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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목표는 과학과 정치의 접목'

과학기술처장관 이태섭

"연구실도 중요하지만 정치무대에 과학을 등장시키는 게 더욱 중요해요"
 

과학기술처장관 이태섭


스물일곱살의 MIT공학박사, 미 ‘셸’연구소책임 연구원, 풍한방직사장, 10·11대국회위원 정무장관등을 역임했고 현재 과기처장관에다 민정당서울강남구지구당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태섭씨는 그의 나이 47세에 비해서는 경력이 매우 화려하다. 학생때는 줄곧 수석을 놓치지 않았고 서울대총학생회장을 맡았는가 하면 미국 MIT에서도 외국인으로서 최단기간에 학위를 얻는 비범함을 보였다. 그후 세계적인 석유 회사의 책임 연구원에서 갑자기 사업가 정치가로의 빠른 변신을 거듭했다.

그의 과거는 과학도들에게 크게 관심을 모으겠지만 과학입국을 모토로 삼고있는 시점에서 그의 생각, 방침, 시정패턴은 어떤지 우선 궁금했다.

△그동안 여러분야에서 일하셨지만 일선행정기관의 사령탑으로선 과기처장관이 처음이신데 앞으로 과학기술 행정을 어떻게 끌어갈 작정입니까.

장기계획 달성 확신

“앞으로 선진과학기술 한국을 실현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겠읍니다. 취임하기 전에 발표된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발전장기계획>;은 장래의 청사진을 펼친것 입니다. 주요한 정책들로는 256메가D램을 개발 생산하여 2001년에는 세계 기억소자 시장의 20%를 점유하고 정밀화학분야에서는 신물질을 창출하여 세계 시장의 3%를 점유할 계획이며 컴퓨터분야에서는 고성능워크스테이션을 개발하여 워크스테이션시장의 10%인 50억 달러를 수출할 계획을 갖고 있읍니다. 이러한 계획이 달성되는 2000년대에 우리나라는 15위경제주요국이 되고 10대교역국이 될것으로 확신합니다. 특히 컴퓨터 반도체 및 정밀화학 신소재분야는 기술집약적분야이며 후발의 잇점이 있기때문에 계획의 달성은 어렵지않으리라 봅니다. 물론 이때의 각 가정에서는 컴퓨터단말기 1대씩을 가질 것입니다.”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발전장기계획이 아무리 잘 짜여져있다해도 기술개발에 따른 엄청난 투자 재원마련과 필요한 인력확보가 문제인데 이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이십니까.

“2000년대의 과학한국의 구상은 정부의 의지이기때문에 재원과 인력의 조달은 가능하리라 봅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선진국에 비해 정부예산중 과학기술부문에 할당하는 예산비중이나 국민총생산에서의 과학기술부문투자비면에서 크게 뒤떨어지고 있읍니다. 따라서 정부는 전체 예산에서 과학기술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의 2.85%를 2001년까지는 최소한 5~6%선으로 끌어 올리고 정부투자기관의 기술개발투자를 제도화하는 한편 기업들의 자율적인 기술개발투자를 유인하여 2천년대 과학기술발전실천계획을 추진하는데 따른 투자자금을 조달할 방침입니다.”

인력양성 마스터플랜

“오는 2001년까지는 인구 1만명당 30명수준인 15만명의 과학기술인력과 이중 10%인 1만5천명을 연구개발을 선도할 핵심연구인력으로 양성하기위한 마스터 플랜을 짜놓고 있읍니다. 즉 이공계 대학원에서 9천명을 양성하고 한국과학기술원을 박사과정중심으로 확대개편하여 4천명을 양성하며 나머지 부족한 인력은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출신의 과학기술자들을 적극 유치, 활용할 생각입니다.”

△현재 우리나라가 당장 당면하고있는 문제는 무엇이며 해결방안에 대해서···

“물질특허제도 실시에 따른 과학기술의 뒷바침, 무역역조현상을 타개하기위한 부품소재의 국산화 및 이에 따른 중소기업의 육성이 발등에 떨어지고 있는 불입니다. 무역역조현상을 타개하기위해서는 부품소재의 국산화가 선결문제입니다. 지금까지 기계부품 및 소재 등 모두 7백40개품목이 국산개발품으로 고시되어 있읍니다. 이중 개발이 완료돼 양산단계에 들어가 있거나 준비중인 품목이 1백여개에 이르고 있읍니다. 이를 위해 이들 품목에 대해 특정연구개발자금을 우선 지원할뿐만아니라 연구소의 시험 검사시설을 확충하고 기술지도도 확대해 나가겠읍니다.”

△지난 82년부터 과기처가 실시하고 있는 특정개발연구사업과 유망중소기업발굴사업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이 사업은 그동안 국가의 과학기술 개발 목표에 부응하여 핵심전략 기술을 개발, 축적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산업기술혁신을 주체화 할수있는 민간기업의 기술개발활동을 추진하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이 사업은 국가의 장기적인 사업이라기 보다 당면문제를 해결하는 사업이라 볼수있읍니다. 각 연구기관이 발굴, 지원하고 있는 유망 중소기업은 기계연구소 1백2개, 과학기술원 72개, 화학연구소 72개, 에너지연구소 29개, 전자통신연구소 25개, 전기 연구소 17개, 동력자원연구소 17개, 표준연구소 16개, 인삼연초연구소 14개 등 모두 3백53개가 육성되었고 88년5월까지는 5백개 기업을 발굴하여 재정 및 기술지원을 하여 우수한 중소기업제품을 생산토록 지원할 예정입니다.”

△기술집적도시로 건설될 대덕연구단지에 대한 구상과 내년에 한국과학기술원(KAIST) 대덕이전에 따른 전문연구소의 흡수 개편의 추진 상황은 어떻습니까.

KAIST와 다른 연구기관의 협조

“지난 7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대덕연구단지는 급격히 늘어나는 기술수요에 대처하고 미래의 전국적 기술도시망 형성의 거점지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읍니다. 계획면적 8백40만평중 46%에 해당하는 3백88만평에는 연구기관과 교육기관을 입주시키고 59만평에는 1만여가구의 주택을 건설, 5만여명의 인구를 수용할 전원적인 연구단지를 꾸밀예정입니다. 이미 대부분의 정부출연연구소가 대덕에 자리를 잡고 있고 내년에 KAIST가 입주하기 위해 건설이 한창입니다. 88년에 모든 출연연구소의 입주가 끝나면 KAIST와 기존 전문연구기관간에 연구기능의 적절한 분담과 연구 협력체제구축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강구 하겠읍니다. 즉 연구소의 자율적인 운영이 최대한 보장되는 것을 전제로한 전문연구소와 유기적인 공동 연구협력체제가 구축되도록 하겠읍니다.”

△원자력발전사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원자력발전소 건설못지않게 안전관리도 중요합니다. 과기처의 안정성 대책은 어떤지요.

“현재 6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가동되어 전체발전량의 40%를 공급하지만 우리의 원자력발전기술은 아직도 낮은편에 속합니다. 앞으로 건설될 발전소(13·14호기부터)는 우리손으로 설계할 계획입니다. 안전은 설계에서부터 심각히 고려되고 있읍니다.

안정성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동중인 원전은 이미 미국 캐나다 프랑스 등에서 장기간 개발, 실용화되어온것으로 운전실적면에서는 안정성이 입증된것 입니다. 그러나 미국의 TMI나 소련의 ‘체르노빌’사고는 운전원의 실수에 의한것이기 때문에 운전원의 자질향상과 시설의 보수점검등 사고예방에 최선을 다하고 있읍니다. 이를위해 원자력안전센터가 있고 기능상으로 완전한 독립성과 중립성을 지키면서 주재관을 현장에 파견. 원자력발전소의 운전을 감독하고 있읍니다.”

△시대에 맞는 조직은 때론 그 조직의 활력소가 됩니다. 과학기술입국이 정부 뜻이라면 현재의 정부 조직이 효율성있게 과학기술정책을 펼수있다고 보십니까.

“조직은 능률을 전제로 한것이기 때문에 필요에따라 바꿔져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정부에서도 과학기술정책을 우선순위로 잡고 있읍니다. 정부조직은 국가전체의 효율을 고려해야되기 때문에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조직 개편에 관한 연구가 고려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이장관은 달변인편이며 여러 문제에 대해 시원하게 답변해준다. 이 팔방미인이 과학·기술 한쪽에만 전념하면 더욱 좋을것이 아닐까하는 아쉬움이 있는가하면 사람은 그 능력에 맞게 여러가지 하는것도 사회적 이득이 될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든다. 어쨌든 그의 생각부터 물어보고 싶었다.

정치무대에 과학을 등장 시킬터

“정치얘기가 되겠는데요. 저는 정치는 그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더 그렇다고 봅니다. 정치를 위한 정치로 맥을 이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치는 정치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각계 각층의 전문인들이 참여하는 종합예술이어야합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수준이 낙후되었던것도 과학기술이 정치의 장에서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래는 과학기술의 시대이기때문에 정치에서는 이 분야에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어야 할때라고 믿습니다. 저는 분명히 연구실에서 일하기보다 정치무대에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발전을 위해 일하는것이 훨씬 큰 효과를 가져오리라 믿습니다.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것이 정치입문의 뜻입니다.”

△지난 얘기지만 어떻게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됐읍니까.

“제4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뚜렸한 현상중의 하나가 4.19세대의 정계진출이었읍니다. 어느날 이미 정치에 몸담고 있는 친구 몇명이 찾아와 ‘지금 공화당이 때묻지않은 참신한 인물을 찾고 있는데 자네가 첫째로 손꼽히고 있어, 기업에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라는거야. 공화당이 구정치에 물들지 않은 새로운 집단이라면 마음 내키는 일 아닌가’면서 나를 설득하더군요. 평소 정치에의 꿈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이제 내 꿈을 펼 때가 왔구나’생각하고 쾌히 승낙했죠. 그래서 서울강남구에서 공화당의 공천을 받아 10대 국회의원으로 첫발을 디뎠읍니다.”

△4.19때 서울대총학생회장으로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는데 현재의 학생운동을 어떻게 보십니까.

“건전한 사회발전을 위해서는 항상 건전한 비판세력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고 하고픈 말을 하고 행동할수 있는 사람들은 학생들 밖에 없읍니다. 그들은 우리사회의 듬직한 비판세력입니다. 비판이 있는 한 정부는 안일할 수 없고 정치는 정도를 걸을수 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학생운동은 너무 이념화 폭력화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점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아요. 우리 국민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보는 눈이 상당히 높아져 있는데···. 학생들의 그런 행동들이 국민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학생 스스로도 고려해봐야겠지요”

△지난 1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낙선한 일은 이장관의 생에서 처음으로 좌절을 맛본 일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런 경험이 더 삶을 풍부하게 하지는 않았읍니까.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반성했읍니다. 내 스스로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읍니다. 너무 세게 나간것(자신감을 가진것)이 이 패배의 원인이었다고들 말하더군요. 전장에서는 한번 죽지만 정치에서는 몇번이나 죽을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결코 좌절을 하지않을 것입니다. 내 이웃을 위해, 더 크게는 국가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읍니다”

△정치에의 입문은 서울대총학생회장이란 경력이나 같은 세대의 정치인맥들로 보아 상정할수 있으나 귀국후 사업가로 첫 사회활동을 한것은 의외인데요. 차라리 교수나 연구원은 몰라도···.

“미국의 셸 석유회사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72년 가을에 귀국, 풍한방직상무직을 맡은것은 나의 도미유학과 깊은 관계가 있읍니다. 학위를 받은 후 현장으로 간 것은 배운 실력을 현장경험으로 익히기 위한 것이었는데 6년간의 연구생활을 하고 나니 이제는 귀국해서도 내 몫을 할수 있겠구나 하는 자신을 갖게 됐죠. 마침 그때 나를 유학시켜준 풍한방직의 김영구 회장님께서 이제는 돌아와 조국에서 일하는 것이 어때 하면서 귀국을 종용하시더군요. 그래서 풍한방직에 몸담게 되었읍니다”

△귀국한지 얼마안돼 대우엔지니어링 제철화학 풍국정유 영일화학등을 맡으셨는데 어떻게 풍한에서 대우로 옮겼는지요. 혹시 정치적인 포석이 아니었읍니까

“풍한방직의 상무를 거쳐 우풍화학사장을 맡고 있는데 김회장께서 부르시더군요. ‘대우의 김우중회장이 자네를 탐내고 있네. 더 큰물에 나가 일하는 것이 나도 바라는 일이야’하면서 내 의견을 타진하시더군요. 대우의 김회장과는 경기고의 선후배관계로 잘 알고 있는 사이지요. 그래서 저는 새로 만든 대우엔지니어링을 맡았다가 다음에 다시 제철화학 영일화학 풍국정유 풍한방직(대우가 인수)등 4개회사를 한꺼번에 2년여간 경영하게 됐읍니다”

16점받고 크게 각성

△미국에 건너간지 꼭 2년8개월만에 MIT에서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었읍니까.

“비결이란 사생결단으로 공부에 매달린 것뿐입니다. 첫 강의를 받고난 몇주후에 열역학 중간시험이 있었는데 1백점만점에 16점을 받았읍니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읍니다. 그러나 16점은 사실이었으며 이때서야 아, 내가 학생회장이었으니···하면서 전공공부를 등한히 했구나 하고 깨달았지요. 물론 이 16점은 반의 평균점수 15점보다는 높았지만. 사생 결단으로 공부한것은 바로 이 첫 시험성적이 나에게 큰 자극제가 됐기 때문입니다. 머리도 아예 짧게 깎고 달려들었읍니다. 그러다보니 어느날 시력이 나빠졌음을 느꼈고 그래서 도미1년만에 안경을 끼게 됐지요. 밤을 새우기가 일쑤여서 그때 생각으로는 잠 실컷 자는 것이 소원이었을 정도였읍니다”

△다음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출마하실텐데 현재의 과기처장관업무때문에 지구당관리에 어려움이 없으신지요.

“많은 친구들이 태섭이야 말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라고 현재의 과기처장관자리가 제격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도 결국 과학기술입국을 위해 정치를 하겠다는 생각이니 현재의 일에 대단히 만족하고 있읍니다.

지구당관리는 현재의 일과 별개의 문제라고 믿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울강남구민은 우리나라의 어느지역보다 정치의식이 높아 앞으로 출마할 사람들의 능력을 잘 파악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구당관리란 결국 주민들이 원하는 바를 헤아려 이를 정확히 정책에 반영하는 일이 아닙니까. 그 일이 작게는 선거 구민의 바람이지만 크게는 국민모두의 바람일 것입니다”

1986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용수 차장
  • 사진

    전민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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