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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방 유목민 복식에서 시작, 삼 모시 명주의 소색(素色)으로 단순화

 

말탄 고구려의 귀인


한국의 석기시대인이 무엇을 입었느냐 하는 것은 오늘날의 고고학적 유물로는 알 수 없으나 대전 괴정동에서 나온 청동기시대의 의기(儀器)로 보아서 머리는 피발(풀어버린 머리)이나 상투였고, 옷은 엉덩이까지 덮이는 저고리만은 입은 것 같다. 이 형태는 고려 중기까지 제주도의 뱃사람이 웃옷만 입고 아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으로써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훈도시'나 우리의 다리속곳 같은 것으로 아래의 음부를 가리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훈도시는 일본사람만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남방의 원주민들도 하고 있고, 멕시코의 잉카 문명에도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다리속곳이라 하여 현재는 여자가 월경 때만 하고 있으나 애초에는 남녀공용이었던 것 같다. 이렇게 저고리에 다리속곳을 입은 것이 우리의 원시옷이 될 수 있다.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우리 복식의 원형은 고구려벽화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우랄 알타이 복식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즉 바지와 저고리가 분리된 옷으로, 이러한 유형의 복식을 입고 있었던 민족은 주로 시베리아 평원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는 유목민족이었다.

이 유목민족은 서쪽의 카스피해 부근으로부터 동쪽의 바이칼호에서 만주평원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분포돼 있었는데, 보통 그 문화의 중심으로 몽고서북쪽과 남부소련쪽의 스키타이지방을 지목하고 있고, 따라서 스키타이문화라고 한다. 이들의 공통된 특질은 자기들은 태양의 아들이라는 신앙을 견지하고 있으며 신앙형태로는 샤마니즘을 신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주로 한 기마민족으로서 호전적이고 이동적이었으며, 바지 저고리를 입고 머리에는 찬란한 금관을 쓰고 있었다. 이는 시베리아 서쪽의 시 바르칸에서 발견된 금관이 신라의 금관과 그 형태가 같다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아울러 멕시코의 잉카문명의 금관이 가야출토의 삼지형 금관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현재 이 바지 저고리의 원형은 몽고의 노인울라에서 기원 1세기의 실물이 발굴되었는데 그 형태는 고구려 벽화의 바지 저고리와 비슷하고, 오늘의 바지 저고리와도 역시 비슷하다.

기마민족 혹은 바지저고리민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애초에는 동물의 가죽을 가지고 의복을 해입었을 것이나, 차츰 초원의 풀에서 섬유를 채집하여 의복을 해입었을 것이다. 이 가운데서 가장 일반적인 것인 삼(大麻)이다.

이 삼은 중앙아시아가 원산지로 지목되고 있으며, 여기서 다시 모시가 발생하여 각지에 퍼졌다. 이 삼을 주원료로 하는 문화에 대하여 누에를 쳐서 견직물을 생산한 민족이 한족(漢族)이었다.

백색의 민족이 아닌 소색(素色)의 민족

우리 민족도 애초부터 이의 재배를 익혀 의복의 재료로 사용하였던 모양으로, 14세기에 중국의 강남에서 목화가 들어오기까지 오랜 시일 동안 이 삼과 모시가 복식의 주원료이었다.

그런데 흔히 흰옷으로 불리는 삼베나 모시는 완전 백색이 아닌 약간 황색을 띠고 있다. 이를 보통 소색(素色)이라 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해 우리는 백색의 민족이 아니고 바로 소색의 민족인 것이다. 그 뒤에 누에를 길러 옷을 짜입은 명주도 약간 황색이 가미된 것으로 명주의 본바탕 색이다.

우리 민족은 서민층에서는 이런 소색의 천으로 만든 삼베옷이나 모시옷을, 귀족계급은 명주옷을 입고 1400년대까지 생활해온 것이다. 14세기에 있어서의 무명의 전래는 의복생활에 있어서 혁명적인 사례였다고 보여진다.

음식

야성적인 육식 생활에서 콩을 주로 한 발효식으로 바뀌어

 

메주


한국인의 식생활 하면 흔히 발효식품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발효음식은 농경사회가 정착하면서 비로소 발달한 것이고 그 이전의 식생활은 또 다른 것이었다.

우리 민족과 관련된 오래된 식생활습속으로 현재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육식이었던 듯싶다. 즉 삼국시대 이전의 시대에 만주남부지역에 부여와 고구려를 세운 것으로 알려진 맥족(貊族)에서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여의 벼슬이름을 보면 우가(牛加) 마가(馬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등 온통 가축의 이름뿐이어서 맥족의 식생활이 육식위주였음을 짐작케 한다. 뿐만 아니라 맥족은 고기의 요리에도 능란했던 것 같다.

중국의 고전에 의하면, 맥족이 즐겨 먹는 것에 맥적(貊炙)이란 것이 있는데 이것은 고기를 마늘이나 장으로 미리 조미하여 꼬챙이에 꿴 뒤 불에 쬐어 굽는 것으로 이것이 중국에까지 명성을 날렸다는 것이다. 그후 석쇠가 나타나 꼬챙이에 꿸 필요가 없어졌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불고기이다.

이러한 가운데 중국의 농경문화가 한반도에 파급되면서 조나 기장을 가꾸게 되었고 우리 민족의 식생활도 자연히 목축의 단백질 위주에서 농경의 녹말위주로 바뀌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단백질결핍이란 새로운 생리문제가 생겨났는데, 그 해결책으로 나타난게 단백질식품인 콩이었다.

일본에 가르쳐준 술빚는 솜씨

콩의 원산지는 만주남부에서 한반도에 걸치는 지역으로 추측되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 유물에 콩이 보이고 있고 또 콩의 야생종 재배종 중간종 등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는 데서도 입증된다. 중국으로부터 전수받은 농경술을 이용하여 우리민족특히 고구려인은 콩을 재배하게 되었고 나아가 콩을 발효시켜 콩장(豆醬)을 만들었다. 중국 본래의 장이 육장(肉醬)이었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때부터 이미 우리민족은 발효식품을 만드는데 뛰어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서 싹튼 콩과 콩장은 중국와 일본에 퍼져 동아시아 세나라를 두고 콩문화권·콩장문화권이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발효식품의 나라답게 이 땅에서 누룩을 써서 좋은 술을 빚고 있었으니 이것이 당나라에도 전해져 그곳의 풍류인들 사이에 자못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술빚는 솜씨는 백제사람 수수보리가 일본에 전하기도 했다.

또 발효식품인 김치도 이무렵 만들었던 것 같다. 일본에 전해진 김치의 하나를 백제사람이 만들었다는 뜻에서 수수보리김치라 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대표적인 김치'다꾸앙'에 연결된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는 한반도를 무대로 하는 독자적인 문화가 숙성되고 스스로의 식생활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중국에는 없고 우리나라에 있는 송이버섯의 식용을 개발하였다. 또 여러가지 토속식품의 효능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기록에 남기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더욱 융성해졌고, 육식금기는 보다 충실히 실행되었다. 당시 송나라 사신이 와서 보고는 '돼지나 양도 제대로 도살하지 못하여 몽둥이로 두들기고 있으니 내장이 찢어져 고기에 고약한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하겠더라'고 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와 일본의 육식성은 거의 같았다.

그러나 고려말기부터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가니 사정이 완전히 달라지고 말았다. 몽고 사람을 통하여 옛 맥적의 전통을 되찾아, 불교의 절대 금기식품인 쇠고기뿐만 아니라 여러 가축의 내장까지 즐겨 먹게 되었으며, 삶는 요리도 배우게 되니 이것의 하나가 오늘날의 설렁탕에 연결되는 것이다.

일본은 이때 몽고의 침입을 막았지만 그 결과 동물성단백질의 상륙을 거부한 셈이 되고 한반도와 일본의 식생활에 현저한 차이가 생겨난 것이다.

주거

구석기시대의 움집에서 시작 온돌은 북쪽에서부터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집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대체로 신석기시대의 움집이라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이 움집은 지표면 아래를 90~150㎝ 정도 파고 기둥을 세운 데다가 지표면에 서까래를 걸쳐 만든 원시적인 목조가구식 주거지라 할 수 있다.
이 움집에서는 한 공간 안에서 남녀가 구별없이 생활했으며, 따라서 식사나 취침의 행위가 같은 공간에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기능에 의한 공간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1실1주택의 집이었다.

이러한 움집은 인지가 발달되고 도구가 개량되면서점차 대형화하게 되었고, 구조도 좀더 발전된 형태로 되었다. 또 지배계급과 피지배급 사이에도 차이점이 생겨났다. 즉, 지배계급의 집은 중국의 문헌에 궁택(宮宅)이라고 했으며, 움집은 혈처(穴處)라고 해 계급에 의한 공간 분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주거양식인 온돌은 고구려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의 압록강과 두만강 서북쪽, 만주일대를 차지했던 고구려는 기후조건 특히 혹독하게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온돌이 필요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온돌의 기원에 대해서는 4세기 이후의 기록인 중국문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구당서'가운데 고구려조를 보면 "거처는 반드시 골짜기를 의지하여 지었고, 지붕에는 띠나 풀로서 이엉을 지었으나 단, 불사(佛寺)와 신묘 왕궁 관아만은 기와지붕을 하였다. 그 풍속에 의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겨울에 장갱(長坑)을 만들어 그 아래에 불을 지펴 더위를 취하였다…"라고 기록돼 있다.

'불사'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소수림왕 2년 즉 기원 3백72년 이후에 관한 기록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장갱을 온돌로 볼 때, 온돌은 4세기 이후 추운 지역인 고구려에서, 그것도 가난한 서민들의 주택에서 나타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고구려의 서민계급에서 사용되던 온돌은 점차 지역적으로 남하하였고, 또 상류계급으로 전파됐다. '삼국유사'를 보면 백제에도 온돌이 일반적으로 보급된 것을 알 수 있는데 신라의 경우는 문헌상의 기록이 애매하다.

삼국시대에 정착된 마루

온돌과 함께 우리의 주거생활에 있어서 큰 특징을 이루는 것은 마루라고 하겠다.

고구려벽화에서 귀틀집의 바닥이 높은 고상구조인 점이나 '삼국유사'에 판옥(板屋)이라든가 월상루(月上樓) 등의 기록이 나타난 것을 보면 마루구조가 삼국시대에 이미 널리 등장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전통적 주택인 한옥은 온돌 마루 흙바닥 등 3가지의 중요한 바닥으로 공간이 구성된다. 이중에서 사람들이 거처할 수 없는 흙바닥을 빼면, 온돌과 마루바닥은 2대바닥이 되는 셈이다.

특히 온돌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주거생활과 떼놓을 수 없다. 어느 지방을 가도 대청은 없어도 온돌방인 안방이 없는 곳은 없다.

역사적으로 주거형태를 살펴봐도 원시시대의 움집에서 한단계 발전한, 취사와 취침공간이 분리되는 이실주거(二室住居)도 바로 부엌 한칸에 온돌방 한칸이었던것이다. 부엌에 부뚜막을 두어 이 부엌이 주생활의 기본 공간인 방의 난방을 위한 온돌아궁이를 겸하게 했던 것이다.



한국어의 친척들, 몽고어 터키어 퉁구스어 상당히 달랐던 삼국시대의 언어생활


의식주에 못지 않게 우리 민족의 습속을 더듬어볼 수 있는 게 바로 언어생활이다. 말하자면 언어생활은 정신면에서의 습속이랄 수 있다. 한국어는 어디로부터 온 것이고, 우리의 조상들은 어떤 언어생활을 해온 것일까.

한국어를 다른 언어들과 비교하여 그 계통을 세우려는 노력은 비교언어학에 친숙한 서양사람들에 의하여 19세기부터 계속돼 왔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이 핀랜드 학자 '람스테트'였다. 그는 유라시아대륙의 많은 언어들 중에서 터키족 몽고족 퉁구스족의 언어들이 친족관계에 있음을 밝혀 알타이어족을 수립하고 뒤에 한국어를 이 어족에 추가했던 것이다.

이 학설에 대해서는 지금도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형편이지만, 우리나라 학자들은 기본적으로는 그의 학설이 옳은 것으로 보고 이것을 더욱 발전시켜 왔다.

한국어와 터키어 몽고어 퉁구스어는 우선 그 구조가 같다. 일례로 몽고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에 우리는 어순을 전혀 바꾸지 않고 직역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BI IX SURGUULI I$\check {ŋ}$ OYUUTAŋ BAIN 이라는 몽고어를 번역하면 <;나는 대학교의 학생이다>;가 되는데, BI<;나는>; IX(대) SURGUULI(학교) I$\check {ŋ}$(의) OYUUTAŋ(학생) BAIN(이다)로 어순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번역되는 것이다.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일반구조가 같을 뿐만 아니라, 그 세부구조에도 공통점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음운에 있어서는 모음조화를 들 수 있다.

우리 한국어에는 지금도 의성어, 의태어에 '알락달락, 알록달록' 혹은 '얼럭덜럭, 얼룩덜룩'과 같은 예들이 많지만, 옛날에는 일반 어휘에도 이런 규칙이 엄격하였다.

문법에 있어서는 용언의 연결어미가 접속사의 구실을 하는 사실을 예로 들 수 있다. '먹고 잔다', '찾았으나 없었다'에서 보는 '고,나'의 용법은 인도·유럽계통의 언어들이나 중국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특징들이 한국어와 터키어 몽고어 퉁구스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친족관계의 증명은 이와 같은 구조적 특징들의 일치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구체적인 단어들 또는 문법 요소들(조사나 어미)의 일치가 더욱 중요하다.

과거에 '람스테트'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이 이런 일치를 찾으려고 심혈을 기울였고 우리나라 학자들도 애를 써왔지만, 지금까지의 성과만으로는 아직도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에는 부족한 느낌이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관계

한국어를 위에 말한 것과는 다른 언어들과 비교하려고 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 결과는 한마디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다만 한국어와 일본어의 비교는 앞으로 더 검토해 볼 문제로 남아 있다. 일본어는 위에 말한 알타이어족의 구조적 특징들을 대개 가지고 있고, 일부 학자들은 일본어와 퉁구스어 몽고어 등의 비교연구에도 열을 올리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되기도 한다.

아득한 옛날은 덮어두더라도, 고구려·백제·신라의 언어들은 어떠했을까. 같았을까, 달랐을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이 문제에 대한 궁금증을 느꼈을 것이다.

전에도 이들 삼국의 언어에 대해서 연구한 학자들이 있었지만 최근 이에 관한 연구가 많아져서 이제는 대체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삼국시대의 언어자료로서 오늘날까지 전하는 것은 매우 적다. 한자로 적힌 인명 지명 관명 등이 있고 신라의 경우에 향가가 있을 뿐이다.
이런 자료의 부족이 이 방면의 연구를 크게 제약하여 온 것이다. 자료가 적을 때 학자들은 여러가지 억측을 일삼게도 된다.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종합해보면 고대 삼국의 언어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이 드러난다. 특히 북쪽의 고구려말과 남쪽의 신라말 사이에 그 차이가 현저하였던 것 같다.

적어도 오늘날 평안도 방언과 경상도 방언의 차이보다는 더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공통점도 많았다. 이러한 공통점이 그들이 본래는 한 조어에서 갈라져나온 갈래들이었음을 의심할 수 없게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우리 민족은 명실상부한 단일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신앙·신화

동북아의 샤마니즘에 뿌리를 두고 ……

 

신화는 한 민족 고유의 원초성뿐만 아니라 개별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또 동일한 문화권에 속하는 것들 사이에 상당한 보편성이 지탱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연구의 좋은 단서가 된다.

한국의 신화, 그중에서도 왕조 신화는 왕국의 첫 시조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지상에 왕국을 세우고 첫 왕이 되었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왕국의 시조는 하늘에서 하강한 천신이자 왕인 셈이다. 가락의 수로왕, 신라의 혁거세가 그 좋은 본보기이다. 이에 비해 고조선과 고구려 신화는 하강한 천신의 아들이 왕국을 건설하고 첫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들 하강하는 천신은 산봉우리나 산의 나무 등에 내려선 것으로 전해져 있다. 단군의 아버지신인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에, 수로왕은 구지봉 봉우리에, 혁거세는 양산 기슭에 각기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높은 산봉우리 그 자체 또는 높이 솟은 나무는 하늘과 땅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로 생각된 것이다.

이러한 산과 나무는 '하늘 기둥'이었던 셈이니 그것은 단지 높아서 하늘에 닿기 쉬울 뿐만 아니라 세계의 한 복판에 자리잡고 있다고도 생각되었다.

대부분의 민족 또는 인종은 그들이 사는 곳이야말로 참다운 세계라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그들이 사는 곳의 중심은 곧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도 한 것이다.

'하늘 기둥'인 산이나 나무가 각기 곧잘 '세계산''우주산' 그리고 '세계 나무''우주 나무'라고 불려진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태백산과 신단수는 우리들의 세계산이고 세계나무였다고 보아도 크게는 잘못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왕조신화에서 최초의 왕은 천신으로서 세계나무 또는 세계산에 내려 선 것이라 보아도 좋을 듯하다.

 

세계산과 세계나무
 

세계산과 세계나무


이 세계나무 또는 세계산은 동북아시아지역 시베리아 여러 원주민들 사이에 지켜진 무속신앙(샤마니즘)이 빚어낸 세계상 또는 우주상에서 매우 큰 몫을 차지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 세계 또는 우주의 중심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 곧 세계나무 또는 세계산이라고 생각들 하고 있다.

우리의 태백산과 신단수를 이들 시베리아지역의 보기들과 함께 놓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이 세계기둥인 나무나 산들이 시베리아 샤마니즘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북구라파 게르만족의 신화에도 '이그드라실'이란 세계나무가 보이고 있는 이외에 이보다 훨씬 남으로 내려간 지역인 중근동지방에서도 역시 세계나무는 신봉되고 있다.

사실은 석가모니가 그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리수도 워낙은 세계수로서 신앙된 나무였다는 견해가 학계에 제출되어 있다.

이같은 사례들은 세계나무 또는 세계산이란 관념 또는 형상의 분포가 인도·이란을 중심으로 한 중근동에서 북구라파를 거쳐 동서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 있음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가운데 동북아시아지역 시베리아 원주민의 세계기둥은 샤마니즘과 맺어진 점에서 그 특색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달리 세계기둥이 '무당나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에까지 지켜지고 있는 별신굿에서 무당이 신을 모셔내리는 서낭나무가 한 마을의 하늘기둥임을 생각한다면 서낭나무야말로 무당나무이자 세계수인 셈이다.

이럴 경우, 우리들은 상고대의 왕조신화가 강한 무속신앙 원리로 채워져 있음에 대해 생각을 넓혀야 한다. 그렇다면 왕조신화의 세계나무와 우주산에도 무당나무 또는 무당신의 이미지를 겹칠 수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왕조신화는 무속신앙원리에 바탕을 둔 세계나무 또는 세계나무에 내린 천신을 첫 왕으로 삼고 있는 왕국의 신화다. 이 점은 바로 이웃 일본의 신화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요소로서 잘 알려져 있다.

이같이 동북아시아계통의 요소를 근간으로 삼고 다소의 동남·태평양계의 요소(예컨대, 탈해신화와 같은)가 가세하면서 한국신화, 특히 그 왕조신화의 기틀이 잡히게 된 것이다.

성(姓)·족보

가장 오랜 성은 한(韓). 크다, 높다는 '한'에서 유래 고려초에 시조 많이 생겨

단일민족으로서의 뚜렷한 전통을 이어온 한국인은 스스로의 뿌리를 찾아 후손에 연결시키는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엄격한 성씨(姓氏) 관념과 이를 표현한 족보의 발달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의 성씨중 아마도 가장 오래된 것은 한씨(韓氏)일 듯하다. 한씨는 선우씨(鮮于氏)와 함께 기자(箕子)의 후예라고 한다. 기자동래설이 중국사서에 보이기는 하나 기자가 동으로 왔다기보다는 기자조선을 세운 청주(淸州)한씨가 그 가문(실제는 왕국)을 높이기 위하여 중국의 현인인 기자를 조상으로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까닭은 각종 족보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의 성씨가 중국으로부터 유래된 것처럼 되어 있다. 이것을 모두 그대로 믿는다면 한국인은 중국인의 후예가 되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된다.

여하튼 중국사서에까지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에게 남쪽으로 쫓겨가 한왕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한씨성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이 한씨는 한 가문의 성으로서 뿐 아니라 우리 겨레를 지칭하는 민족의 성씨가 되었던 것 같다.

한(韓)은 알타어의 〈한〉을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으로서, '크다''높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몽고말의 〈可汗〉, 〈汗〉, 신라말의 〈翰〉, 〈干〉 등이 모두 〈한〉에 대한 한자 이사(異寫)이다. 〈한〉은 본래 알타이어에 있어서의 'Khan'으로서 'Kan' 또는 'Han'의 음운변화를 가진 것이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에 성씨가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개 삼국시대무렵이다. 백제의 부여씨(扶餘氏) 사씨(沙氏) 연씨(燕氏) 진씨(眞氏) 등과 고구려 왕성인 고씨(高氏), 신라의 왕성인 박(朴) 석(昔) 김(金) 3성과 이(李) 최(崔) 손(孫) 정(鄭) 배(裵) 설(薛)씨 등 6부성(六部姓)이 그것이다.

여기서 6부성은 AD33년 (儒理尼師今5년) 사성(賜姓)된 것으로 돼있으나 이는 모두 후대에 붙여진 성씨가 아닌가 생각된다. 6부성(部姓)을 가진 사람은 내물왕때의 설성(薛姓) 2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신라말에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6부성은 신라말의 6두품(六頭品)등이 당(唐)대의 대족이었던 이·최·손·정·배·설씨 등 한성(漢姓)을 모방하여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최치원(崔致遠)이 그의 선조를 한족(漢族)이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 한성(漢姓)이 크게 유행한 것은 신라말기에서 고려초기였다. 이때의 호족들은 그들의세력이 커져가자 과거에는 왕족이나 6두품귀족들만 가지고 있던 성씨를 자기들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고려기에는 많은 성씨가 새로 생겨나게 되었다. 한국의 오래된 족보를 보면 시조가 이때 사람인 경우가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고려전기에는 이러한 호족들이 중앙관료로 진출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과거시험을 거쳐 중앙의 문신귀족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당의 제도를 모방하여 이들 가문을 수록한 씨족지(氏族志)를 만들어 여기에 들지 않는 사람은 과거응시나 관직진출에 제한을 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제한은 곧 무너져 성씨가 일반평민에게까지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초기에는 천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성씨를 가지게 되고 조선후기에는 천인중에도 일부는 성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성씨의 확산은 곧 관리가 될 수 있는 자격의 확산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성씨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씨가 일반화되어 가자 사대부들은 송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족보를 만드는 데 열중하였다. 사대부들이 자기의 가문을 훌륭한 가문으로 올려세우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가장 먼저 생겨난 족보가 안동권씨의 성화보(成化譜)와 문화유씨의 가정보(嘉靖譜)였다.

그리하여 조선후기에 이르면 많은 족보가 발간되었고 족보가 없는 성씨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2백65성이었던 것이 조선후기에 이르면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총설'(陶谷叢說)에 2백98성, 이덕무(李德懋)의 '앙엽기'(盎葉記)에 4백86성, 호적에 보이는 성이 4백55성으로 늘어났고 일제시대 성씨조사에 3백26성으로 정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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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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