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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이 '종의 기원'최종판에 붙인 서문 '역사적 개요'에서 서른명이 넘는 진화론의 선배를 언급했듯이 다윈 이전에 이미 진화론은 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윈 이후도 계속되었다. 미래의 진화론은 어떻게 되어갈 것인가.

오늘날 진화라고 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 '다윈'의 이름이다. 하지만 1859년에 나온 그의 유명한 저서 '종의 기원'으로 인해 행여 생물변이설의 파란많고 긴 역사를 잊어버린다면그것은 안될 말이다. 다윈에 훨씬 앞서 시작된 생물변이설의 역사는 다윈 이후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진화론 자체도 진화해 온 것이다. '종의 기원'의 서문에서 볼수 있듯이 다윈 스스로도 이를 알고 고대 저술가들의 몇가지 견해를 끌어댔다.

그리스에서의 진화론의 싹

기원전 6세기에, 밀레토스의 '아낙시 만드로스'는 "인간은 처음에 다른 종류의 동물에서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어렸을 때 혼자 힘으로는 먹고 살수없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스의 또 다른 사상가 아그리젠토의 '엠페도클레스'는 기원전 5세기에 생물체의 형성에 대해 흥미로운 가설을 내 세웠다. "목없는 머리가 떠돌아 다녔으며 이마없는 눈이 여기저기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던 기관들이 '사랑'의 작용으로 합쳐졌고 이리하여 생명체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이미 '자연선택설'의 싹을 찾아볼 수 있다. 곧 살아남을 수 없는 생물(예를 들면 사람의 머리모습을 한 소)은 없어지는 반면, 생존에 알맞게 생긴 생물은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들은 엠페도클레스가 진화론의 선구자라고도 했다. 하여간 고대의 몇몇 저술가들은 때로 놀라운 직관력을 갖고 있었다. 고대 로마의 시인·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는 기원전1세기에 생존경쟁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는 신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다만 자연법칙만으로도 동물의 기원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조직적 체계적으로 명확한 이론으로 나타나기 까지는 여러 세기를 기다려야만해 18세기에야 비로소 최초의 근대적인 생물변이설이 나오게 되었다.

생물학에서 새로운 생각이 성숙하는데는 역사의식의 발전도 한몫을 한것같다. 이론가들은 관습 제도 문화등의 사회현실을 진화론의 입장에서 보는데 차츰 익숙해졌다. 이런 사고방식이 자연에관한 연구에도 적용되었다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 시대에는 기독교가 서구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떄 가장 널리 퍼져있던 성서해석에 따르면 갖가지 생물은 신의 손으로 직접 창조되었으며 절대 불변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리에 도전한다는 것은 고생물학과발생학이 아직 초기단계에 있었던 당시로서는 대담한 일이었다. 이를 무릅쓰고 몇몇 과감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생명체가 대를 거듭하면서 변이를 꺾어왔음을 역설했다.

창조설에 도전한 진화론자들

그중 한 사람인 프랑스의 '브느와르 마이예'는 그가 죽은 뒤인 1748년에야 발간된 저서에서 땅 위에 사는 모든 종은 제가끔 그에 속하는 바다 속의 종에서 생겨났다고 밝혔다. 어류가 땅 위에서 사는데 익숙해지자 조류를 포함한 새로운 동물의 시초가 되어 바다에서 살던 코끼리가 땅위에서 살게 되었고, 사람 또한 바다에 살던 생물(트리톤)로 부터 생겨났다는 것이다.

18세기 중엽의 '피엘 드 모페르티스'는 돌연변이와 선택이 일어나는 과정에대해 많은 연구를 한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페르티스는 생물체는 대를 거듭하면서 우발적으로 변할수도 있지만 쓸모 있는 변이는 보존되어 축적되며, 반면 맞지 않는 개체들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는것이다.

한편 자유주의자 '비퐁'은 제한된 범위의 생물변이설은 가능하다고 인정했던 것같다. 그는 심지어 "모든 동물들은 단 하나의 동물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개량되거나 퇴화하여 모든 종이 생겨났다"고 보았다.

이런 주장의 중요성을 과장해서는 안되겠지만 18세기 이래 수많은 자연주의자들이 종의 변이에 대한 가설을 내세우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다윈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은 비교해부학과 발생학에서 끌어낸 여러 연구결과를 근거로 진화론을 체계화 했다. 그는 뒷날 '동물철학'을 1809년에 펴냈던 '라마르크'의 선구자로 생각되고 있다.

라마르크의 생각을 간추리면 이렇다. 동물들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체적 형질을 획득하며 이 형질들은 자손에게 유전된다. 기린을 보기로 들어보자. 더 높은데 있는 나뭇잎을 따먹기위해, 즉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츰 목을 길게 늘여빼는 버릇이 배었고, 그 결과 생겨난 변이가 후손에게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마라크의 이론은 실제로 훨씬 복잡하다. 그는 환경의 변화가 간접적으로 일종의 진화를 유발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또한 삶 그 자체가 그 고유의 법칙에 따라 생명체 안에서 일종의 진보를 낳는다고 주장했다. 자연이란 저절로 '동물계일반'을 복잡하게 만들어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환경의 변화는 마침내 질서를 어지럽혀 '자연의 일반적 체계'에 '변칙'을 가져온다. 라마르크는 동료 자연주의자들을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이론체계는 혹독한 비판을 받은 뒤에도 계속 후세에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전반에는 또 다른 생물변이론의 해석이 나왔다. 1844년에 '창조적 박물학의 발자취'라는 책을 익명으로 낸 프랑스인 '에 티엔느 조프르와 생틸레르' 영국인 '로버트 쳄버스'가 그 보기이다.

그러나 '찰즈 다윈'과 '알프레드 럿셀월레스'의 논문이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발표되어 '자연선택설'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비로소 결정적인 돌파구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 다음해에 '종의기원'이 나왔다. 이 책에서는 고생물학, 발생학, 비교해부학과 생물지리학으로 부터 끌어낸 수많은 구체적 보기를 들어 잘 짜여진 이론으로 종의 형성을 상세히 설명해 놓았다.

다윈의 체계있는 학설

다윈은 먼저, 종이란 세대를 거듭하면서 변할 수 있는 개체군이라고 보고, 자연계에서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는 '생존경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물들은 경쟁자와 맞써 싸워야 할 뿐만 아니라 더위, 가뭄등 나쁜 기후도 견뎌내야 한다. 여기서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그것은 인위선택과의 유사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사육자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선택을 함으로써 가축을 개량하듯, 자연 또한 개체를 선택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유리한 쪽으로 변한 종은 살아남아 번식하지만 불리하게 변한 종은 사라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세대에 걸쳐 선택이 계속되면서 아주 작은 변이들이 축적되어 새로운 무리, 즉 새로운 종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다윈은 또 자웅선택, 기관의 용·불용, 환경의 직접적인 영향등 다른 진화과정도 여러가지 있음을 인정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자연선택이 가장 주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다윈도 인정했듯이 이 학설은 증명된 바가 없다. 흔히 제시되는 반론은 하나의 종이 다른 종으로 바뀐적이 아직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생물학,발생학,그리고 몇몇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관찰해 놓은 숱한 사실들을 다윈이 알기쉽게 설명했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여러 과학자들이 이새로운 학설에 반대했지만 몇해 뒤에는 많은 나라에서 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다윈의 진화론에는 몇가지 허점이 있다. 이는 무엇보다 그 당시 유전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근대유전학의 효시가 된 '멘델'의 '잡종식물연구'가 1865년에야 발표되었다. 그러자 곧 다른 과학자들은 '종의기원'이론을 수정하게 된다. 다윈은 획득형질이 유전되다고 믿었지만 독일의 '아우구스트 바이스만'은 19세기가 끝날 무렵에 획득형질은 유전될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용·불용에 의한 선택설은 배척을 받았지만 엄밀한 의미의 자연선택설은 그대로 남았다.

1900년에 오스트리아인 '체르마크' 독일인 '코렌스' 네덜란드인 '드 프리스'가 멘델의 법칙을 재발견한데 힘입어 유전학은 새로운 비약을 하게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발전은 다윈의 학설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하기는 커녕 도리어 어떤 변이를 통해 자연선택이 이루어지는가하는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멘델의 편을 드는 사람들은 이 변이들이 갑작스럽고 그 폭도 크다고보았다. 이를테면 '휴고 드프리스'는 불연속적인 돌연변이, 즉 갑자기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는 비약으로 진화를 설명할수 있다고 생각했다(돌연변이설). 그러나 다윈은 진화가 연속적으로 아주 작은 변이들이 쌓여서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엽에 생물학에는 하나의 위기가 발생했고 이는 'R.A.피셔' 'S.라이트' 'J.B.S홀데인'이 집단 유전학을 정립한 1920~1930 년대에야 비로소 해결되었다.

유전자가 개체군 사이에 어떻게 퍼져있는지를 연구하는 이 학문에 힘입어 다윈의 진화론은 휠씬 더 만족할 만한 형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40년경에는 '종합설'로 일컬어지는 진화의 총체적 개념이 새로이 나타났다. 이는 '테오도시우스도브찬스키''에른스트 마이어'와 '조지게이로드 심프슨'의 연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다윈이 첫 손 꼽은 변이는 갑자기 생겨나 어떤 유전자에 영향을 미치는 돌연변이로 규정되었다. 이 새로운 종합은 유전학의 진보뿐 아니라 종의 개념, 생물지리학, 고생물학 등에 관련되는 다양한 연구결과까지도 함께 고려한 것으로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그 커다란 줄기는 지금도 정통적인 해석으로 통하고 있다.

최근에는 분자생물학과 생화학의 발달로 진화현상을 더욱 세밀하고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현미경으로 헤모글로빈 같은 분자의 진화를 추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여러 생명과학의 연구결과가 앞에 든 이론체계를 확증해준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었다거나 신 다윈설, 심지어 새로운 신다윈설조차도 결코 완결되었다고는 볼수 없다.

'적응' 혹은 '자연선택'처럼 간단해보이는 개념들조차도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있다. 이를테면 어떤 유전자가 정말 생물학적으로 유용하기 때문에 선택된것인가를 정확히 밝히기란 무척 힘들다고 지적하는 생물학자도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중립설'이 있다. 수많은 유전자들은 진화의 관점에서 볼때 이롭지도 않고 해롭지도 않고 다만 중립적일 뿐이라는 것이다.

또 미국의 '굴드'와 '엘드리지'는 최근에 '평형중단설'을 내놓아 일반이 믿고있는 생각에 맞섰다. 그들에 따르면 진화란 규칙적으로 연속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진화적 '비약'에 의한다는 것이다. 이 관점과 다른 몇몇 관점에 대해서는 숱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어 신 다윈설은 중대한 수정을 겪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진화론이 겪어온 과정을 보면서 한가지 교훈을 얻어낸다면 진화론의 발전은 단지 '멋진 과학적모험'일뿐 아니라 인간성에 직접 관계되는 문화적 기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낙시만드로스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기원과 우리자신의 기원을 조금식 밝혀온 이들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하지만 이런 이론들은 단지 인간이 지어낸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를 통해 사물을 좀더 명확히 볼수는 있겠지만 우리의 미래는 과학이나 심지어 다윈설까지도 초월하는 도덕적 사회적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다.
 

기린은 높은 나무위의 잎을 따 먹기위해 목을 길게 늘여 빼는 버릇이 후손에 유전되고 지금 같이 목이 길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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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피에르 띠이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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