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제임스D.왓슨

20세기 생물학의 최대발견 유전자의 구조해명

'DNA의 골격부분이 나선형으로 꼬여 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4종류의 염기가 어떻게 배열돼 있을까'

1951년 가을 어느날,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 '캐빈디쉬'연구소에는 애띤 얼굴의 미국 청년 한사람이 연구생으로 들어 왔다. 당시 23세의 왓슨이라는 이름의 이 깡마른 유학생을 노벨상수상 후보감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왓슨은 '노벨상의 농장'이라고 불리는 이 연구소에서 '프란시스 크릭'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중의 하나인 생명의 본질, 유전자의 구조를 밝혀냈으며 크릭, 윌킨스와 함께 1962년도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게 된다.


왓슨과 DNA 모델
 

대학 4년때 DNA에 관심

'제임스 듀이 왓슨'은 1928년에 태어나 미국 시카고에서 자랐다. 어릴때부터 신동(神童)이라고 불리던 그는 15세에 시카고 대학의 장학생이 되었다. 그가 유전자 DNA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대학 4학년 때였다. 유전자의 본질을 밝혀 보려는 강렬한 충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1947년 19세에 시카고대학을 졸업한 왓슨은 캘리포니아공대와 하바드대학에 각각 대학원 입학허가원을 냈다. 그가 캘리포니아 공대를 택한 이유는 당시 이 대학 생물학과에는 뛰어난 유전학자들을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하버드대학에는 "무엇을 얻으려는 생각도 없이" 원서를 냈던 것이라고 뒷날 회상하고 있다.

아뭏든 그는 이 두 대학에서 모두 툇자를 맞는다. 이것은 씁쓸한 경험이기는 했으나 그에게 오히려 학자로서 대성할 수 있는 '행운의 길'을 터 주었다. 왓슨은 "만약에 하바드대학 대학원에 진학했다면 그곳에서 유전자연구에 들뜬 사람은 전혀 찾지 못하고 결국은 나도 박물학자로 쳐지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는 시카고대학의 은사인 인류유전학자 '할프 스트란도스코프'의 조언으로 인디아나대학 대학원으로 들어 가서 이름난 유전학자인 H.J.말러와 뛰어난 두 젊은 유전자학자인 '살바도르 루리아'와 '트레시 존네본'을 만나게 된다. 말러는 왓슨이 입학하기 바로 전해에 노벨상을 탄 대과학자였으며 그의 전공은 이미 학문으로서는 한물 간 초파리의 연구였다. 그래서 노벨수상자인 말러와 함께 연구하겠다는 당초의 희망은 버리고 미생물을 이용하여 연구를 하고 있는 존네본과 루리아쪽에 관심이 기울어졌다. 과학자로서 대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의 선택이라면 왓슨의 경우는 어떤 판단을 기준으로 스승을 택했을까?

"대학원에 들어 간 뒤 얼마동안은 여러 연구그룹 중에서도 도대체 어떤 그룹을 택해야 할 것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대학원생 가운데 돌아가던 평판은 존네본에 대해서는 숭배까지는 이르지 못해도 무조건 칭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루리아는 틀렸다고 생각하는 인간에 대해서는 몹시 거만한 태도로 나온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루리아의 첫번째 강의를 듣고 난 바로 그 순간부터 나는 존네본의 강의인 짚신벌레보다 루리아의 '파지'(세균에 감염해서 세균을 녹이는 바이러스)쪽으로 강력하게 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가을 학기를 보내면서 머리가 둔한 학생에게는 가혹하다는 루리아에 대한 나쁜 소문을 뒷받침할만한 사실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의 연구그룹에 끼기에는 역량부족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을 내심 느끼면서도 용기를 내어 하루는 루리아를 찾아가서 봄학기에는 그의 지도하에 연구를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루리아는 그자리에서 나의 청을 허락해 주었을 뿐 아니라 X선으로 불활성화된 파지가 어떤 다중감염재활성화(多重感染再活性化)의 조짐을 보이는가 알아보는 과제까지 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왓슨은 노벨수상자들이 흔히 걷는 사제간의 패턴으로 들어서게 된다. 루리아의 도움으로 왓슨은 뒷날 루리아와 함께 1969년도 노벨상을 받은 막스 델브뤼크가 주재하는 유명한 콜드스프링 하버의 하계 박테이라파지 과정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노벨상후보자와 연구를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DNA연구위해 유기화학공부

1950년 약관 22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왓슨은 지도교수 루리아의 주선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의 생화학자 헤르만 칼카르 밑에서 연구를 계속하게 된다.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서구풍의 루리아는 빌딩의 숲속에서 자라나 경쟁밖에 모르는 미국의 유기화학자들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제자를 이들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교양있는 학자 칼카르에게 보내기로 한 것이다. 이미DNA가 유전의 열쇠를 갖고 있다고 꿰뚫어 보고 있던 루리아는 유전자의 화학적구조를 밝혀 그 본질을 알지 못한다면 그 기능도 알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생물학자인 그는 이제와서 세삼스럽게 화학공부를 시작할 수도 없는 형편이어서 젊은 제자인 왓슨에게 유기화학공부를 시킨 뒤 함께 연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카고대학시절에는 새에만 관심이 있었고 화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까다로운 과목은 이수하지 않아도 어떻게 슬쩍 넘어갈 수 없을까하는 궁리에만 바빴던 왓슨은 인디아나대학원에 들어가서도 유기화학공부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했었으며 코펜하겐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1951년 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생물세포에 관한 학술회의에 참석했던 왓슨은 런던 킹즈 칼리지의 모리스월킨스가 발표한 DNA의 결정X선 해석상을 보고 바로 그것이 유전자가 아닐까하고 직감했다. 그는 칼카르 밑에서 1년 남짓 지내면서 당시 칼카르가 연구하고 있던 핵산의 물질대사라는 생화학적인 어프로치는 유전자의 구조해명에는 쓸모가 없다고 단정하는 한편 해명의 지름길은 결정락(結晶学)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X선을 사용하여 분자연구를 하는 일은 영국과학의 하나의 특기였다. 1950년초 런던대학의 모리스 월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크린은 높은 해상도를 가진 DNA사진을 찍는 데 성공은 했으나 X선으로 찍은 사진은 보통사진과는 다른것이다. X선을 수렴하는 렌즈가 없어 대신 수학을 이용하여 DNA의 구조가 이렇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리를 근거로 모델을 만들어야만 했다.


왓슨(왼쪽)과 크릭
 

크릭과의 만남

1951년 왓슨이 자리를 옮긴 케임브리지대학의 캐빈디쉬 연구소는 결정구조연구에 X선을 사용한 업적으로 25세의 젊은 나이에 노벨물리학상을 부친과 함께 받았던 로렌스 브레그경이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왓슨은 이곳에서 프란시스 크릭이라는 물리학도를 만난다. 이35세의 물리학박사 후보생은 머리가 너무나 날카로와서 한가지 일에 꾸준히 매달리지 못하는 변덕스러운 위인이었다. 당시 단백질구조를 해명하기 위한 이론에 열중하고 있던 크릭은 무엇인가 새로운 착상이 떠오르면 흥분이 앞서 누구나 붙들고 떠들어 대다가는 며칠 뒤 그 이론이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실험실로 돌아가 다시 새로운 착상에 파묻히곤 했다. 그러나 크릭은 다른 연구자의 실험결과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를 재빠르게 파악하고 그것을 조리있게 체계화할 수 있는 재치있는 사람이었다. DNA의 구조를 밝혀 단번에 유전의 비밀을 파헤쳐서 잘만 하면 노벨상을 바라 볼수 있다는 왓슨의 야심찬 생각에 매료된 크릭은 곧 왓슨의 연구에 함께 뛰어 든다. 이들의 연구방법은 특이했다. 두사람은 실험은 별로 하지 않고 분자모델을 만드는데만 골몰했다. DNA는 당, 인산, 염기로 구성된 고분자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런 구성 요소들이 어떤 방법으로 결합하면 안정된 분자구조를 얻을 수 있을까하는 것이 연구의 주요한 과제였다. 두사람은 마분지로 만든 모형을 이리저리 조립했다가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해체하는 일만 되풀이했다. 왓슨은 생물을 전공했고 크릭은 물리학을 전공했기 때문에 화학에는 두사람 모두가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연구소에는 일류 유기학자와 구조화학자들이 기라성같이 진을 치고 있어 이 두사람이 만든 모형이 화학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가 하는 정도는 쉽게 가려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두사람이 DNA연구에 착수하던 무렵 이 연구의 실마리를 풀어줄 중요한 사실이 발표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의 '라이너스 폴링'은 단백질의 일종인 콜라겐의 구조가 나선구조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또 1952년에는 미국 콜드 스프링하버연구소의 '알프레드 허쉬'와 '마더 체이스'가 DNA가 유전물질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제 DNA의 구조를 밝히는 문제만 남았다. 이리하여 누가 먼저 이 구조를 해명하여 노벨상의 고지를 점거할 것인가 하는 세계 과학계의 경쟁은 숨가뿐 막바지단계에 이르게 된다.

크릭과 왓슨은 당과 인산으로 된 DNA의 골격부분은 나선형으로 고여 있을 것이라고 어림하고 시행착오를 되풀이 하던 끝에 2개의 골격이 평행을 이루며 서로 뒤엉킨 형태로 나선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문제는 염기였다. DNA에 함유된 4종류의 염기를 어떤 식으로 배치하면 무리없이 2중나선속에 들어 갈 수 있을까? 왓슨은 염기가 둘씩 '아데닌과 티민, 구아닌과 시토신'으로 짝을 이루며 2개의 골격을 결합시키고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뒷날 왓슨은 이 결정적인 순간 영감이 번쩍인 것은 자기의 머리속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때 왓슨은 마분지를 잘라 모델을 만들면서 뒤적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쓰다말고 떠벌이던 크릭은 왓슨이 염기의 쌍과 그 대칭성을 말할 때 눈을 번뜩이였다.


DNA의 2중나선구조(컴퓨터 처리)
 

2중나선 구조의 모형완성

이튿날 이들은 책상위를 말끔히 치우고 연결된 염기의 상을 늘어놓기 시작햇다. 이때 왓슨은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비로소 이중나선구조의 수수께끼가 확풀리는 순간이 왔다고 느꼈기 때문이없다. 왓슨은 15년 뒤에 펴낸 〈2중나선〉이라는책속에서 이날의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깊은 행복감을 맛보면서 점심을 먹고 이처럼 아름다운 구조가 존재하지 않을리 없다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들은 1주일만에 DNA 2중 나선구조의 모형을 완성했다. 그것은 화학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분자모형이었으며 유전학의 근본문제에 대한 해답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유전자는 자기 자신과 꼭 같은 것을 복제하는 특성을 갖고 있어야 하는데 왓슨과 크릭이 해명한 것과 같은 구조의 DNA 분자라면 쉽게 자기복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왓슨과 크릭이 1953년 봄 영국의 과학전문지인 〈네이쳐〉에 DNA 2중나선구조를 발표하자 온 세계의 생물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신비의 베일속에 가려 있던 유전이라는 현상이 분자의 거동으로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발견을 계기로 종래 물리학과 생물학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찬란한 분자생물학 황금시대의 막이 오르게 된다. 유전자, 분자생물학분야는 60년대 이래 과학부문에서 가장 많은 노벨수상자를 배출하여 그 수는 20명을 넘는다.

1955년 하바드대학은 왓슨을 교수직에 맞아들였다. 그는 이 대학에서 유전과 그 성장 및 세포막연구에 착수하는 한편 세포를 암으로 만드는 바이러스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왓슨이 하바드대학의 정교수가 된 것은 크릭-왓슨의 연구가 발표된 8년 후인 1961년이었으며 이 때 왓슨의 나이는 33세였다.

베스트셀러가 된 2중나선

1962년 왓슨과 크릭은 이들의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었던 모리스 윌킨스와 함께 '핵산의 분자구조와 유전정보의 전달에 관한 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왓슨은 1968년 〈2중나선〉이라는 책을 펴내 공전의 반응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것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서문에서 이 책을 펴내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독자 여러분은 이 책을 읽고 느꼈을지 모르나 과학이라는 것은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논리적으로 똑바로만 가게되는 것은 아니며 그 진보나 또는 퇴보가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인 사정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DNA의 구조를 발견하고난 뒤에 알게된 여러가지 사실들을 현재의 입장에서 평가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당시 내가 느낀 그대로의 일과 사람들에 관해 적어 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왓슨은 이 책에서 미국의 젊은이로서 받은 인상을 조금도 주저없이 너무나 솔직하게 직설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여러등장인물들로부터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그러나 캐빈디쉬연구소장인 '로렌스 브래그'경은 왓슨이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인간의 약점을 때로는 곧 바로 찌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두둔했다.

왓슨이 이 책의 제1장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노벨상을 받기 전이었으며 노벨상을 받기 전에는 출판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이 책을 과학자로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과학을 잘 모르는 일반독자를 대상으로 생생한 자서전형식으로 저술하여 문학작품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라면서 출판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하고 비과학적이라는 격렬한 비판에는 조금도 개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2중나선〉이 나오던 해 왓슨은 연구조수이던 19세의 '엘리자베스 루이스'와 결혼하고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장으로 취임했다. 1977년에는 하바드대학을 사직하고 콜드스프링하버연구소 관리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오늘날 이 세계 분자생물학의 메카에는 1백개에 이르는 연구실이 있다. 이곳에는 '도약하는 유전자'(염색체위를 이곳저곳 이동하는 유전자)의 발견으로 83년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바바라 매크린톡'을 비롯하여 많은 정상급 유전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다. 또 해마다 열리는 하계 세미나에는 3천여명의 분자생물학 전문가들이 구름처럼 모여든다.

현재는 암연구에 골몰

왓슨은 요즘 항혈액응고물질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DNA 조환방법으로 혈전증 치료제인 조직플라스미노겐활성제(TPA : 혈액응고를 분해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물질)를 만드는 길을 트고 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관심은 DNA조환을 통한 암의 해명이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향으로 눈을 돌리는 뛰어난 직관력을 가진 왓슨은 암의 바이러스 해명에서 새로운 장을 열 것이라고 과학계는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그는 하루에 10시간을 연구에 몰두할 뿐 아니라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연구할 수 있는 과학자가 아니면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컨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고 있는 '매켄로'나 '보리'를 꺾고 테니스계의 정상의 자리를 차지하려면 그들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왓슨은 오늘날 대성한 과학자중에서 같은 분야의 다른사람보다 더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하면서 과학자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두뇌도 필요하겠으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남다른 노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87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화학·화학공학
  • 의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