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경주시 인완동 반월성(半月城) 동북쪽에 있는 첨성대(국보31호)는 현존하는 동양최고의 천문대로서 의심이 여지가 없으나 유감스럽게도 현재의 학문수준으로는 그 신비의 베일을 완전히 벗기지 못하고 있다.
우선 첨성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첨성대의 지상 높이는 9.17m의 화강석으로 나팔모양의 원통형의 아름다운 곡선미를 나타낸 탑으로서 전체의 구성은 기단부 층단부(層段部)그리고 상부의 정자석부(井字石部)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의 기단부(基檀部)는 한변의 길이가 5.35m로 정방형의 판석 12개로 구성되어 있고 그밑의 지대석(地台石)은 네귀에 90도각의 평판석재(平板石材)에 각면을 1개석으로 맞추어서 도합 8개가 있고 지대석 밑에는 사력토(砂礫土)가 있고 또한 장석(障石)들이 가 석단(石端)을 물리어 괴고 있다.
이 기단부를 형성하는 12개의 판석은 방위를 12지간(十二支干)으로 비정(比定)해서 배석(配石)한듯하다.
평균 30cm의 석재를 쌓은 층단부는 밑부분이 넓고 점차 좁아져서 상부는 원통형으로 이루어지는데 총단수는 27단이며 정상부의 정자석을 1단으로 볼때 전체가 28단이 된다.
각층단을 형성하는 석재(첨성대의 내부는 다듬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 쌓여지고 남창의 바닥에 해당하는 12단까지는 토사로 메워져 있다)의 수는 1단에서 12단까지 1백 82개 13단에서 27단까지 1백84개가 되어 합계 3백66개로서 이것은 1년365일에 잔여시간까지 나타낸 숫자라고 생각된다.
또한 중심부분의 남창(南窓)을 형성하는 3단을 기준으로 보면 아래쪽 12단과 윗쪽 12단을 합친 24단은 24절기를 나타낸 것이고 상부의 정자석을 1단으로 봐서 합친 28단은 고대 천체를 분할한 28숙(二十八宿)의 별자리와 부합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13단과 15단의 중간남쪽에 출입구가 있고 그 밑돌에는 좌우로 사다리를 걸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첨성대 내부는 한사람이 간신히 출입할 수 있을 정도의 원통형으로 19단과 20단에 정자형으로 형성하는 장석(長石)이 보충되어 있는데 19단의 동서방향의 장석은 첨성대의 외부까지 돌출되어 있다.
원통형의 정상은 정방형의 장석이 상하2단으로 되어있고 27단의 수평면의 거의 절반은 판석(板石)이 덥혀있고 나머지 절반은 판자(板子)를 놓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지난 62년 첨성대의 실측조사를 통해서 첨성대가 별의 운행을 관측한 천문대 였다고 밝힌 고 홍사준(洪思俊)씨 (전 경주 박물관장)는 남쪽 창으로 관측자가 들어가 사다리를 이용해서 27단의 판자위에서 별을 관측 했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한편 과학사학자인 전상운(全相運) 교수 (성신여대)는 첨성대의 내부가 자연석인 상태로 있으며 내부가 좁아서 관측자가 매일 출입을 하기에는 불편한점과 개발식의 '돔'의 형태로서 내부에서 천체를 관측하기도 역시 불편한점 그리고 정상에서도 겨우 혜성이나 유성을 관측하는 정도로서 이것은 지상에서도 관측이 가능하다는 점등을 밝히고 그러면 관측기구인 혼천의(渾天儀)로 관측을 했다고 가정하면 그에 상응하는 시설이 필요 했을텐데 그러한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점으로 보면 목재의 임시시설물을 사용해서 일식(日蝕)이나 월식등의 비상현상만을 관측했을 가능성이 짙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는 남아있는 구조를 통해 고찰해 보면 관측기용과 개방식 '돔'의 두가지의 기능을 임시적으로 이용해서 평상시의 관측은 규모(圭表)로서의 기능면만을 이용한것 같이 보여지므로 첨성대의 용도는 다목적으로 신라천문학의 높은 수준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탑일것이라고 밝혔다.
첨성대는 규표로서의 흥미가 깊은 구조로 되어있다. 사방이 동일구조로서 계절과 태양의 위치에 관계없이 측정이 가능하며 이를 이용해서 춘분점, 추분점, 동지점, 하지점의 관측과 24절기를 확정하고 일력(日曆)을 산출해 낸것같다.
실제 춘분과 추분에는 남창을 통해서 들어온 태양광선이 내부의 바닥을 정확하게 비춘다. 이밖에 위치결정을 하기위한 자오선격(子午線格)의 원점(原点)의 역할도 했다.
현재는 지구자오선에 대해서 정상정자석의 남북방향은 서로 12도 59분 56초의 편각(偏角)을 이루고 있고 기단부의 남북 방향도 16도의 편각을 이루고 있다.
첨성대에 관한 최초의 문헌의 기록은 삼국유사 권제1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 知幾三事)조의 "여왕당시 석조의 첨성대를 세웠다"라는 기록이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첨성대의 축조년대는 선덕(善德)여왕(632년~646년)의 재위기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축조한 석공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고 홍사준씨와 전상운씨에 의하면 백제의 명장(明匠)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해서 축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삼국유사와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을 종합한 결론으로 삼국유사 권제3에 황룡사(皇龍寺) 9층탑의 건조를 위해 백제의 아비지를 초청해서 불사(佛事)를 완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홍사준씨는 "첨성대의 형태는 신라의 토기류(土器類)에서 볼 수 있는 직선적인 구성요소와는 다른 온화(溫和)한 곡선미를 겸비한 예술" 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첨성대의 정상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동으로 보문리(普門里)의 저수지 제방이 전망되며 남으로 가깝게는 계림(鷄林)과 반월성과 멀리 해목령(解目嶺)이, 서는 선도산(仙桃山)과 멀리 주사산봉(朱砂山峯)이 바라보이고 북은 경주시가지가 전개된다.
과연 왜 반월성 밖에다 첨성대를 세웠는지 또한 어떻게 이용되어 왔는지에 대한 의문이 첨성대의 정상에서 전망되는 풍경으로 추측할 수 있듯이 최근의 학계의 일부에서는 단순한 국가 안위에 관한 점성술과 농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기상학의 단계를 초월한 천문관측기구가 아니겠는냐 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경주에서는 옛부터 첨성대를 속칭 비두(比斗)라 부르고 있고 부근의 부락을 비두촌이라 불렀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것을 봐도 첨성대는 천문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기구임이 틀림없을 것 같다.
고대삼국(古代三國)의 천문학수준은 고구려의 정확한 천문도와 고구려 백제의 고분벽화의 성숙배치도(星宿配置圖)와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천체변화에 대한 기록으로도 알 수 있듯이 경주의 첨성대는 이것을 총정리한 문화 유산으로 성좌의 운행 또는 일월식등의 기록에 대해서는 현재의 천문학도 경의를 표할정도로 고대의 천문학 수준은 높았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약간의 별을 관측한 정도밖에 밝혀지지 않고 정상의 정자석이 동서남북을 나타내고 있는 정도로 그치나 우리나라 천문학수준이 향상되어 고대신라인의 예지가 밝혀질 날을 학계는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