으로한 트랙터의 등장이었다.
 

트랙터는 20세기 초반부터 서서히 보급되더니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일반화 되었다. 그 까닭은 전쟁중에 노동력의 부족과 농산물의 높은 가격이 농업 경영자들의 기계도입을 촉진시켰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종래에 쟁기나 수확기, 탈곡기나 파종기가 하던 역할을 트랙터가 떠맡게 된 것이다. 더우기 제2차 세계대전은 이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특히 전후 일본에서 개발한 소형 트랙터(경운기)는 곡물 증산에 돌풍을 일으켰다. 쌀 농사를 짓는 동남아시아 여러 국가에서는 이 소형 트랙터가 더욱 효과를 나타냈다.
 

트랙터는 가축을 대신하는 중요한 동력원이되었다. 가축에 비해서 보다 큰 견인력과 보다 빠른 수송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농기계에 직접 회전력을 전달할 수 있으므로 갖가지 기능을 갖춘 농기계가 개발되고 트랙터와 연결됨으로써 능률을 크게 향상시켰고, 농산물의 생산량을 급격히 향상시켰다.

 

유전공학이 몰고올 ‘제2의 농업혁명’
 

이처럼 화학비료가 사용되고 농업기계가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구의 가족을 먹일 식량은 부족한 실정이다. 제네바에 있는 세계식량협의회의 발표에 따르면 식량의 절대량과 불균형된 생산으로 볼 때 현재대로라면 앞으로 10년 사이에 제3세계에서 5천만명이 굶어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학비료나 농업기계에 이은 새로운 식량생산 기술의 혁신은 없는 것일까? 유전자 재조합이나 세포융합 등 유전자 조작의 기술은 인류를 기아로부터 해방시킬 그러한 혁신일 지 모른다.
 

유전자 조작은 분자 생물학에 기초를 두고 있다. 분자 생물학이란 생명현상을 생체 고분자의 구조와 기능에 바탕을 두고 해명하려는 생물학의 한 분야이다. 이 분야는 1930년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분자 생물학중 분자 유전학이 1970년대 말기부터 연구되어 DNA복제, 유전정보, 그에 기초를 둔 단백질 합성과 그의 조절의 기초가 밝혀졌다. 이로써 유전자 조작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이 기술을 바이오테크놀로지(Biotechnology)라 한다. 이 기술을 바탕으로 식량생산에 커다란 혁명이 올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연구가 진행중인 바이오테크놀로지에는 유전자 재조합과 세포융합이 있다. 원래 자연은 종류가 다른 유전자가 혼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지만 지금은 간단하게 두 유전자를 융합시키거나 치환시킬 수 있다.
 

최근 ‘포테이토’(감자)와 ‘토마토’의 잡종세포가 만들어졌다(이를‘포마토’라 부른다). 감자와 토마토를 한 나무에서 얻게 된 것이다. 또 뿌리에는 감자, 줄기에는 고추가 열리는 나무도 시험단계를 벗어나고 있다. 해바라기가 병충해에 강하고 어떤 환경에서도 비료없이 잘 자란다는 점에 착안해 해바라기에 콩의 단백질 유전자를 심어주는 실험도 성공하였다. 90년대까지 이런 종류의 해바라기는 중요한 식량원으로 등장할 것이다. 또 질소를 고정시키는 박테리아의 유전자를 이식시켜 비료가 필요없는 식물도 만들 수 있게 된다. 어쨋든 유전자 조작 기술의 향상은 장차 생산성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기대된다. 바로 제2의 농업혁명이 눈 앞에 다가온 셈이다.
 

유전공학 제2의 농업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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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오진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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