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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소폭탄의 아버지 에드워드 텔러

원자탄에서 수소폭탄 그리고 스타워즈에 이르기까지 그는 초강력무기의 최대의 지지자이다. 그만큼 거친 비난도 많이 받고 있다.

오늘날 원로과학자중에서 '에드워드 텔러'박사만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 수소폭탄을 개발한 '텔러'는 젊은 과학자들로부터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Dr. Strangelove)' (머리속에 핵전쟁밖에 들어 있지 않은 인텔리광인이라는 뜻)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가하면 반전운동가들의 비난의 과녁이 되고 있다. 심지어는 세계 제2차대전중 함께 원자폭탄개발에 참여했던 원로 과학자들도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다. 1944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였던 컬럼비아대학의 I.I.래비는 "텔러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은 좀더 살기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천문학자 '칼 세이건'은 "가장 무서운 무기를 개발하는데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이 무기가 참으로 좋은 것이라고 기를 쓰면서 주장한다"고 빗대고 있다. 그가 연설하는 곳에는 반전운동가들이 몰려와서 훼방을 놓기가 일쑤이다. 그러나 텔러는 이런 비난과 중상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더 많은 핵실험을 해야하며 군비축소협정은 줄여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펴 나가고 있다. 요즘 레이건 대통령의 '별들의 전쟁' 구상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하고 있는 사람도 바로 텔러박사이다. 그래서 그를 권력의 하인이라고 까지 비난하고 있다.

22세에 박사학위받아

세계 과학계의 매파중의 매파인 '에드워드 텔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그는 190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부유한 유태인집안에서 태어났다. 이 유서 깊은 도시에서 태어난 저명한 물리학자인 '레오 질라드'와 '유진 위그너'(196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는 훗날 텔러와 함께 원폭제조에 참여하게 되며 이곳 태생인 수학자 '존 폰 노이만'구상의 컴퓨터는 텔러의 수소탄제조를 돕게 된다. 소년시절의 텔러는 '수학은 재미있는 학문'이라고 깨닫는다. 그는 부모가 일찍 자라고 하면 침대에 누워서 '하루는 몇초가 될까'는 등 이런저런 계산을 하는데 재미를 붙였다. 텔러의 부친은 아들이 수학에 뛰어나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몇해 뒤 수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내세웠을 때 승낙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수학으로는 먹고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타협한 끝에 화학을 공부하기로 했다"고 텔러는 회상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속였다. 나는 수학과 화학을 함께 공부했던 것이다. 2년뒤 아버지는 마침내 그의 뜻을 포기해버리고 하고싶은 공부를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1930년 그는 약관 22세로 독일의 라이프치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훗날 나치 독일의 원자탄 연구를 지휘했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32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지도를 받았다. 이 논문은 수소탄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텔러의 그뒤 연구에 발판이 되었다.

텔러는 '게팅겐'에서 물질의 분자구조에 관한 연구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히틀러의 반유태정책이 심화되자 독일을 떠났다. 1935년 미국에 건너 온 텔러는 조지 워싱턴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러시아 태생의 물리학자인 '조지 가모프'와 함께 방사선연구를 했다. 그가 이 연구에서 이론화한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어떤 분자의 안전성의 결여를 설명하는 고체물리학의 하나의 형상인 '잔-텔러 효과'이다. '유진 위그너'는 그의 과학자로서의 기량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는 내가 만난 사람중에서 가장 상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치켜 세웠다. 뒷날 그를 몹씨 비난 했던 '래비'도 세계2차대전중과 그 이전의 텔러의 연구업적을 평가하면서 "텔러의 업적은 정상급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매우 우수했다"고 말했다.
 

에드워드 텔러 사진.


원자탄만으로는 부족하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7개월전 미국 과학자들은 독일이 원자를 분열하여 원자력을 방출하는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텔러의 동료 과학자인 '질라드'를 포함하여 많은 과학자들은 곧 원자폭탄이 가능하다고 내다 보았다. 질라드는 미국정부에게 원폭계획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을 납득시키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앨버트 아이슈타인이 서명한 서한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질라드는 친구인 텔러에게 롱 아일랜드에 있는 아인슈타인의 별장으로 차를 몰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텔러는 질라드의 운전사로서 원자물리학계에 뛰어 든 것이다.

아이슈타인은 이 서한에 동의하고 서명했으며 얼마 뒤 '맨하탄프로젝트'(원자탄개발계획)는 시작되었다. 텔러는 초기의 원폭을 만들기 위해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의 설립을 도운 전설적인 연구팀의 일원이 되었다.

그날 이래 텔러는 계속 초무기와 인연을 맺어 왔다. 전쟁이 끝나고 로스알라모스의 원폭 개발팀이 해체되자 텔러는 전쟁터의 일터로 돌아와서 시카고의 핵연구소에서 '엔리코 페르미'(1938년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와 함께 일하게 된다.

그러나 텔러는 다른과학자들과는 달리 이 핵분열폭탄이 미국의 안전을 보장하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에는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보다 더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며 수소원자의 융합에서 나오는 폭발력을 이용하는 수소폭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이 미국의 예상을 뒤엎고 1949년 최초의 원폭실험에 성공한 뒤 텔러는 핵융합폭탄을 만들어야 한다는 로비활동을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 문제는 뜻밖의 사태가 일어나서 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 로스 알라모스에서 텔러와 함께 일했던 독일 태생의 영국 물리학자인 '클라우스 훅스'가 1950년 3월 열핵반응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포함하여 미국의 많은 원폭비밀을 소련에 제공하여 간첩죄를 선고 받았던 것이다. 이 '훅스'사건의 결과 트루만 대통령은 얼마 뒤 미 원자력 위원회에 대해 수소폭탄 개발에 착수하라고 명령했다. 텔러는 이때 수폭개발에서 중요한 공헌을 했다. 1952년 11월 사상 최초의 열핵폭발이 남태평양 엘루제래브섬 밖에서 터졌으며 바다는 폭 1마일, 깊이 1백75피트 깊이로 패였다. 다음에는 소련이 수폭을 터뜨렸다. 그러나 텔러와 일부과학자들은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이 정신적인 지원을 보냈더라면 미국은 더 일찍 수소폭탄을 개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불평을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오펜하이머가 미국의 장래의 무기개발에 대해 무성의 하다고 생각했으며 미국원자력위원회는 오펜하이머의 신원보증을 취소했다. 이런 조치는 텔러의 불리한 증언이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텔러가 2차대전후 창설을 도운 무기개발기관인 「로렌스 리버모어」연구소에서 전화를 하고 있다.


노벨상을 타지못한 것은 잘된 일이라고

텔러의 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그의 비판자들중의 일부 사람들까지도 열핵연구에서의 그의 공헌은 노벨상의 대상이었으나 그의 정치적인 자세로 희생되고 말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원폭프로젝트에 관여했던 과학자들중에는 노벨상을 탄 사람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수폭개발에 관여한 과학자들중에는 인권운동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소련 수폭의 아버지인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텔러는 노벨상을 타지 않은 것은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만약에 뒤늦게 노벨상을 타게 된다면 세상의 조롱감이 되고 야유의 대상이 되어 끔찍한 광경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다고 고개를 내졌는다.

텔러의 정력에는 누구나 손을 들 정도이다. 3년전 76세의 나이에 심장수술을 한뒤 2개월도 못되어 그는 스탠퍼드 대학 캠퍼스에 있는 보수적인 '딩크 탱크'인 후버연구소와 이웃의 무기연구기관인 '로렌스 리버모어'국립연구소간을 분주하게 오가면서 하루 10시간씩이나 일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논쟁과 자문을 위해 워싱턴, 보스턴, 뉴욕을 분주하게 왕래하고 있다.

그는 어떤 것을 창조하는 책임과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의 책임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창조의 책임은 과학자에게 있으나 사용방법에 관한 책임은 공동사회가 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과학의 비밀은 특별한 경우에만 제한시켜야 하며 "과학은 공개된 상태에서 번창하는것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미국은 오늘날 방어용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나 미국인들이 그 내용을 알지 못하면 국가의 의사결정과정을 왜곡 하여 결국 자유세계 과학자들의 연구작업을 막아 버리는 결과를 빚어낸다고 말하고 있다.

80고개를 바로 앞둔 이 노과학자는 제2차 세계대전후 그의 도움으로 창설된 리버모어 연구소에 대해 최대의 애착을 느낀다면서 아직도 왕성한 성취욕을 과시하고 있다.
 

심장수술을 받고 폐활량을 시험하고 있다.
 

1987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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