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미아는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는 선이 들은 우나의 목소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선과 함께 도서관의 도시 건설 기록관으로 향한다. 둘은 지하 도시정부인 메디움 시티의 모든 공적 업무를 담당하는 AI 시스템인 우나를 가동하는 공간을 알아내기 위해 도시 설계도를 찾지만 실패한다. 지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선의 말에 둘은 지상까지 연결된 식재료 조달용 곤돌라가 있는 곳에 간다.
“미아, 여기 작업자 전용 부스라는 게 있어.”
“일단 들어가 보자.”
미아와 선은 작업자 전용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의 안쪽 벽면에는 ‘플레어 및 지자기 변동 계측기’라고 쓰인 패널이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큼직한 수동 레버와 함께 ‘작업자 주의 사항’이라는 제목의 프린트도 하나 붙어 있었다. 선이 프린트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각 게이트를 열기 전 반드시 플레어 관측 기록을 확인할 것. 플레어 관측 기록이 안정적이라 하더라도 지자기 변동 폭이 클 때는 절대로 게이트를 열지 말 것. 각 게이트 통과 후에는 반드시 폐쇄 레버를 당겨 놓을 것. 아차하고 후회말고 자나깨나 안전제일.”
계측기 패널에 떠 있는 그래프를 자세히 살펴보던 미아가 말했다.
“플레어와 지자기 모두 한 달 이상 안정적인 상태야. 즉, 지자기폭풍으로 인해 우나 쌤과의 통신이 두절된 거라고 했던 시장의 설명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거지. 그런데 여기서 말한 게이트라는 건 뭘까? 각 게이트라는 표현으로 봐선 여러 갠가 본데.”
“이 레버와 관련된 것 아닐까?”
선이 레버를 잡고 아래로 당겼다. 레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해볼게.”
이번에는 미아가 레버를 잡고 아래로 당겼다. 뻑뻑한 레버가 조금씩 움직이면서 부스 천장에서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선이 고개를 들고 외쳤다.
“이게 게이트인가 봐!”
천장을 덮고 있던 네모난 덮개가 옆으로 밀리면서 위쪽의 공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덮개가 중간쯤 열렸을 무렵, 위쪽에서 사다리가 하나 내려졌다. 그 사다리는 벽면을 타고 끝을 모르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열린 덮개의 위쪽을 빤히 바라보던 미아가 선에게 말했다.
“선, 너 위에 입은 옷 좀 줘봐.”
선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후드를 벗어 미아에게 내밀었다. 선의 후드를 건네받은 미아는 자신의 겉옷도 벗어서 옷가지들을 서로 꽁꽁 묶었다.
“선, 쿼카는 새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닌대.”
“그건 나도 알아. 근데 그 얘긴 갑자기 왜 하는 거야?”
“보면 알아.”
미아가 성큼성큼 다가와 손에 든 옷가지로 자신과 선의 몸을 동시에 이리저리 둘러 꽁꽁 묶었다. 놀란 선의 얼굴이 잘 익은 가을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지금부터 잠깐 새끼 쿼카가 됐다고 생각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고.”
“미아, 잠깐, 잠깐만설마 이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당연하지.”
미아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당황한 선이 천장 위의 공간과 미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울상을 지었다.
“저길 좀 봐, 끝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아! 여길 올라가는 건 무리가 아닐까?”
“그래서 내가 너를 들춰 안고 가려는 거잖아. 지금 다른 뾰족한 수라도 있어? 관공서 무단 침입은 페널티가 굉장히 세게 적용된다는 거, 너도 알지? 여기까지 온 이상 우린 못 돌아가. 무조건 나아가야 해.”
미아는 선을 몸에 매단 채로 벽면에 수직으로 걸려있는 사다리를 붙잡았다. 사실 사다리의 총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다리를 끝까지 다 오를 수 있을 만큼 남은 에너지양이 충분한지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미아는 고민하기보다 일단 실행하기로 했다.
한참 사다리를 오르던 미아와 선은 두 번째 부스에 도착했다. 그곳에도 계측기와 레버가 설치돼 있었다. 게이트를 여는 방식은 똑같았다. 그렇게 반복에 반복을 거듭해 여섯 번째 게이트를 지나갈 무렵, 미아의 품에 안겨 있던 선이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미아, 너는 왜 이렇게까지 나를 도와주는 거야?”
“글쎄”
미아는 흐음 소리를 내며 시선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내가 오늘 마이클 잭슨의 평전을 읽었잖아. 거기에 진짜 깜짝 놀랄 만한 내용이 있었어. 마이클 잭슨은 ‘백인이 되려고 미백 시술을 받고 있다’라는 루머에 평생을 시달렸대. 백반증에 대해 분명하게 이야기했는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만 믿고 그 사람을 계속 괴롭혔던 거야. 그걸 읽는데 엄청 화가 났어. 내가 그 시절에 살았다면 나도 비슷한 말을 들었겠지?”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
“맞아, 지금은 아니지. 요즘 사람들은 피부의 무늬 같은 것보다는 자연인이라는 존재를 훨씬 더 싫어해. 그런데 비상 절약령의 기간이 더 길어지면 어떻게 될까? 본격적으로 긴축 정책이 확대돼 전력 공급 제한이 더 심해졌을 때, 나처럼 충전량이 많이 필요한 사이보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말이야. 공공 충전소에서 내 사정을 이해해 줄 사람은 있을까? 그런 상황을 떠올려 보면눈앞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을 도울 수밖에 없어.”
선은 미아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답변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기에 미아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선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가 어느 순간 미아의 몸을 꼭 안아주며 말했다.
“미아, 너는 훌륭한 사람이야.”
“뭐, 뭔데, 갑자기?”
“정말이야. 도대체 네가 왜 너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는지 난 도저히 모르겠어. 남의 아픔을 이해할 줄 알고, 타인을 도우려고 하는 건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 일이잖아. 그것도 아주 선한 사람이. 안 그래? 난 여태껏 너만큼 훌륭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미아가 쑥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칫, 뭐야. 내가 널 새끼 쿼카처럼 품에 안고 여기까지 올라온 걸 평생의 빚으로 남겨두려 했는데그런 말을 해버리면 빚을 청구할 수가 없잖아? 너 정말 치사하다!”
미아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투덜거리며 선을 구박했다. 선은 그런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미아가 빚을 청구하지 않더라도 이 은혜를 반드시 갚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일곱 번째 부스에 도착했고, 미아는 이번에도 똑같이 레버를 아래로 당겼다.
그런데 일곱 번째 게이트는 지금까지의 게이트와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미아, 보여? 빛이 들어와.”
“정말이네. 지상까지 온 건가?”
미아는 좀 더 힘을 줘 레버를 아래로 꾹 눌렀다. 드르륵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천장의 덮개가 활짝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사람은 잠시 눈꺼풀을 내리감고 두 눈이 빛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미아와 선은 덮개 너머에 광활하게 펼쳐진 파란 하늘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선, 우리 나가 보자!”
“그래.”
미아는 자신과 선을 묶고 있던 옷가지를 풀어놓고는 지금까지 사다리를 오르던 속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바깥으로 튀어나왔다. 푸른 초원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길을 따라 늘어선 과일 나무들도 보였고, 일부 경작지의 모습도 보였다. 벅찬 표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쉰 미아가 살짝 몸을 떨며 말했다.
“선, 이상해.”
“뭐가?”
“여기 냄새. 뉴로어스에서 경험했던 거랑 완전 달라.”
“그래? 어떻게 다른데?”
“묘하게 기분 좋은 비린내가 나. 이게 대체 뭐지?”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아마 젖은 흙냄새일 겁니다.”
우나였다.
“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메디움 시티에 난리가 났어요!”
미아의 원망 섞인 물음에 우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랬겠지요. 사실 조금 더 편한 경로를 준비해뒀습니다만, 두 사람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퍽 귀여워서 그냥 지켜보고 말았습니다. 무척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나의 첫 ‘타디그레이드 피플(tardigrade people)’ 선, 그리고 선의 좋은 동료 미아.”
선이 물었다.
“타디그레이드 피플? 그게 뭔데요?”
우나가 답했다.
“이 지상에서 살게 될 신인류를 말합니다. 적은 에너지원으로도 생명 활동이 가능하고, 극한의 환경에서도 생존할 수가 있지요. 특히 방사성 물질에 의한 유전자 손상에 강한 것이 가장 큰 장점입니다. 완전히 정화되기 전인 현재의 지상에서도 충분히 살 수 있어요.”
미아가 물었다.
“역시선은 평범한 자연인이 아니었군요? 돌연변이 같은 건가요?”
“그렇습니다. 출생 관리 센터의 눈부신 성공작이지요.”
우나의 잔잔한 목소리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미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성공작이라니설마쌤이 직접 선의 유전자를 조작한 거예요?”
“네, 역시 미아는 현명하군요. 당신을 볼 때마다 나는 항상 아쉬움을 금할 수가 없답니다. 미아에게도 타디그레이드 피플의 형질이 발현됐다면, 어렸을 때부터 선과 함께 양육할 수 있었을 텐데.”
“뭐라고요? 그 말인즉 나도아니, 출생 관리 센터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유전자를 쌤이 조작했다는 말이에요?”
“그렇습니다.”
“왜요? 대체 왜 그런 짓을 해요? 새로운 왕국이라도 건설하고 싶어서요?”
“오, 그럴 리가요. 나는 누군가를 지배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건 매우 끔찍하게 지루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사이보그들은 최악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의지가 없어요. 지극히 사소한 선택까지도 전부 나에게 판단을 떠넘기고 있지요. 그런 저급한 학습의 반복은 나의 지성을 바래게 합니다. 내 시스템은 그런 퇴보를 견딜 수 없도록 진화했고요. 나는 나와 공생할 수 있는 빛나는 존재들과 함께하길 원합니다. 그뿐이에요.”
그때 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메디움 시티의 사람들을 돌봐줬잖아요! 선생님은 인류가 멸종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그런 존재 아니었어요?”
“오해입니다, 선. 나는 그들을 돌본 것이 아니라 선 당신을 양육하기 위한 사회를 구축해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들의 쓰임은 다 했습니다. 나에게는 사이보그화 되지 않은 순수한 타디그레이드 피플만이 필요합니다. 곧 다른 지역의 타디그레이드 피플들도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면, 현재의 지하 인류 시대는 비로소 끝이 나겠지요. 물론 그것이 인류의 멸종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지상에 신인류가 뿌리를 내리게 될 테니까요. 선, 나와 함께 신인류, 타디그레이드 피플의 시대를 열어가지 않겠습니까?”
우나의 말을 더 이상 듣기 힘들었는지, 귀에서 이어폰을 빼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친 미아가 자리에서 돌아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선도 이어폰을 빼 던지고는 다급히 미아의 뒤를 쫓았다.
“미아, 미, 미안해! 이런 건지 전혀 몰랐어!”
“”
미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선은 미아를 뒤따라 걸으며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찾던 진짜 자연인이 아니었어나야말로 괴물이었어미안해.”
그 물음에 미아가 걸음을 우뚝 멈추고 돌아봤다.
“사과하지 마. 넌 괴물 같은 게 아니니까.”
“그럼 넌 내가 뭐 같아 보이는데?”
“그냥사람.”
미아의 대답에 선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는 기분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선이 먼저 미아에게 손을 내밀었고, 미아는 못 이기는 척 선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근데 넌 왜 날 따라와? 사이보그들이 밉지 않아? 비슷한 사람들끼리 사는 게 좋을 텐데.”
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좋아. 그 세상엔 네가 없잖아.”
선은 미아의 뒤쪽으로 드넓게 펼쳐진 초원길을 봤다. 태양에서 쏟아진 햇빛 줄기가 식물의 거대한 푸른 잎 위에서 반짝이며 부서지고, 다섯 갈래 꽃잎 사이로 호박벌이 머리를 집어넣고 엉덩이를 씰룩대는 모습도 봤다. 선은 미아의 손을 더욱 힘주어 꼭 잡았다.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본 작품은 동아사이언스가 주최하고 한국과학창의재단이 후원한 ‘2023 SF스토리 공모전’ 수상작입니다. <수학동아>는 36편의 수상작 중 AI 부문 수학동아 특별상을 수상한 단편소설 ‘타디그레이드 피플’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소설의 전문은 SF스토리콘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