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개념이 왜 자주, 그리고 널리 쓰이고 있을까. 현대 산업사회와 엔트로피의 관련은?
최근 '엔트로피'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자연현상뿐 아니라 사회현상까지도 이 단어의 개념으로 조명하며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뉴튼'의 기계적 세계관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엔트로피 법칙을 주장하기도 한다.
엔트로피는 열역학 제2법칙이다
엔트로피 법칙은 열역학에 관련된 법칙이다. 열역학이란 매우 어려운 개념같지만 실제로는 간단명료하며 매력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이다. 열역학 제1법칙은에너지보존의 법칙으로 '우주의 물질과 에너지총량'은 일정하여 새로이 생성되거나 소멸할 수 없고 오직 그 형태만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수력발전소에서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강물의 위치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뀌어 우리 가정에 전달한다. 열기관에서 발생하는 열은 그만큼의 일로 바뀐다. 자동차엔진이 한 일도 휘발유라는 연료가 가지는 에너지의 변환일 따름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표현은 열역학 제1법칙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제1법칙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에너지 고갈이라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대체에너지를 개발할 필요도 없고 석유가 앙등에 따른 에너지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의 상황이 그렇지않음을 경험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듯 이 에너지의 변환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열역학제2법칙, 즉 엔트로피 법칙이다.
물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바뀔 수 있다. 사용할 수 있는 형태에서 사용할 수 없는 형태로, 질서가 있는 조직에서 질서가 없는 조직으로, 값어치가 있는 물질에서 값어치가 없는 물질로만 변화한다는 것이다. 석탄을 태워 물을 끓이면 석탄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가 물의 온도를 높혀 에너지의 총량에는 변함이 없지만 석탄은 탄산개스와 그밖의 기체로 변하여 공기 중에 흩어져 버린다. 결국 다시는 석탄을 태워 일을 얻을 수 없은 상태로 된다. 이것이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다. 댐 위의 물이 떨어지는 동안에 바뀌를 돌리거나 전기를 일으키지만 일단 바닥에 떨어진 물은 더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 이처럼 엔트로피는 더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사용불가능한 에너지 양을 측정하는 척도이다.
최고의 무질서가 엔트로피 최대
한곳이 계속 온도가 높고 또 한곳이 계속 온도가 낮다면 이들 간에 열기관을 설치해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이 열기관으로부터 에너지를 계속 얻어내면 그 온도차는 점점 작아지고 열적 평형이 이루어지면 그 이상 에너지를 얻을 수 없게 된다. 우주의 모든 것이 열평형을 이루면 어느곳에서도 열에너지를 얻을 수 없다. 이것이 열역학에서 말하는 열적 사망(열적 평형)이다. 열에너지를 얻으려면 한편이 온도가 높고 한편이 낮다는 질서가 필요하다. 질서 상실의 척도가 엔트로피이며 최고의 엔트로피 즉 최고의 무질서가 열적사망인 것이다.
우리는 에너지의 소비를 통하여 무질서를 증가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고 있다. 이처럼 열역학을 통해 도입된 엔트로피의 개념은 지금은 확장되어 여러곳에서 유효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순도가 낮은 빈광 또는 잡물은 엔트로피가 높은 것이며 순도가 높은 노다지는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다. 따라서 순도를 높혀 질서를 향상시키는 제련과정을 엔트로피를 저하시키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된다.
폐쇄된 계(系)에서는 엔트로피는 반드시 올라가는 것이지만 외부에서 에너지를 공급받는 계에서는 엔트로피가 감소하여 무질서로부터 질서가 이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때에는 반드시 외부로부터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며 따라서 총체적으로 엔트로피는 반드시 올라가게 마련이다. 제련이란 과정은 외부에서 열의 형태로 에너지를 받아 물질의 엔트로피를 낮추고 있는 과정이고 생명체가 DNA의 지시에 따라 질서적인 성장을 하는 엔트로피 감소의 희귀한 과정은 그 생명체가 외부로부터 먹어치우는 에너지가 있어서 가능하다.
반대로 공장에서 기계가 돌고 자동차가 길을 다니면서 모든 부품을 마모하여 먼지로 바뀌는 것은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화석연료라는 저엔트로피의 에너지원을 소모해서 공해라는 고엔트로피 상태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불확실성의 고(高) 엔트로피
정보와 통신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통신에 의하여 우리는 불확실했던 것을 확실하게 알고 궁금증을 풀고 있다. 멀리서 짐작으로 알던 것을 통신을 통하여 더 정확하게 알게되면 불확실한 부분이 줄어들고 허공에서 짐작해아 하는 부분이 적게 된다. 일반용어로 모르는 것이라는 뜻으로의 '미지수'가 적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미지수와 불확실한 것의 감소정도로서 전달된 정보의 양을 정의한다. 미지수 및 불확실성이 많으면 엔트로피가 높고 반면에 모든 확실한 것은 엔트로피가 낮다고 보는 것이다. 하나의 통신수단에 의해서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됨으로 해서 어느만큼 이 엔트로피가 적어지느냐 하는 척도가 전달된 정보의 양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엔트로피 감소량의 정보전달량인 것이다.
사람의 불안상태가 엔트로피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며 전화나 전신 및 매스컴 등 통신수단에 의해서 수신자의 엔트로피가 떨어지는 것이다. 즉 확실감이 생기고 미지부분이 없어짐에 따라, 또는 자명한 것으로 됨에 따라 수신자의 엔트로피는 저하하게 된다. 이때 통신의 양은 이로해서 얻어진 엔트로피의 저하분이고 사람들은 이 통신의 엔트로피 저하기능을 평가해서 돈을 지불하는 것이다.
이미 알려져있는 사실을 전해온 대가로는 아무도 돈을 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한번 본 TV프로그램과 신문 등은 그이상 엔트로피 저하기능이 없기 때문에 무가치한 것이다. 그래서 잘 알려져 있고 흔히 일어나는 즉 확률이 높은 현상 또는 당연한 일을 볼때에는 별로 큰 정보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다에서 바닷물을 얻었다고 하면 확률이 적은 희한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정보량은 0이다. 그래서 정보량 I를 다음 식과 같이 발생확률(p)의 역수의 대수에 비례한 것으로 생각한다. 단 p가 적을 수록 I는 커진다.
I=log(1/p)
일어나는 확률이 적은 희한한 일이 생기면, 예를 들어 태양이 서쪽에서 뜨거나, 사막에 비가 오면 또는 사람이 개를 물면 정보로 치는 것이다.
단어를 골고루 사용하면 단어들의 발생률은 평준화되어 단어마다 가져오는 정보가 크지만 자주 사용하는 어휘만 한정하여 사용하는 어린이들의 말에는 정보가 적고 어른도 어린이 상대로 말을 하기 위해서 어휘를 한정하면 정보의 흐름은 더디게 된다. 드물게 발생하는 단어를 어려운 것으로 취급하고 이를 풀어 흔한 단어의 모임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이때 동원된 단어들이 발생확률이 많은 소위 빈(頻)발생단어로 인해 발생확률이 크게 되고 앞식에 의해 정보밀도가 떨어진다. 또한 이는 과(寡)발생단어를 기피함으로써 장기적으로는 이들을 소모시켜 한나라의 국어를 약화시키게 된다.
과발생단어의 소멸은 보통으로는 별지장을 주지 않지만 문장의 취급 내용이 일상잡사가 아닐 때에 즉 전문분야 등 세분화된 것을 다루어야 할 때에 지장이 크다. 그리고 이 지장은 그것이 언어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고 날마다 시간마다 주는 것이므로 전반에 걸쳐 한나라의 모든 분야의 활동을 크게 저해한다.
독서 기피의 원인
외국의 저자나 작가나 법률입안자들은 단어의 어려운 정도에 개의치않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전력을 다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본문에다 단어풀이를 해줄 정도의 저자세와 전공의 저작에까지 상식과 유행의 개입을 허용하는 자신 결여로 해서 국어의 능력을 저하시켜 때로는 국어만으로는 충분한 확실도(엔트로피가 낮춰진 상태)를 얻었다는 느낌이 안드는 또한 의사대로 강력하고 정확한 표현을 못하는 다시말해 국어가 의사전달 도구로서 실패하는 현상을 감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정확도의 감소를 관제할 수 있고 글을 써놓고도 답답하고 읽고도 여러뜻이 엉켜 미심하여 불안과 불쾌감을 남기기 쉽다. 이것은 아직 엔트로피가 더 내려갈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몇권의 한글소설을 발음만 갖고 이리저리 앞뒤 맞추어 짐작해야 했던 1백년 전의 아낙들의 답답함은 쉽게 짐작이 될 것이다. 이는 고(高)엔트로피 즉 비유하자면 몸에 열이 오른 상태가 되기 때문에 불쾌한 것인데 오히려 지금은 그러한 상태로 나아가는 상황이 되고 있는 것이다.
독서란 읽어낸 뜻이 뚜렷하여 엔트로피가 충분히 낮아야 직성이 풀리고 계속해서 읽을 기분이 나는 것인데 이것이 군데군데 불명하고 불확실하고 모호하여 엔트로피가 높으면 불안해서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고 독서 자체를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성인층이 일찌기 독서를 거두어버리는데에는 문장들이 고엔트로피화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향학심이 강하고 극기심이 있기 때문에 엔트로피만 충분히 낮고 이질적인 문자가 쓰임으로 해서 생기는 색인(index)기능 까지 있어서 마음대로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서 속독(단시간에 대량 정보)을 할 수 있다면 독서를 많이 할 소지가 있다. 한문이든 한글이든 또는 필요하다면 외국어단어를 섞어가면서도 저자의 자유분방한 내심의 뜻이 확실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조심하다 보니 확실치 않는 (고엔트로피) 구석을 남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습성이 그렇다보니 통신시설(광의로는 매스컴)이 아무리 훌륭해도 의도적으로 높여 놓은 문장의 엔트로피를 내릴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불확실한 따라서 불쾌한 것으로 되고 만다. 독서기피는 엔트로피가 낮춰지지 않는 불쾌감에서 온다고 보아야 한다.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고자 할 때 최종의 목적은 상대편 엔트로피의 감소이다. 그래서 평상시 쓰던 단어규약을 지키는 것이 옳다. A단어를 B단어로 바꿨을 때 듣는 사람이 A단어로 훈련되어 있다면 B단어가 A단어와 1백% 똑같다는 것을 자신있게 알게되기 전에는 불안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즉 통신로에 잡음장해가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신측의 엔트로피가 높게되는 것이다. 즉 용어의 변경은 내용이 1백% 같은 경우까지도 엔트로피의 증가를 동반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여러가지 이유를 내세워 용어를 바꾸는것은 혼란을 주어서 세대간의 지식전달을 방해한다. 무엇보다 젊은이들이 용어가 다른 선배를 무시하려 들기 때문에 선배들의 귀중한 경험이 전달되지 않게 되어 전사회적으로 손실이 크다.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고 위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자기의 사랑과 헌신을 말해주고 상대를 확신시키려 한다. 이는 상대편에게 확신이라는 저엔트로피 상태를 마련해 주고 싶어하는 본능에서 온다. 생의 영위를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엔트로피를 낮춰줄려고 하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의 경계심은 자극하지 않는것이 유리하므로 상대편이 이편의 악의를 짐작할 눈치가 있으면 그 짐작을 흐트려서 엔트로피를 올려 확신을 못갖게 한다.
인생의 근본이 엔트로피 전쟁
동물의 경우에 있어서 보호색 등은 적의 엔트로피 증가를 겨눈 것이다. 즉 적을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동물들은 모두가 자기는 엔트로피 저하의 쾌감을 찾고 적의 엔트로피는 올리고 있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이 말하는바 "동양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하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표정 등으로 새어나간 자기의 내심을 되 감추기 위해서 말을 한다" 는 말도 고엔트로피작전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다.
인생의 근본이 엔트로피의 전쟁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는 기이한 일을 당할 때 마다 또는 어디에서 큰 소리가 조금나도 엔트로피가 올라가는데 이를 다시 낮추기 위해서 노력하게 된다. 고엔트로피 상태를 조금이라도 피해보려고 궁금하면 신문을 사보고 사람들의 소문을 들으려 하고 정보매체에 매달리는 엔트로피전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엔트로피 저하의 노력이 결과를 가져와서 사람들이 저엔트로피 상태에서 살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신의와 확신을 얻어 서로서로 엔트로피를 저하시켜주는 것이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표시가 되는 것이다. 이 엔트로피를 낮추는 모든 것을 정보원이라고 생각해서 인생을 보는 견해를 다음과 같이 재정리해볼 수 있다.
정보원이란 짐작 못 하는 새로운 것이 발생하는 곳이고 정보란 새롭거나 불확실한 모든 것이다. 윷놀이와 주사위를 던질 때마다 우리가 미리 알 수 없고 추리할 수도 없는 괘가 일어나기 때문에 정보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새롭고 당연하지 않고 불안할 수 있어서 엔트로피가 내려갈 필요와 여지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죽을까 걱정하고 그사람이 치유될 수 있을까 근심하는 동안은 엔트로피가 높고 그사람이 완쾌하거나 확실히 죽어버리면 안심하거나 체념할 수 있어서 엔트로피는 내려간다. 사람의 마음은 옛날에는 비교적 도덕률이 강하고 규범이 뚜렷하였기 때문에 엔트로피가 낮았고 정보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지금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에 따라 활동들이 국제화하여 여러 도덕률의 사람들이 긴밀하게 왕래하고 접촉하며 가까이 살고있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기 위해서 더 노력하여야 하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다. '미지수'가 더 많아져 가고 있고 확신을 주지 않아서 서로가 미지수이며 정보원이 되기 때문에 마음의 화평 즉 저엔트로피를 위해서 통신의 필요성은 더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대화자 쌍방의 불안제거라는 뜻에 있어서의 통신의 효용은 통신이 정확하게 되어도 선험적인 공통점의 결여때문에 감소하고 있다. 인류의 활동무대가 커질수록 그리고 세대차가 있을수록 말만 많았지 엔트로피저하의 쾌감은 인류의 마음에서 떠나가고 있다.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일곱언어 이상으로 분산하고 인류의 정신계의 혼란 즉 엔트로피의 증가는 막을 길이 없다. 그러나 의사소통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생명체는 엔트로피의 증가를 감내할 수 있게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화는 피할 길이 없는 속에서 서로 사람을 찾는 노력을 계속된다. 생각이 같은 사람을 찾아서 자기가 옳았음을 확인받고 싶은 것은 저엔트로피를 갈구하는 인간의 본연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본질적인 뜻에 있어서의 통신의 무력화 이외에 근자에 있어서 매스컴을 포함해서 통신의 저질화도 인식되어야 한다. 통신의 본래의 효용이 수신자의 엔트로피 감소라면 근자에 있어서 정치 등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수신측의 엔트로피를 낮추지 못하고, 들어도 여전히 의심스러운 이유가 있다. 엔트로피가 내려가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저질의 통신 기능은 사용자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조만간 도퇴되게 된다.
과거에 신문의 경우에 있어서도 신문사의 입장도 있겠지만 글쓰는 사람들의 하는 이야기도 뻔해서 새로운 것이 못 되었던 때도 있었다. 즉 사람들이 정보원으로서의 아기자기한 것이 못 되고 처음부터 그 사람 입장이 시키는 뻔한 말 이외의 것을 하려고 들지를 않았기 때문에 내용이 읽지 않아도 자명했다는 면이 있다. 생활여유도 생기고 인생에 대한 어떠한 자신도 생겨야 그 사람의 의견과 글에 색다른 이야기(정보원)도 들어 있어서 엔트로피 저하제로서의 독자의 확보를 꽤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 노선에 굳어서 정보원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신문이나 방송의 위기는 점점 더해가고 있다.
에너지의 유출의 극소화
엔트로피 법칙을 통신이라는 조그만 분야에 적용시켜 봤지만 앞에서 밝힌대로 여기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열역학의 엔트로피 법칙은 이제 생물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예술의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다.
현대는 고엔트로피 사회다. 물질주의 가치체계 즉 기계화된 농업, 대규모 생산과 소비, 이런 모든 진보는 고엔트로피 사회로의 지름길이다. 인간의 생산활동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계에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남기고 있다. 지금의 상황을 방치하면 대기오염, 수질오염, 자원고갈의 현상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지구환경은 인류가 참고 살아갈 수 없는 극악한 상황에 도달할 것이다.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이런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리라는 낙관적인 사람도 있지만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은 어떠한 힘을 가지고도 멈추지 못하는 불가역성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다.
물론 지구는 고립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주로부터 즉 태양으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아 엔트로피를 낮추고 있기는 하지만(예를들면 광합성이나 태양빛의 복사에너지) 이런 류의 에너지 공급은 지구상의 유한자 원인 집중돼있는 화석연료(석유나 석탄)와는 다르기 때문에 그 효율이나 이용구조를 갖추는데 어려움이 많다.
아뭏든 엔트로피 법칙은 물질적 진보에 대한 종래의 견해를 뒤엎고 있다. 현재로서는 엔트로피 법칙을 거역하는 방법은 찾아 낼 수 없다. 중력의 존재를 부인하려고 고층빌딩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는 만용을 부려봤자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엔트로피 법칙에 따른 결과들을 부정하려 들면 중력부정의 상태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저엔트로피 세계관에서의 지배적인 윤리관은 에너지 유출을 극소화하자는 것이다. 과도한 물질의 생산과 소비를 지구상의 귀중한 한정자원을 복원할 수 없을만큼 감소 시킨다. 저엔트로피 사회는 물질의 소비를 억제한다. 변덕스러울 정도로 탐닉하는 욕망은 절제돼야 할 것이다. 저엔트로피 문화는 인간을 자연과 분리시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여긴다. 자연은 인간의 물질적 부를 제공하는 대상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으로서 보존돼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