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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탐구생활] 포화 속에서 연구 이어간 스승과 제자

● 비트겐슈타인과의 강렬한 만남 ●  

 

  1911년 가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버트런드 러셀이 교수실에서 동료와 차를 마시던 중, 느닷없이 똑똑 소리가 들렸습니다.

“들어오세요.”

한 청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습니다. 

“러셀 교수님이신가요?”

“네, 맞습니다만.”

“처음 뵙겠습니다. 교수님, 제게 가르쳐 주세요. 논리학과 철학.”

“예?”

서툰 영어로 냅다 용건을 밝히는 청년의 당돌함에 러셀은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어일단 학생,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비트겐슈타인은 원래 영국 맨체스터빅토리아대학교, 현재 맨체스터대학교 소속이었습니다. 하지만 러셀과 독일 수학자 고틀로프 프레게가 쓴 수리논리학에 관한 책을 읽고는 수학논리학자의 길을 꿈꾸게 되죠. 행동력이 뛰어났던 그는 곧바로 프레게를 찾아갔는데요. 비트겐슈타인과의 만남이 제법 인상적이었는지 프레게는 그에게 러셀 밑에서 공부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대단히 열정적인 학생이었습니다. 매서운 집중력으로 러셀의 강의를 듣다가 강의가 끝나면 질문 공세를 퍼부었지요. 비트겐슈타인의 열정은 다소 정도를 몰랐는데요. 밤중에 러셀의 집을 찾아와서는 토론을 하느라 자정을 넘기도록 떠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에게 잠자리에 들 시간이라고 보채고 싶었으나 만약 그렇게 떠나보낸다면 비트겐슈타인이 크게 상심할 것이 분명했기에 가만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학기가 끝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은 제가 멍청하다고 생각하세요?”

“그걸 왜 알고 싶은 거니?”

“만약 제가 멍청하다면 저는 공학자가 되겠어요. 그렇지 않다면 저는 논리학자가 되겠어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러셀이 대답했습니다.

“나야 자네가 멍청한지 아닌지 모르지만, 만약 자네가 방학 기간에 관심 가는 철학적 주제에 대해 글을 쓴다면 그걸 읽어본 뒤 알려주도록 하지.”

다음 학기가 시작될 무렵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에게 글 한 편을 건넸습니다. 러셀은 그 자리에서 글을 읽었습니다.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이윽고 러셀이 입을 뗐습니다.

“자네는 공학자를 하지 말게.”

 

◆ 런던 헌책방에서 만난 <;논리철학 논고>; ◆

 

  2023년 영국 리즈대학교. 

“아, 정담 학생 반가워요. 제출한 학기말 에세이를 읽어 봤는데요.”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습니다.

“훌륭한 에세이였어요. 제가 채점한 최고의 에세이 중 하나예요.”

“저, 정말요?”

“그럼요, 사실 정담 학생이 저에게 질문을 할 때마다 영리한 학생이라고 생각했어요. 조금 다듬고 발전시키면 석사 논문으로 제출할 수도 있겠어요. 곧 한국으로 돌아간다니 아쉽지만, 나중에 진학할 만한 대학원을 소개해줄게요. 독일에 수리철학으로 유명한 대학원이 몇 군데 있으니 독일어를 배워두는 게 좋겠어요.”

6개월 간의 제 영국 교환학생 기간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후련한 마음으로 학교를 나섰습니다. 성적도 다 나왔겠다 평화롭게 산책을 다니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 문득 가고 싶었던 런던의 헌책방이 떠올라 그곳을 향해 걸었습니다. 

헌책방에 들어가 점원에게 휴대전화 화면을 보여주며 물었습니다.

“이 책을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옥탑방으로 올라간 직원은 창고에서 책 한 권을 들고 내려왔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곳에 책상과 의자가 있으니 앉아서 편하게 책을 감상해주세요.”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며 조심스럽게 책을 받았습니다. 가격표를 보니 7000파운드(약 1200만 원)였습니다. 혹시라도 책을 떨어뜨린다면 1년치 원고료가 송두리째 사라질 판국이었지만, 두 손으로 그 책을 잡는 순간 전율이 돋았습니다. 천천히 책의 표지를 열고 첫 장을 읽었습니다.

 

 

◆ 전쟁 중 피어난 20세기 대표 철학서 ◆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이 논리학에 대해 토론하던 때 세계는 무논리와 비합리성의 극치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끝을 몰랐고, 이윽고 유럽의 정치인은 자국의 생존을 위해서는 타국을 찍어 눌러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이성의 눈이 가려졌습니다.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인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하나의 도미노가 잇따른 모든 도미노를 쓰러뜨리듯이, 이 사건은 비극의 방아쇠가 돼 유럽 열강의 야욕을 연달아 자극했습니다. 사건의 책임을 물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침공했고, 이에 세르비아와 동맹인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곧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동맹인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죠. 독일은 러시아와 동맹인 프랑스와 이웃 국가 벨기에를 선제 공격했고, 이에 벨기에와 동맹인 영국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어요.

 

이것이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 과정입니다. 참전국의 목적은 오직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해 더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는 것. 이 하찮은 목적 때문에 수천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는 판국이었습니다.

 

국제 정세에 일가견이 있는 러셀은 이 전쟁의 어리석음에 크게 한탄했습니다. 합리성과 참을 추구하는 논리학자로서 러셀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러 나섰습니다. 그는 반전 운동에 가담해 각종 시위와 회담에 참여했고, 논설문을 기재했습니다.

 

 

그러나 대중의 의견을 거스르는 길을 걷는 데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랐습니다. 러셀은 주변인으로부터 반애국주의자라는 모함을 받았고, 결국 1918년에 반동죄로 수감됐어요. 감옥에 있는 동안 참혹한 전쟁의 소식을 들으며 씁쓸한 심정으로 <;수리철학의 기초>;를 집필했습니다. 그 책은 먼 훗날 한국의 한 학생에게 읽혀져 그가 러셀에 대한 글을 <;수학동아>;에 연재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파란만장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앎을 추구하기 앞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한 그는 전쟁이 터지자 군대에 지원해 최전선에 배치될 것을 자원했어요. 논리학으로 상징되는 합리성과 전쟁으로 상징되는 비합리성. 그는 세계의 두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고자 했습니다. 최전선에서 몇 번이고 치명적인 고비를 넘긴 비트겐슈타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논리와 세계의 관계를 사색했고, 자신의 사유를 공책에 기록했습니다.

 

공교롭게도 러셀이 감옥에 수감된 1918년, 비트겐슈타인 또한 전쟁 포로로 붙잡혀 수용소에 수감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사유의 핵심을 정리해 러셀에게 편지로 보냈습니다. 편지를 주고받은 둘은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만나 이 주제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하자고 약속했습니다.

 

1년 후 둘은 네덜란드에서 만났습니다. 재회의 기쁨을 나눈 후 그들은 곧바로 논리학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비트겐슈타인이 집필한 <;논리철학 논고>;를 출판하기 위한 둘의 노력이 시작됐습니다. 

 

 

 

2023년 8월 수학동아 정보

  • 최정담
  • 진행

    이채린 기자
  • 디자인

    정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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