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출판의 질과 양은 그 나라 과학발전의 척도라는 말이 있다. 과연 미국, 소련, 일본 등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과학잡지 및 단행본은 그 나라들이 과학선진국임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의 과학수준은 꽤 높다고들 말하고 있으나 빈약하기 짝이 없는 과학출판물을 보면 별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전문잡지라야 학회에서 내는 것이 고작이고 해마다 출판 목록에 나오는 단행본은 교과서, 참고서가 대부분이며 대중지는 손꼽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개항 이후 1백여 동안 한국의 지도자는 늘 과학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개화기에 팽배했던 과학주의, 일제하 1920년대의 거국적 과학대중화운동이 이를 보여 준다. 해방후 역대 정권은 한결같이 과학입국(科学立囯)을 외쳐댔다. 그러나 구호만 요란했던 70년대의 '전국민의 과학화운동'에서도 과학출판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과학기술 풍토조성은 정부의 연례사업으로 나왔건만 실질적인 뒷받침은 거의 없었다.
선진국에서는 과학의 부작용이 갑자기 드러난 60, 70년대에 거센 반과학운동이 일어나 과학만능 무드에 찬물을 끼얹었었다. 이 움직이 주춤해진 보수회귀(保守回歸)의 80년대에는 첨단기술의 놀라운 성과에 힘입어 과학 붐이 다시 일어났다. 미국과 일본에서는 과학잡지가 앞을 다투어 창간되었고 곧 백만부를 올리는 뜻밖의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의 비소설부문 베스트셀러의 3분의1을 과학책이 차지했고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오랫동안 1,2위를 다투었다. 소설부문에서도 과학소설이 몇가지 끼었다. 불길은 현대화를 서두르는 중공에도 번져 '사이언스81', '사이언티픽아메리칸'의 중국어판이 창간되었다.
한국에도 과학출판 바람이 상륙한 것 같다. 더구나 언론이 첨단기술을 과장해서 떠들어댔고 정부가 과학기술 진흥을 거창하게 내세운 것이 부채질 했다. 그 결과 80년대 들어와 종합과학지 '주간과학' '사이언스' '월간 과학' '과학 동아'가 창간되었다. 단행본 발행도 좀 늘어났다. 그러나 아직 열풍(熱風)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서처럼 '뉴튼' 해설서를 끼고 다녀야 교양인 행세를 하던 현상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77년에는 과학과 인간사가 '과학과 인간 총서'를 내다가 중단했고 85년부터 과학세기사(처음에는 과학 평론사)가 대중과학 전문출판사로서 '최신과학신서'와 '21세기과학문고' 등을 의욕적으로 내고 있다. 학원사 등 일반 출판사들도 관심을 가져 띄엄띄엄 과학책을 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활발한 곳은 정음사와 범양사 출판부이다. 이 두 출판사는 이미 상당한 실적을 올렸지만 앞으로 더욱 확장할 의욕을 보이고 있다.
3년전 민음사가 과감하게 시작해서 30권 가까이 계속 내고 있는 '대우학술총서'는 일반 대중 상대는 아니지만 높은 수준의 단행본으로서 대학사회의 호평을 받고 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과학책은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에서 일찌기 '학생과학문고''세계과학문고'를 펴 내 선두를 달리고 있고 여러 출판사들이 전집 또는 단행본을 만들어 재미를 보고 있다.
판매부수를 보면 '현대과학신서' 가운데 10여년 동안 10판 이상을 찍어낸 2만부를 넘긴 것이 꽤 여러 권 있다. 초기에는 부진했던 '블루 백스'한국판도 요즘 잘나가기 시작했다. 학원사에서 낸 '코스모스'와 '오리진'은 한동안 베스트셀러였다. 최근 정음사, 정음문화사, 범양출판부, 과학세기사에서 경쟁적으로 낸 핼리혜성에 관한 책들과 '인간등정의 발자취(브로노우스키, 범양사출판부), '우주의역사'(윌슨,범우사)는 팔리는 책이다. 그러나 '과학과 사회의 현대사'(풀빛), '현대의 과학기술과 인간 해방'(한길사) 같은 비판적인 책들이 주목을 못끄는 것은 한국 독자들의 한심한 수준을 말해 준다.
몇가지 고무적인 현상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 과학출판에는 문제가 많다. 우선 과학을 쉽게 풀어 줄 마땅한 필자가 드물다. 본격적인 과학저술인은 홍문화, 김정흠, 김용운, 현원복씨 정도이고 70년대에 등장한 우수한 저자들은 바빠서 쓸 틈이 없다. 언론·출판계는 새로운 과학저술인 발굴에 힘써야 할 것이다. 둘째, 과학물을 다룰 편집자를 구하기가 어렵다. 여기에는 출판사의 낮은 대우 같은 딱한 사정이 있지만 과학을 모르는 편집자가 만들어내는 책은 위험천만이다. 낡은 정보, 부정확한 번역, 엉터리 용어 등 한국의 과학출판이 안고 있는 문제는 너무나 심각하다.
끝으로, 과학출판의 발전을 위해서는 '과학학'(과학의 과학) 전문가를 기를 수 있는 교육제도가 필요하며, '문예진흥기금' 비슷한 기금을 통해 정부의 지원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