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 섬서성의 서부에서 1976년 이래 계속되고 있는 '진공(秦公)1호대묘'의 발굴 조사작업이 지금 최종 단계를 맞고 있어 전 세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섬서성의 성도 서안에서 약 1백50km 서쪽, 황하지류 위하의 북쪽에 있는 봉상현이 이 대묘의 발굴지.
이곳은 춘추전국시대(BC 770~BC 221)의 진의 도읍이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의 시황제는 도읍을 함양(서양 북쪽)에 두었으나 그 이전의 진은 옹성이라는 도시를 이 일대에 이루고 있었던 것.
사마천의 '사기'에 그 즈음 진의 역대 국왕의 묘를 모시기 의해 거대한 묘원이 만들어졌다고 기록 되어 있어 이것이 이 진공묘를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넓이 21㎢에 이르는 광대한 묘원에서는 지하의 18개소에서 대묘가 확인되고 있으나 1호묘는 묘원의 중앙에 있다. 10년간의 발굴로 이 묘의 역피라미드형의 장대한 모습이 뚜렷이 드러났다.
지표 부분에서 길이 약60m, 폭 약39m, 깊이24m 땅바닥 부분에서도 길이 40m, 폭 20m나 되는 8층 높이의 빌딩이 담길 정도의 크기다. 이 스케일은 '은허'의 은왕능 10배 이상으로 금세기에 발견된 중국 묘능 중에서 최대의 것이다. 땅바닥 부분에는 묘의 본체인 곽실(관안치실)이 소나무로 짜서 만들어져 그 속에 관이 놓여 있다.
이 묘에서는 모두 2백70개소의 도굴 흔적이 나타났다. 곽실까지 미친것도 10개소 이상이며 심한 피해흔적이 있었다. 또 이곳을 직격한 지진 피해도 겹쳐 곽실을 짠 거대한 목재가 부러지고 내부의 관도 쪼개져 있었다. 그때문에 그 속에 있던 인골의 판정식별도 대단히 곤란했다. 이 묘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시황제 18대전의 경공(재위 BC577~537년)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나 전체의 정리가 끝나지 않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곽실 주위에는 합계 1백82 명의 순사자가 매장되어 있었으며 당시의 완고한 노예제 사회와 국왕의 권력을 말해 주는것 같다. 또 당시의 제철 기술을 나타내는 철농구나 돌악기, 그것들에 새겨진 문자 등에서 이미 상당히 높은 문화를 지니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곽실 목재 제거 작업은 이미 끝나고 지금은 관 주변과 그 내부까지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묘 전체의 조사와 정리가 끝나는 것은 수년 뒤로 내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