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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교류는 첨단산업의 디딤돌

컴퓨터 수출의 기수 박성규박사

"「컴퓨터 수출10만대」는 기술에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첨단은 작은 것이다. 모든 결과는 몇미터에서 결정나는 것이 아니다. 몇미크론에서 판명된다.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이 극대세계의 불가사의라면 첨단산업은 극소극미의 세계를 다루는 분야이다.

자신을 스스럼없이 '작은 사나이'로 소개하는 대우통신의 박성규박사(47세)는 전자공학박사이면서 한국의 C&C(컴퓨터통신) 분야를 이끌어 가는 첨단 경영인이다. 그는 '모델 D' 라는 이름으로 외국 시장을 석권하고 있는 16비트컴퓨터를 개발, 10개월만에 수출 10만대를 기록한 공로와 통신기기의 국산화를 이룩한 업적을 인정받아 올해 과학의날 동탑 산업훈장을 받았다.

우리도 컴퓨터 생산국

-컴퓨터 수출 10만대는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컴퓨터개발 역사가 미천한 우리나라에서 첨단상품이라 할수 있는 컴퓨터를 자체개발해 지속적인 수출물량을 확보한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지요. 지금까지 연간1천대 이상을 수출해보지 못한 미천한 경험으로 10만대를 넘어섰다는 것은 가격경쟁에서뿐만아니라 기술경쟁에서도 신뢰도를 확보했다고 볼 수 있읍니다.

국제시장에서는 우리나라를 TV생산국가 내지 반도체 조립국가 정도로 인식하는데 이제 퍼스널컴퓨터 생산국가라는 이미지를 심었다고나 할까요. 컴퓨터는 계속적인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반짝했다가도 금방 도태해버리는 이른바 첨단기술상품이 아닙니까"

85년 7월 처음 수출당시에는 가격이 저렴한 것이 하나의 장점이었으나 이제는 일본이나 대만에서 워낙 싼 것이 많이 나와 오히려 가격면에서 비싼 쪽에 속한다는 것. 결국 컴퓨터의 기능을 바탕으로 한 신뢰도확보가 이루어진 셈이다.

-제품개발전에도 그정도의 수출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읍니까?

"물론 아니지요. 처음 '모델D'를 개발할 당시는 연간수출 1만대면 성공이라고 생각했읍니다. 저는 엔지니어 출신이라서 그런지 제품의 기술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강합니다. 국제 전시회를 다니면서 거듭 확신을 가졌던 것은 제품만 좋으면 경쟁에서 이길수 있다는 것이지요. 84년 처음 개발팀을 구성하고 개발과 동시에 판로도 완전히 확보하지 못한채 컴퓨터 생산공장을 증축하자 주위에서 '위험한 장난'을 한다고 손가락질을 조금 받았읍니다'

-요사히 정보산업분야에서 자체 개발했다고 발표한 많은 제품들이 도입기술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른바 기술론 논쟁인데 거기에 대한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기술교류는 이떠한형태든지 다각도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라이프사이클이 극히 짧은 첨단분야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자체 기술만 갖고는 아무것도 이룩될 수가 없읍니다. 이른바 '민족기술'을 강조한 인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지요. 76년도에 이미 전자교환기 기술을 확보한 인도가 지금은 통신분야에서 상당히 낙후되어 있읍니다. 문제는 도입한 기술을 어느 정도 소화하느냐는 것에 달려있읍니다"

기술도입논쟁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호였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라'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은 오늘날의 첨단사회에는 적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컴퓨터 수출의 새장을 연 공로로 산업훈장을 받고 있는 박성규 박사.
 

1백%의 철학이 필요

-국내에서 화학공학을 공부하다 미국에 유학가서 전공을 바꾼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미국으로 유학간 것은 59년 대학 2학년 때였읍니다. 그때 국내에서는 공업화정책이 한창 추진중이었지요. 가장 각광받는분야는 화학공학이었읍니다. 미국은 전자공학이 반도체 컴퓨터 통신 등으로 분화 발전하면서 이른바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분야가 꽃을 피우고있었지요. 주저없이 전공을 바꿨읍니다. 결국 전공을 바꾼 것이 저의 귀국을 늦추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역할이 주어진 이시점에서는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덕택에 국내 정보산업이 싹이 트는 78년까지 20여년간 국적없는 생활을 한 것이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미국 생활이 20년이나 되는데 그동안에 공부만 하셨읍니까?

"저의 유학생활은 남다른 면이 있읍니다. 제가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는 이미 자식이 셋이나 되는 늙다구니였으니까요. 요즘의20대 박사하고는 너무나 대조적이지요. 63년 MIT공과대학 전자공학과를 마치고 2년동안 통신기 부품회사를 다녔고 석사과정을 마치고 또 다시 2년동안 통신 시스템과 의료기기 제조회사인 '켈'주식회사에서 선임 연구원으로 일했읍니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는 공백이라면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기간이 실제 지식을 활용해 본다는 측면과 아울러 다음단계의 학위 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읍니다.

71년 '텍사스 오스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는 학계에 남으려고 잠시 강의도 했지만 성격상 학교라는 사회보다는 산업현장에서 뛰는 것이 적격이라고 판단, 다시 산업계에 근무하다가 귀국했읍니다"
학교와 산업계를 두루 거친 것이 전문경영인 코스 한번 밟지 않고 거대한 조직체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우리나라 정보산업을 진단한다면…

"몇년 전에 비해서 많이 정리됐다고 볼수 있지요. 한참 붐이 일다가 추춤한 것은 기업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유저들에게 너무 많이한 때문입니다. 현재 하드웨어중 퍼스널컴퓨터 부분은 상당한 기술수준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읍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소프트웨어를 상품으로 인정한다면 우리나라 컴퓨터 시장도 활성화 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반도체분야에도 진출할 것이라는 박성규박사는 1백% 철학을 강조한다. 95%나 98%정도 되면 다된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일 못마땅하다는 것. 첨단 산업에서 엔지니어 경영인의 장점에 대해 '불확실한 미래의 기술사회를 빨리 정확하게 감을 잡는다는 측면에서 아무래도 조금은 낫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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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윤기은 기자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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