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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의약품 원료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 타이레놀을 지켜라!

지난 8월 1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또 하나의 ‘행정 명령’을 발효했다. ‘필수 의약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를 전략적으로 비축하라’는 것이다. 유럽연합(EU)도 지난 3월 필수의약품법을 상정했다. 주요 의약품의 공급망을 다각화하기 위함이다. 왜 지금, 세계가 의약품 원료를 각자의 국경 안으로 가져오려고 하는지 살폈다.

 

▲Shutterstock, GIB, 박주현

 

‘국가의 보건 및 안보 이익에 매우 중요한 의약품 26개 명단을 작성하고, 이 의약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의약품 원료(API·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 6개월 치를 비축하라. 또한 가능하다면 미국 내에서 제조된 API를 확보해 보관하는 것을 우선으로 한다.’ 2025년 8월 13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서명한 행정명령의 내용이다. 백악관은 이 행정명령이 “필수 의약품의 국내 생산 능력을 회복하고, 글로벌 공급망 중단으로부터 국가의 건강과 안보를 보호하는 데 필수”라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국의 제약 산업이 독립성을 갖추도록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처음 당선됐던 그는 1기 행정부 당시에도 필수 의약품의 미국 내 조달을 늘리고 공급망의 취약성을 파악하도록 지시한 바 있다. 특히 미국 보건복지부 산하 대비대응 담당 차관보실(ASPR)은 트럼프 지시로 2020년 전략적 원료의약품 비축고(Strategic Active Pharmaceutical Ingredients Reserve) 프로그램을 신설했다. ASPR은 2022년 필수 의약품 86개 목록을 만들고, API 공급 및 비축을 담당하고 있다.


미국뿐이 아니다. 유럽연합(EU) 역시 필수 의약품과 원료의 현행 공급 및 생산망에서 자립하기 위한 법안인 필수의약품법(CMA·Critical Medicines Act)을 2025년 3월 상정했다. CMA 역시 의약품 공급망을 다각화해 현재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유럽 내 의약품 생산을 장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CMA는 현재 심의가 진행 중이다.

 

▲White House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2020년과 2025년 두 번의 행정명령(EO 13944, EO 14293)을 통해, 미국의 의약품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해외 의존을 줄이고 미국 내 제조 방안을 마련할 것을 지시했다.

 

미국의 대중국 필수 의약품 수입 현황
▲자료: United States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
미국이 중국에서 필수 의약품을 수입한 금액은 2000년대 초 약 3000만 달러(한화 약 440억 원) 수준이었지만 2023년 20억 달러(약 3조 원)를 넘어섰다.

 

중국과 인도, 전 세계 API 생산 64%

 

 

미국과 EU가 한목소리로 ‘자립’을 외치는 이유는 현재 API 생산의 대부분이 중국과 인도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활성 제약 성분’이라고도 말하는 API는 의약품이 질병을 진단, 치료, 완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화학물질이다. 예를 들어, 타이레놀의 API는 아세트아미노펜, 아스피린의 API는 아세틸살리실산이다. 타이레놀은 아세트아미노펜을 다른 부형제와 혼합해 만든 최종 완제의약품이다. 부형제란 의약품의 겉모양·크기·경도를 조절하기 위해, 혹은 약물이 화학적으로 분해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첨가하는 성분이다. 


API는 일반적으로 대규모 화학 공장에서 생산된다. 핵심출발물질(KSM·Key starting materials)과 중간체로 알려진 물질을 결합하는 것이 API의 생산 과정이다. 대부분의 제약 회사는 핵심 출발 물질부터 최종 완제의약품까지 전체 생산 과정을 전담하지 않는다. 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의 일부를 해외로 이전했다. 때문에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유럽 그리고 일본이 전 세계 API 공급의 약 90%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오늘날 API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국가는 인도와 중국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2024년 7월 발행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API 세계 시장 점유율은 44%, 인도는 20% 수준(거래량 기준)이다. 보고서의 저자인 윤지현 KIEP 세계지역연구2센터 전문연구원은 11월 7일, 과학동아에 “단순 수치뿐만 아니라, 현시점에서도 중국과 인도가 API 생산에 차지하는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API 공급망 자립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했다”고 설명했다.


특히 중국이 API 생산에 미치는 영향은 시장 점유율 44%보다 더 크다. 인도조차도 API 생산의 기초가 되는 핵심출발물질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의약품 중간체 생산 또한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의약품 중간체는 아세트산 무수물이나 클로로아세트산 같은 API 합성에 사용되는 정밀화학 제품이다. 중간체의 품질이 좋아야 최종 의약품의 품질 역시 보장된다. 중국은 풍부한 자원과 낮은 원자재 가격으로 다양한 종류의 중간체를 대량 수출하고 있다.


“중국과 인도가 API 생산의 중심이 된 것은 환경 규제가 비교적 약하고 인건비가 낮기 때문입니다.” 11월 5일 서울대 시흥캠퍼스에서 만난 정진현 경기시흥 SNU 제약바이오인력양성센터장은 2000년대 이후 API 생산의 지형이 달라진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실제로 중국은 2000년대 초부터 의약품 원료를 주요 수출 전략 산업으로 지정했고, 환경 규제가 느슨했던 당시 고오염 화학 공정을 부담 없이 대규모화할 수 있었다. API는 대부분 다단계의 화학합성 공정을 거쳐 생산하는데 이때 폐수, 폐기물, 대기오염, 유해가스 등이 발생한다. 정 센터장은 “현재는 중국과 인도 공장이 노하우까지 쌓은 상황”이라 덧붙였다.

 

▲Julphar.uae(W)
인도의 당뇨병 약품 제작 공장. 윤지현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전문연구원은 “인도는 의약품 원료(API) 수출국이지만 핵심출발물질(KSM)을 중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에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이나 유럽연합과 비교했을 때 내수시장이 작은 한국이 의료 안보를 위해 인도와의 협력을 고려해볼 수 있단 뜻이다.

 

흔들리는 분업 속에서 부상한 자립의 필요성

 

국제적 분업은 2010년대 말과 2020년대 초, 흔들리기 시작했다. 2018년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갈등이 본격화하고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며 의약품을 이전처럼 수급하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정 센터장은 “중국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타이레놀의 주성분인 아세트아미노펜 수출을 막은 것이 큰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 총 92개의 아세트아미노펜 생산지 중 70개가 중국에 있던 2020년 2월, 코로나 발발 직후 중국 정부는 자국의 의료 물자 전반을 국내에서 사용하게끔 수출을 통제했고 국제적 분업에 차질이 생겼다. 당시 인도 역시 아세트아미노펜 등을 포함한 API 수출을 제한했다.


이를 계기로 글로벌 공급망은 와해되고 API 자급화 정책이 본격화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필수의약품 전략적 비축을 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한 것도 현재 미국에서 처방 약을 만드는 데 필요한 API의 10%만 미국에서 제조된다는 것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다. 행정명령에는 미국 내 의약품 제조 심사 간소화, 외국 제조시설 검사 강화는 물론, 미국 내 제조 시설의 환경 허가 체계 개선도 포함돼 있다. EU도 2020년 11월 ‘유럽 의약품 전략’을 채택해 EU 권역 외 의존도를 줄이고, 유럽 내 제조 혁신을 촉진하려는 방안을 찾고 있다.


API 중국 의존도 완화를 위한 움직임은 공동의 대응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가 2025년 10월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 인도와 함께 2024년 3월, ‘핵심신흥기술대화’를 개최해 반도체 공급망, 인공지능(AI), 양자, 첨단 소재 등에 관해 협력의 기회를 논의했는데 이중 API 공급망에 관한 논의도 포함됐다. 2024년 6월에는 원료의약품 공급망의 복원력을 강화하기 위해 한국, 미국, EU, 일본, 인도가 참여한 민관합동 ‘바이오제약연합(Bio-5)’이 출범하기도 했다. 윤 연구원은 “한국은 내수 시장이 큰 미국이나 EU와 달라, API 자립을 높이는 것뿐만 아니라, 더 많은 국가와 협력해 공급망 다각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완제의약품이 생산되는 과정
완제의약품은 핵심출발물질(KSM)에서 시작해 이를 화학적으로 변환한 중간체, 치료 효과를 내는 의약품 원료(API, 활성 제약 성분)를 거쳐 만들어진다. 미국, 유럽연합, 일본 등 글로벌 제약회사 대부분이 API를 중국과 인도 등에서 수입한 뒤 자사 공장에서는 부형제를 섞어 완제의약품을 만드는 단계만 수행한다.
▲자료: Nikkei Asia

 

고래 싸움의 새우? 협력과 자립 사이의 균형

 

 

한국의 API 자급률은 2024년 기준 약 31% 수준이다. 2022년 11.9%를 기록하며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던 것이 2023년 25.6%, 2024년 31.4%로 상승했다. 한국 역시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아세트아미노펜 등 주요 의약품 품귀 사태를 겪으며 API 자립의 중요성이 대두됐다. 이에 보건복지부는 2024년 2월 발표된 제2차 국민건강보험 종합계획을 바탕으로 국산 API 사용을 촉진하고자 하고 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의약품 허가 및 등록을 위한 의약품 제조 및 품질관리 기준(GMP) 적합 평가를 개편했다. 무엇보다 국내 API 생산을 지원하기 위한 연구 사업을 2022년부터 추진해 오고 있다.  


“이미 생산 체계를 완성하고 노하우까지 쌓은 중국과 경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 센터장은 한국의 API 자급화 정책을 두고, 경쟁력 있는 API 생산과 보건 안보를 위한 국가적 지원 간의 ‘줄타기’를 잘해야 하는 일이라 설명했다. “사실 코로나 팬데믹이 터지기 전에 API 생산망이 분명 위협이 될 것이라는 신호는 한국에 있었습니다. 2019년 7월, 한국이 강제노역 배상 판결을 내리자 이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일본은 반도체 핵심 소재 수출을 규제했죠. 이때 완제품을 생산하는 나라와, 원재료를 수출하는 나라 간의 ‘갑을’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어요.”


즉, API뿐 아니라 반도체·배터리·식량·에너지 등 모든 산업과 영역에서, 협력과 자립 사이의 줄을 얼마나 단단하고 유연하게 잡느냐가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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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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