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우리나라는 '컴퓨터 성년식'을 거행해야 할 때이다. 지금부터 20년 전인 1967년 경제기획원과 한국생산성본부가 IBM1401과 FACOM202를 들여와 컴퓨터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20세의 나이면 스스로 판단하여 선택하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한다. 과연 우리나라 정보산업은 '성년'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은가. 기계도 기술도 없었던 황무지에 뛰어들어 오늘의 정보산업을 이끌고 나가고 있는 대표적 인물의 한사람인 이용태박사(54세)를 만나, 우리나라 정보산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의 모습을 조명해보았다.
이박사는 한국데이타통신이 설립되면서 부터 지금까지 5년동안 이 회사의 책임을 맡아왔고 올 3월에는 우리나라 정보산업계를 대표하는 한국정보산업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후발주자의 이점 살려야
▶먼저 정보산업협회 회장으로 선출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아무래도 전임자인 정주영회장보다는 정보산업의 실질적 내용을 잘아는 이박사가 회장직을 맡는다면 그 역할이 달라지리라 예상됩니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협회의 성격이 업계가 모여 만든 단체이니까 참여 업계의 공동이익을 구현하는 것이 우선이겠지요. 그렇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보산업의 특성상 공동보조를 맞추지 않으면 큰 혼란을 겪을 수 있읍니다."
▶표준화문제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보산업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미국 일본의 경우만 하더라도 많은 국민들이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지만 많은 곤란을 겪고 있읍니다. 예를들어 A의 데이타뱅크를 이용하던 사람이 B의 데이타뱅크를 이용하려면 또 다른 컴퓨터를 사야 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읍니다. 이런 선례를 그대로 답습해서는 안되겠지요. '후발주자'의 이점을 살리는 측면에서 업계의 공동보조는 큰 의미를 갖고 있읍니다. 정보가 모든것을 해결해주겠지 하는 태도는 버려야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시지요.
"컴퓨터하면 IBM이고 IBM하면 컴퓨터아닙니까. 그만큼 IBM은 '컴퓨터의 대부'로 군림하지요. 그런데 현재우리나라는 퍼스널컴퓨터(PC)수출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읍니다. 85년 말부터 시작한 PC수출이 올해에는 2백만대를 수출할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호환기종만을 만들어 팔 것이 아니라 우리나름대로 표준기종을 개발한다면 어느정도 파워를 과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C수출 2백만대'와 '우리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표준기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약간은 업무에 지친듯한 그의 표정이 조금은 활기를 찾는다. PC이야기가 나온김에 '성년이 된 우리나라 정보산업'이 어느 정도 실속있는지 물었다.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은 10년 남짓한 역사치고는 매우 빠른 성장을 했읍니다. 현재 1MD램급 반도체의 양산체제를 갖추고 있으니까요. 물론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4MD램 16MD램 반도체를 개발했다고는 하지만 양산체제를 갖추고 제품을 생산해내는데에는 우리가 유리한 점도 있읍니다. 수율이나 가격경쟁다. 현재 2백56KD램에서 우리의 시장 점유율이 높지요. 대량으로 쓰일시점에서는 우리의 시장경쟁력은 더욱 강화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반도체산업 중 일부분인 메모리분야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의 수준은 분명 '세계 3위'라는 타이틀을 붙일만하지요."
▶소프트웨어 분야는 어떻습니까. 영세한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하우스들이 자리도 잡지 못한 상황에서 대기업들이 외국 유명기업들과 합작, 대규모회사를 차리고 있는데…
"90년대에 가서는 정보산업 중 가장 각광을 받을 수 있는분야는 소프트웨어분야라고 할 수 있읍니다. 이 분야의 우리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낙후돼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현재 중소 소프트웨어 하우스들을 중소 제조업체와 연계시켜 특정분야의 소프트웨어를 집중 개발하게 하는 것이 좋을듯 싶습니다. 이렇게 얼마를 하다보면 영세한 소프투웨어업체들도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축적하게 되고 한분야의 전문업체로서 성장할 수 있게 되겠지요.
대기업들이 소프트웨어업에 참여하는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장려할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소프트웨어라는 것이 몇명이 모여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몇백명이 시스팀화 되어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으니까요. 문제는 각기 능력에 맞게 전문화해 나가는 것이 핵심이지요."
얼마전 전국에 걸쳐 시행된 고용관리전산화 소프트웨어를 비롯 행정전산망 소프트웨어의 개발능력을 볼때 우리의 능력이 터무니없이 뒤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앞으로 소프트웨어 수출은 턴키베이스(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함께)형식으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견해를 덧붙인다.
▶이박사께서 직접적으로 관련된 데이타 통신분야는 어떻습니까.
"이 분야에서 우리도 흉내는 다 내고 있읍니다. 전용회선도 2만 가까이 되었고 패켓망도 1~2천 정도되는데 앞으로 급격한 신장을 보일 것으로 전망됩니다. 컴퓨터문화가 꽃피는 것은 역시 통신과의 결합이 이루어질 때 아니겠읍니까."
메인프레임도 우리가 넘어서지 못한 벽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요즘은 메인프레임이 32비트 마이크로칩을 사용, 멀티프로세서화 되기 때문에 우리도 한번 부딪쳐볼 수 있단다. 행정전산망 주전산기 국산화계획이 추진되고 있고 32비트 마이크로컴퓨터의 국산화율이 높아지는 것을 감안할 때 그의 낙관적인(?) 견해는 타당성이 있는 듯하다. 정보산업뿐 아니라 전자공업 전체에서도 우리나라는 세계 7위권이며 수년 내에 '7'이라는 숫자는 '3~4'정도로 낮춰질 수 있다는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사물을 숫자화시켜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이 많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지만 전문기술자로서의 객관적인 시각임을 감안할 때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이박사가 대학에서 공부할 때는 컴퓨터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존재하지도 않았을텐데 어떻게 이 분야와 관련을 맺었읍니까.
"저는 물리학을 전공했읍니다. 미국 '유타'대학에서 '액체에 대한 통계역학적 연구'라는 학위논문을 쓸때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했지요. 기체는 이상기체라는 것이 있고 고체는 결정체이기 때문에 이론적 접근이 쉽지만 액체는 그렇지 못합니다. 자연히 컴퓨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읍니다. 컴퓨터와의 첫 인연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읍니다.
국내에 귀국해서 당연하게 찾은 곳이 큰 컴퓨터가 있는 KIST(현 과학기술원)였읍니다. 낮에는 연구원들에게 컴퓨터를 쓸 수 있게 도와주고 밤에는 자신의 공부를 계속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당시 국내 사정은 컴퓨터인력이 형편없어 자연히 이 분야의 터줏대감이 되고 말았읍니다."
그로부터 그의 인생행로는 우리나라의 컴퓨터산업과 궤를 같이 한다. 1974년 KIST내 전자계산기 국산화 연구실에 근무할 당시를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미국 '인텔'사에서는 마이크로프로세서(하나의 칩 위에 컴퓨터의 기능을 집적시킨 것)을 개발했읍니다. 저는 그때 영감 비슷한 것을 느꼈읍니다. 우리나라가 단군 이래 최대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읍니다. 그 이유는 새로운 혁신기술이 탄생했을 때 그것을 상품화하는데 기존의 그룹은 그렇게 유능하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예로 처음 컴퓨터산업이 자리잡을 때 GE나 RCA같은 대기업에서는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그당시 무명이었던 IBM 유니백 CDC등이 컴퓨터산업의 샛별로 등장했읍니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미니컴퓨터가 등장했을 때도 정보거인 IBM이나 CDC등은 뒤처지고 이름도 없었던 DEC데이타제너럴 프라임 등이 두각을 나타냈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저는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채용한 퍼스널컴퓨터 분야에서 우리도 한번 도전해볼 기회라고 생각했읍니다."
그러나 그당시 '연구원 1백명만 지원해주면 세계에서 제일가는 컴퓨터회사를 만들어되돌려 주겠다"는 호언장담(?)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없었다. 다만 OB맥주 사장이던 정수창씨가 1백명의 인력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으나 KIST의 행정체계 상, 돈이 아닌 인력지원은 불가능해 에피소드로 끝나고 말았다는 것.
그의 말이 이어진다.
"77년 2번째 기회가 왔읍니다. IBRD(세계은행)에서 2천9백만달러의 돈을 빌려와 전기기술연구소(현 전자통신연구소의 전신)를 경북 구미에 세웠읍니다. 저는 여기서 컴퓨터개발담당 책임을 맡았지요. 내려가자 마자 여러가지 계획을 세웠읍니다. 연구센터를 설립, 상가분양하듯이 장소를 대여해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사람을 모으려 했지만 자금지원이 안돼 중도에서 포기하고 말았읍니다. 그당시 관료들을 설득하기가 어떻게나 어려운지 지금과 비교해볼 때는 격세지감이 있읍니다."
그의 구상을, 성공여부를 따지기 전에 한번쯤 시도해봤다면 지금의 상황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이후는 어떤 일을 했읍니까.
"벤처비즈니스 설립에 몰두했다고나 할까요. 유능한 젊은 엔지니어를 규합, 조그만 컴퓨터회사를 차리는 일을 했읍니다. 현재 우리나라 컴퓨터산업의 중견업체로 성장한 삼보컴퓨터 쿠닉스등이 그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장사꾼으로의 소질을 잠시 발휘했다고 볼 수 있지요. 82년 이후는 한국데이타통신이 설립되면서 지금까지 이 회사의 사장노릇을 하고 있읍니다."
정보산업의 아킬레스 건
▶이박사의 견해대로라면 국내 정보산업은 암초없는 바다를 순항중인 셈인데, 일반 국민들은 아직 컴퓨터를 거리감있는, 상대하기 거북한 기계로 인식하고 있을텐데…
"맞습니다. 국내 정보산업의 아킬레스 건이 바로 이부분입니다. 보다 장기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국민들 대다수의 컴퓨터 인식도가 그나라의 정보산업발달을 가름하는 핵심적 요소가 됩니다.
제가 재미있는 예를 하나 들지요. 제동생이 일본에 여행갔을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여행사에 찾아갔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은 이정도이고 몇일을 머무를 예정인데 어떻게 하면 되겠읍니까'하고 문의했더니 여행사직원이 열심히 컴퓨터를 두드리고 나서 안내서를 주는데, 어디서 자고 무엇을 먹고 어디를 관광하라는 자세한 내용이 실려있더랍니다. 그대로 했더니 아주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고 하면서 저를 핀잔하더군요. 정보산업을 이끌고 간다는 사람이 이정도도 안해놓고 뭐를 하냐고 하면서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정보산업에 종사하는 저희들 책임이 크다 하겠읍니다.
당장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는것은 아니지만 우리도 행정전산망이 완성되어 면사무소 우체국에 컴퓨터가 들어가게 되고, 생활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지역간 격차없이 얻어낼 수 있게되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지요.
체신부는 올해를 정보산업의 해로 정하고 각종 행사를 통해 국민들을 계몽할 계획입니다. 일본은 차치하고 대만 싱가포르 등에서도 정보산업의 달, 정보산업 주간 등을 만들어 놓고 많은 행사를 하고 있읍니다. 또한 프랑스와 같이 전화번호부를 입력한 '미니텔'이라는 소형컴퓨터를 보급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겠지요. 국민학교에서는 굳이 처음부터 컴퓨터를 교육과정에 넣으려고 하지말고 특별활동으로 권장, 몇개의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컴퓨터와 친밀감을 갖도록 유도하는 방법도 건의하고 있읍니다.
이런 방법들이 시행되고 개인용컴퓨터 값이 컬러TV값보다 싸지는 시점에서는 우리 국민들도 컴퓨터를 생활의 필수도구로 사용하리라 확신합니다."
현재 자신의 위치를, 관계 업계 학계의 지원을 받아 전문기술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매우 이상적인 자리라고 만족해하는 이박사는 내심 정보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제3의 기회를 잡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