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에서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기 때문에, 제우스 신의 분노를 사서 코카서스 산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먹혔다고 한다. 제우스는 인류를 벌하기 위해 ‘판도라’라는 여자를 지상에 보내게 되고, 판도라는 지상에서 금기를 깨고 ‘판도라의 상자’를 연다. 그러자 안에서 재앙과 죄악이 튀어나와 온누리에 퍼지게 되었다.
과학은 종종 프로메테우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상자에 비유된다. 인류가 불을 다루게 되면서 과학은 발전하기 시작했고, 물건의 대량생산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발생하면서, 과학의 발전이 ‘판도라의 상자’ 같은 재앙의 씨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진 과학의 영향력과 물질적인 만족을 위해 치뤄야할 기술의 위험성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최근 영국에서 일반 체세포를 이용해 성장한 양을 복제했다는 사실과 인간 복제도 가능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과학자들조차 과학의 위용에 전율을 느꼈다. 인간복제기술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돈 있는 사람들은 복제인간의 장기를 사용해서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려 할 것이다. 미친 과학자는 생체실험의 기니피그(실험쥐)로 사용할지도 모른다. 인간 복제 실험 중에 복제인간이 사망하거나 돌연변이라도 생기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SF 영화는 복제인간 탄생의 서막을 알리는 ‘양 복제’가 성공하기 훨씬 전부터 복제인간의 문제를 다루어 왔다. 대통령의 코를 뜯어내서 또 한 명의 대통령을 만들어낸다는 우디 알렌의 코미디 영화에서부터 바쁜 과학자가 자신의 분신을 복제해 일을 나눠시키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룬 영화들까지 ‘인간 복제’를 다루는 방식도 다양하다.
우수한 유전자 vs 돌연변이 유전자
그 중에는 복제인간의 탄생으로 빚어지게 될 비인간적인 미래사회와 그것이 몰아갈 비극적인 결말을 보여 주면서 ‘인간 복제’의 윤리적인 문제와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화들도 있다. 인간복제기술이 현실로 다가온 지금,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모습들을 현실처럼 보여 주고 있는 SF영화들은 우리에게 인간복제기술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다.
‘저지 드레드’(Judge Dredd)는 자신과 똑같은 복제 인간을 대량 생산해서 미래사회를 지배하려는 복제인간의 이야기다. 폐허가 된 지구와 황폐한 악의 소굴로 전락한 미래 도시. 걸어다니는 법전이자 법 집행관인 판관(저지)들이 황폐한 도시의 악을 소탕하고 세계 질서를 유지한다. 드레드(실베스터 스탤론)는 법전을 신봉하고 원칙을 준수하는 판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무고한 살인을 저질러 드레드에게 심판을 받은 전직 판관 리코는 탈옥한 후, 드레드의 옷을 훔치고 드레드의 총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드레드는 살인혐의로 소환을 당하고, DNA 분석은 드레드를 유죄로 인정한다. 드레드의 총은 드레드와 유전자가 똑같아야만 사용할 수 있다. 드레드 외에는 아무도 그의 총을 쏠 수 없었던 것이다.
‘드레드와 리코의 비밀’을 알고 있는 수석 판관 파고는 죽음을 맞기 직전 드레드에게 모든 비밀을 말해 준다. 드레드와 리코는 모두 우수한 판관을 만들기 위해 파고의 DNA를 원료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이었다. 그러나 우수한 유전자들로만 이루어진 드레드는 정의를 수호하는 판관이 되었지만, 유전자 조작과정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난 리코는 사악한 판관이 되버린 것이다. 새로운 지배자를 꿈꾸는 리코는 판관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자, 자신의 DNA를 대량 복제해서 자신과 똑같은 복제인간들을 판관으로 만들려고 한다. 리코는 고속 성장 인큐베이터를 이용해 8시간만에 자신과 똑같은 복제 인간들을 수없이 만들어 내려 한다.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는 리코의 소굴에서 드레드는 리코를 쳐부수고, 도시의 평화를 기약하면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이 영화는 히틀러나 후세인같은 사람이 세계 지배를 목적으로 인간복제기술을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만화같은 공상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실제로 이 영화의 원작은 존 와그너와 카를로즈 에즈쿠에라의 잡지 연재만화 ‘2000 AD’이다.
엉성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우리의 주의를 끄는 점은 인간복제기술을 이용해 자신과 똑같은 복제인간을 대량 생산해서 사회를 지배하려는 리코의 망상이 결코 순진하지만은 않다는데 있다. 생식세포를 이용해서 똑같은 형질의 유전자를 가진 다수의 새끼를 탄생시켰던 그 동안의 동물 복제와는 달리, 이번 양복제는 일반 체세포를 이용함으로써 1세대의 유전자를 100% 똑같이 물려받은 2세대를 탄생시켰다. 그러니까 이제 체세포 복제를 통해 유전자를 제공하는 사람과 유전적으로 똑같은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됐다. 리코와 똑같은 복제인간들의 탄생을 예고한 것이다.
복제인간이 만들어진다 해도 이들이 지구를 지배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핵치환된 수정란을 인간의 자궁에 착상시켜 키워야 하고, 이렇게 태어난 아기를 건장한 청년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가속 성장 인큐베이터를 이용해서 리코와 똑같이 성장한 복제인간을 8시간만에 만들어낸다. 이것은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호르몬을 이용해서 고속으로 성장을 촉진한다 하더라도, 머리 속에 담아야 할 재능이나 지식을 인큐베이터가 만들 수는 없다. 만약 재능과 지식이 뇌의 시냅스 연결을 강화하여 복제 인간에게 주입될 수 있다면 똑같은 어른들을 복사기처럼 찍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까운 미래에 실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복제 실험에서 유전자 돌연변이가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또 예측할 수 없었던 복제인간이 만들어지게 되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저지 드레드’에서 리코는 유전자 돌연변이가 만들어낸 악마였다. 인간의 악마적 성향이 유전자 발현에 의한 것이라는 영화의 가정은 아직 과학적인 증거가 빈약하지만, 육체적인 기형아나 돌연변이가 탄생할 확률은 매우 높다. 로스린 연구소의 발표에 따르면, 복제양의 탄생은 2백77번의 실패 끝에 성공했으며 7마리의 복제 양이 탄생되었으나 ‘돌리’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실패를 감수하면서까지 인간에게 적용하기엔 무서운 실험임을 알 수 있다.
복제인간들의 고뇌
아이작 아시모프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안드로이드’(The Android Affair)는 생체실험에 쓰기 위해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는 이야기다. 심장병에 걸린 과학자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과 똑같은 병을 가진 복제인간들을 만들어내서 생체 실험을 한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복제인간을 만들어서, 만약 병을 고칠 수 있게 되면 자신을 해동해서 고쳐달라고 부탁한 후 냉동인간이 된다. 그러나 복제인간은 냉동 장치의 플러그를 뽑아 과학자를 죽이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면서 모든 연구를 통제한다.
인간의 병을 고친다는 미명하에 복제인간을 생체실험에 사용한다는 영화의 내용은 충격적이면서 그럴듯하다. 그러나 영화는 치명적이게도 복제인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인간의 생체실험에 이용하기 위해서는 복제인간은 인간과 같은 생명체여야 한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복제인간은 컴퓨터와 인공장기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복제인간이다.
영화는 자신이 생체실험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갈등하며 진정한 인간이 되기를 꿈꾸는 복제인간의 비애를 주제로 한다. 인간을 사랑하게 된 복제인간을 통해 과학기술이 잉태한 복제인간의 정체성 문제를 꼬집고 있다.
복제인간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에서 복제인간의 자아 정체성의 문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암울한 2019년. 타이렐 사는 ‘리플리컨트’라 불리는 복제인간을 만들어 우주 식민지 개척을 위해 사용한다. 그러나 리플리컨트들은 4년밖에 안되는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이들 중 4명이 지구로 잠입한다. 지구에 잠입한 리플리컨트를 제거하는 임무를 띤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에게 4명의 리플리컨트를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데커드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한 리플리컨트를 어떻게 구분할까? 데커드는 리플리컨트들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을 이용해서 그들을 색출한다. 어머니에 대한 그들의 기억은 인공적으로 주입된 것이거나 거짓이기 때문이다.
리플리컨트는 자신을 만든 아버지 타이렐을 찾아가 수명연장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자, 타이렐의 눈을 찔러 죽인다. 매우 인상적인 이 장면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프스 왕’을 연상시킨다. 오이디푸스 왕은 자신이 아버지를 죽인 자임을 깨달았을때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찌른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의미에서 자신의 눈을 찔렀다면, 리플리컨트는 자신을 만든 인간에 대한 분노와 인간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타이렐의 눈을 찌른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신의 질서에 굴복한 인간이라면, 타이렐을 죽인 리플리컨트는 인간의 질서에 도전한 복제인간을 상징한다.
결국 4년의 수명을 채우고 마지막까지 남은 리플리컨트 베티(룻거 하우어)는 데커드를 구해줌으로써 인간보다 더욱 인간적인 모습으로 최후를 맞는다. 그 동안 ‘블레이드 러너‘에서 그려진 복제인간의 갈등, 오래 살고 싶은 욕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원망은 신 앞에 선 인간을 상징한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복제인간이 현실화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책임져야할 현실이 될 것이다.
‘인간 복제’의 또다른 문제점은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복제인간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인간을 개조하려는 야욕에 이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영화 ‘닥터 모로의 DNA’는 비록 인간의 유전자 복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동물의 우수한 유전자와 인간의 우수한 유전자를 결합해서 새로운 인류를 만들려는 어느 노벨상 수상자의 헛된 꿈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장점과 동물의 장점을 따서 새로운 짐승인간(Beast man)들을 만들고자 외딴 섬에서 무수한 실험을 하지만 ‘흉측한 짐승인간’만을 만들어 낸다. 결국 자신이 만든 짐승인간들에게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과학자의 파멸은 생명의 질서에 개입한 인간의 파멸을 상징한다.
“더 이상 과학자도 실험실도 실험도 필요 없다. 아버지가 만들려고 했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으로 남고 싶다”라는 짐승인간들의 마지막 대사는 자연 선택과 자연 교배라는 생명의 질서에 함부로 도전한 인류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아닐까.
어떻게 사용해야 할 것인가
SF영화는 함부로 사용된 유전자 복제 기술이 얼마나 큰 재앙을 초래하게 되는지, 또 복제된 인간들이 겪게 될 심정적인 갈등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어쩌면 ‘양 복제’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모두가 ‘인간 복제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 것은 SF영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실제로 핵치환된 인간의 수정란을 원숭이의 자궁에 착상하거나 기계에서 대량 복제할 수 있다면, 영화에서처럼 위험한 목적으로 복제 인간들을 악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느 교수는 “만약 인간복제를 허용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아인슈타인처럼 머리가 좋은 복제인간을 만들 것이고, 미국에선 마이클 조던을 많이 만들어낼 것”이라는 우스갯 소리를 했다. 또 “양수검사라는 기술이 미국에선 다운증후군 검사에 사용되는데, 우리나라에선 성감별에 사용된다”고 덧붙였다.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본다면, 남아를 선호하는 우리나라에서 복제기술의 사용은 더욱 기형적일 수 있다. 사회는 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충분히 고려해서 기술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통제할 수 있다. SF영화의 결말을 '기우'로 만드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