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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땀의 도전으로 세계 정상에

실리콘 밸리의 컴퓨터 재벌 황규빈 박사

첨단과학 그중 컴퓨터 분야는 라이프사이클이 극히 짧다. 최신 기종이라 발표해놓고 어물쩡하다 보면 낡은 기계로 전락해 버리고만다. 그만큼 기술개발이 지속적으로 밑받침되지 않으면 금방 도태해버리는 곳이다. '도전과 응전'의 다이나믹한 경연장인 셈이다.
 

수많은 스타가 탄생했다가 명멸하는 첨단기술의 메카인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세계 제1의 컴퓨터터미날 업체를 이룩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사무용 컴퓨터 분야에 강력한 도전장을 내고 있는 한국인이 있다. 그가 바로 황규빈이다.
 

서울 구로동에 있는 한국지사(텔레비디오 컴퓨터코리아)에서 만난 그의 첫인상은 '단단하다'는 느낌이었다. 22년전 미국으로 단신 유학, 세계에서 주목하는 인물로 성장한 그의 모든 것이 작달막한 키와 단단한 인상에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 세계 컴퓨터산업계의 대표적인 인물의 한사람인 황박사님을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보통 텔레디비오 시스템주식회사는 세계 제1의 컴퓨터터미날 업체로 알고 있는데 지금도 터미날만을 생산합니까?
 

"터미날이 주력 상품임에는 변함이 없읍니다. 그렇지만 급변하는 컴퓨터분야에서 한가지 품목만을 생산한다는 것은 기업이 성장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우리 회사가 1975년에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전까지와는 다른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내장한 비디오 게임기를 생각했었읍니다.
 

그후 컴퓨터 산업의 발달로 모니터 생산에 뛰어들어 어느 정도 재미를 보았지요. 모니터기업으로는 거의 독점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요. 모니터라는 것은 텔레비젼 브라운관과 같은 것으로 독자적인 능력이 없어요. 그 당시는 컴퓨터 터미날 보통덤(Dumb)터미날이라고 불렀지요. 그래서 그때까지의 모니터기술에다 게임기를 만들려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첨가하면 상당한 자체 능력을 가진 스마트터미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읍니다.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그당시 모니터는 붙티나게 팔리고 있었읍니다. 한창 상승세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주력상품을 바꾼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읍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터미날업체로 전환한 것이 오늘날의 텔레비디오를 이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과 앞을 내다보는 직관력이라고 할까요.
 

주력 상품이 절정에 있을 때 그것을 대체할수 있는 신제품과 새로운 시장을 찾아야지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 지금의 상황을 조금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몇년 전부터 컴퓨터부분에 적극 투자하고 있는것으로 알려졌는데···
 

"잘 알겠지만 지금은 컴퓨터의 용량은 대형화하고 있고 크기는 점점 소형화하지 않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퍼스널 컴퓨터로도 이제까지 대형이나 중형의 범용컴퓨터로 가능했던 사무자동화가 어느정도 가능하지요. 더군다나 퍼스널컴퓨터가 대형컴퓨터의 인텔리젠트터미날 역할을 하면서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읍니다.
 

그래서 저희도 개인용컴퓨터와 사무용컴퓨터를 동시에 겸비할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해 내놓고 있읍니다. 한국에서도 곧 시판될 텔레비디오 PC-CAT(Compact Advanced Technology)도 그 일종이지요. 이 제품은 멀티유저용(Multi-User)으로 IBM-PC든 애플제품이든 코드만 꽂으면 연결해 사용할 수 있읍니다. 현재는 마이크로컴퓨터 사업도 하고 프린터사업도 하니까 명실상부한 종합컴퓨터업체가 돼있지요."
 

중공, 소련을 비롯한 59개국에 대리점을 갖고 있는 세계 정상의 기업인답게, 첨단산업의 엔지니어답게(그는 한양대 전기공학과를 2년 다니다가 미국 '유타'주립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웨인'주립대학에서 전자공학 석사학위를 받은 엔지니어이다. 1983년에는 유타주립대학에서 명예 공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론과 신념이 통일된 확신에 찬 모습이었다.

 

한국 지사에서 중역들과 함께 제품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황규민박사(맨왼쪽)


'한글처리'가 가장 큰 문제
 

-한국의 컴퓨터산업에 대해 의견을 들었으면 합니다. 황박사님이 한국인이라는 입장을 떠나서 객관적인 이야기를 해주십시요.
 

"제가 4년 전에 한국지사를 세울 때만해도 한국의 컴퓨터산업은 상당히 낙후되었읍니다. 컴퓨터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은 거의 없었으니까 응용력도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읍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생활에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고 직접 사용하지 않아도 컴퓨터를 쓸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봅니다.
 

이 과정의 가장 큰 변수가 '한글처리'문제지요. 아무리 영어를 잘 안다해도 한글처리가 되지 않으면 저변확대에는 성공할 수가 없읍니다. 컴퓨터를 쓰는 사람이 많아야 컴퓨터산업이 발달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일본의 경우 컴퓨터 도입 초기부터 코드를 통일해 사용한 것이 비약적인 정보산업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어요. 한국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표준화가 미흡하다고 할 수 있지요.
 

또하나 경제의 기본원칙으로 돌아가 한국이 세계적인 컴퓨터산업국으로 되는데 기본적인 인구가 모자란다고 생각합니다. 4천만은 자급자족을 하기에는 조금 역부족이지요. 국내 시판을 통해 기술적 검증도 하지 못한채 수출만 하다보니까 클레임에 자주 걸린다고 볼 수 있지요. 더군다나 생산품목의 수량이 적으니까 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고….
 

사족같은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통일이 되면 이런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요."
 

미국에서 22년을 살아온 사람치고는 한국말의 구사는 물론 한국적 상황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조국의 컴퓨터 산업에 어떤 역할을 해야될때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조심스럽게 답한다.
 

"제가 20년 이상을 미국에 살았어요. 제 머리속에는 민족의식이랄까 주체성이랄까 이런 것이 희박해짐을 스스로 느낍니다. 솔직한 표현으로 인건비가 한국보다 싸다든가, 세제혜택을 준다든가 하는 보다 좋은 조건이 있다면 한국에 지사를 두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한국에 오면 개인적으로 문화적 장벽이 없고 편안한 마음을 가지고 일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어 회사를 차렸다면 너무 이기적일까요.
 

아뭏든 구체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아마 텔레비디오 컴퓨터 코리아(한국지사)가 기술이전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다국적기업의 한국지사보다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한국지사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한글처리된 워드프로세싱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푸에르토리코에 있던 공장도 철수했고 본사도 어느 정도 인원을 축소했지만 현재 한국지사의 86년도 예상 매출액은 2천만 달러로 잡고 있고 종업원수도 점점 늘어 2백 80명에 이르고 있읍니다. 앞으로 새로운 공장증축도 계획하고 있읍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짓는다.

 

사업도 엔지니어의 시각에서
 

- 사회생활의 출발이 엔지니어로서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현재 자신을 사업가로서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엔지니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사업가지요. 그렇지만 엔지니어의 입장을 버리고싶지 않아요. 제 전공이 전자공학일뿐 아니라 대학원을 마치고 NCR이라는 컴퓨터회사에 들어가 마이크로프로세서와 관련을 맺었읍니다. 지적하셨듯이 사회생활의 출발을 엔지니어로서 한 셈이지요.
 

NCR에 근무할 때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한국인 동료 한사람이 전자타자기를 개발해 판매해보자는 제안을 했읍니다. 그는 소프트웨어이고 저는 하드웨어 디자이너였기 때문에 힘을 합치자는 것이었지요. 서로가 연구를 좋아하는 체질이었으므로 즉시 의기투합하여 도전장을 냈읍니다. 그러나 그당시는 지금처럼 집적회로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자기 크기에 전자장치를 집어넣는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웠지요. 특히 전자제품은 열에 약하기 때문에 전원 공급기에서 발생하는 열처리 문제로 제가 먼저 손을 들고 말았읍니다.
 

엄밀히 말해서 사회생활의 출발뿐 아니라 사업의 출발도 엔지니어의 역할부터 시작한 셈이지요. 엔지니어로서 대성하고 싶다는 꿈은 매우 어릴적부터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어요."
 

- 이야기가 나온 김에 어렸을 때 이야기 좀 들려 주시지요.
 

"제 고향은 흥남입니다. 아버님은 공업도시인 흥남에서 토목기술자로 근무하셨읍니다. 아주 어렸을 때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국민학교 5~6학년 때부터 공작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읍니다. 직접 모터를 만들어 거기에 소리나는 장치를 첨가시키면 벨이 되고 팬을 설치하면 선풍기가 되는 등 매일 기계만드는데 세월을 보냈읍니다. 학교 등하교길에 흥남공대(정확한 명칭은 생각나지 않는다고 함)를 지날 때마다 창문으로 다가가 발돋음을 하고 학생들이 실습하는 것을 쳐다보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읍니다. 그당시 학교선생님들도 꼭 유명한 기술자가 되라고 격려해 주었으니까요.
 

그러다가 6·25가 일어나고 미군들이 흥남에 들어오면서 미군 작전과에 들락거렸지요. 청소일도 해주고 그들에게서 C레이션깡통도 얻어오곤 했읍니다."
 

- 미국과의 인연은 그때부터이군요.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4후퇴 때 미군을 따라 내려오긴했지만 제가 꼭 미국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였읍니다. 어렸을 때의 꿈대로 백남공업고등학교를 입학하고 열심히 공부했지만 고학이라는 것이 쉽지는 않았읍니다.
 

이때 친구 하나가 미국으로 떠났어요. 고맙게도 이 친구는 저에게 미국생활에 대해서 자세하게 적어보냈읍니다. 그 중에서 저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 미국은 고학하기가 한국보다 쉽다는 것이었어요. 그때부터 미국생활의 동경이 시작되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부터 유학준비차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등 저 나름대로의 준비를 했읍니다."
 

29살의 나이로 단돈 50불을 손에 쥐고 미국에 유학온 황박사의 생활은 친구의 편지처럼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유학생활을 묻는 질문에 "피로의 연속이었지요. 청소부, 접시닦이 안해본 일이 없어요. 공부하면서 일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읍니다. 특히 공과대학은 숙제가 어찌나 많은지 방학동안 외에는 아르바이트가 불가능했읍니다. 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하니까 좀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더군요. 낮에는 '포드'사에 다녔고 밤에 학교를 나가는 정도였으니까요. 학비도 회사에서 대주더군요"라면서 대학다닐 때 같은 대학에서 영양학 석사 코스를 밟고 있었던 부인과의 결혼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서로 도움이 되었다고 밝힌다.

 

9천달러로 성취한 백만장자의 꿈
 

- 미국내에서 4백대 부자라고 하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어려운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돈번 이야기를 하라는 거지요. 전자식 타자기 개발에 실패하고 2년반만에 다시 비지니스를 시작했읍니다. 처음에 밝힌대로 비디오게임기계였는데 그당시 게임머신은 TTL(입력 출력이 모두 트랜지스터로 구성되는 논리회로)이라는 반도체를 쓴 제품이었기 때문에 게임이 다양하질 못했어요. 몇번 쓰다보면 쉽게 싫증을 느끼지요.
 

TTL대신에 제 전공인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하면 프로그램만 교체해도 즉시 새로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고급 게임머신이 됩니다. 세계적 게임머신 회사인 '아타리'사의 연구개발 간부를 찾아갔지만 '이론적으로 맞지만 자신이 없다'고 주저했어요.
 

결국 저는 한국인 엔지니어 2명을 규합하여 9천달러라는 적은 돈으로 사업에 본격 착수했읍니다. 제품에 대한 평가는 매우 좋았지만 생산시설 미비로 6개월만에 동업자들은 떨어져나가고 돈도 바닥이 났읍니다.
 

그후 눈을 돌린 것이 컴퓨터모니터 수입판매였어요. 한국의 생산시설을 이용하려고 금성, 삼성, 천우, 대한전선 등을 찾아다녔지만 제품이 워낙 생소하고 수량이 많지 않아서인지 다 거절하고 대한전선만 허락하더군요.
 

제가 사업의 기초를 닦은 것은 결국 한국과의 제휴로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읍니다."
 

한국의 싼 노임으로 생산하고 미국시장에 팔아 이윤을 극대화한 것이다. 이 당시 그는 제품개발로 한국과 미국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동분서주했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개발을 해가지고, 한국에 와서 한국의 생산시설에 맞추어 재조정하고 다되면 그 즉시 미국에 와서 고객에게 보여주고 고객의 요구가 다르면 다시 한국에 와서 고치곤했읍니다. 2년 동안 대한전선이 만든 컴퓨터모니터를 미국에서 판매에 얻은 돈을 거의 모두 제품개발에 쏟아넣었읍니다."
 

결국 그는 여기서 얻은 이윤을 밑거름삼아 오늘의 그를 이룩한 것이다.

 

아이디어에 대한 확신


- 주종상품의 전환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읍니까?
 

"제 개인적으로 보나 텔레비디오의 역사 중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바로 이 때였읍니다. 제품이 다소 고급화됨에 따라 한국에서 생산해내는 제품의 개발이 지연됐읍니다. 지금의 기술수준으로는 별 문제가 없지만 그 때만 해도 상당히 애를 먹었읍니다. 제품이 오지 않으니까 자연히 종업원도 감소되고 집을 저당잡혀 6만달러를 구했으나 한달만에 종업원 임금으로 나가버리더군요."
 

- 그 역경을 딛고 터미날업체로서 세계 정상에 오르게 된 비결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야기했던대로 덤터미날이 아니고 스마트터미날이었다는 것이 우선 첫째이고 그당시 터미날은 철제품이었으나 저희가 만든 제품은 플라스틱 케이스였읍니다. 거기에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가격혁명이었지요. <;덤터미날 가격으로 스마트터미날을>;이라는 광고가 대단히 히트를 쳤읍니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제품에 대한 확신으로 끝까지 버틴 결과라고 할까요."
 

- 현재 기업경영상 가장 어렵다고 생각되는 점은 무엇입니까?
 

"제가 본사에서 거느리고 있는 종업원이 약5백명 됩니다. 그중 중역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한 50명되는데 이 사람들과 저의 사고방식에 아직 차이가 많아요. 예를 들면 저희 회사는 주6일 근무를 하는데 토요일날 제가 출근해있어도 이 사람들이 나오질 않아요. 저는 아직도 '일' 즉 회사가 중심인데 이 사람들은 '가정'으로 대표되는 개인생활이 먼저입니다. 단편적인 예이기는 하지만 이런 문화적 차이가 경영상의 가장 큰 장벽입니다.
 

집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저희 세대(그는 퍼스트 제네레이션이라 표현했다)와 자식들 간에 사고방식의 차이가 너무 깊습니다."
 

재미교포로서 미국사회에 최초로 주식 공개를 한 인물, 개인소득세 2백만달러를 무는 큰부자인 황규빈은 이제 또다시 컴퓨터메이커로서 정상을 오르기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그는 지금을 '시작'이라고 강조한다. 컴퓨터사회의 진전과 더불어 앞으로 그가 어떻게 변신할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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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권부문 기자
  • 김두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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