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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수학을 악보에 그리는 사람들 - 이지수 음악감독

2022년 개봉한 영화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에는 주인공이 원주율을 악보 삼아 만든 ‘파이송’을 연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불규칙한 숫자가 하나씩 모여 아름다운 선율을 이루는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지요. 파이송은 평창 동계 패럴림픽 음악을 총괄한 이지수 음악감독의 작품입니다. 3월 14일 세계 수학의 날을 맞이해, 올해 <;수학동아>;는 음악 크리에이터 ‘상상이상이상길(본명 이상길)’과 ‘썬더 드래곤(본명 김민재)’의 수학 노래를 이용한 챌린지를 진행합니다.

 

왜 수학과 음악을 연결하려는 걸까요? 지금, 수학을 악보에 그리는 사람들을 만나봅니다.

 

 

Q. 파이송 의뢰를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막막했어요(웃음). 보통 다 만들어진 영상을 보면서, 그곳에 들어갈 음악을 만들어 왔는데요. 이 작업은 반대로 제가 먼저 시나리오를 읽고 음악을 만든 뒤, 배우들이 촬영해야 했어요. 자유롭게 작곡할 수 있어서 좋기도 했지만, 음악이 그만큼 중요한 장면이라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주율 소수점 아래 자릿수를 보니 너무 불규칙하더라고요. 난해한 현대 음악이 나올까봐 걱정됐어요. 이번에 파이송을 만들면서 수학이라는 재료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처음 알아 신기하기도 했답니다.

 

Q. 파이송을 만들 때 염두에 둔 점이 있나요?

‘고등학교 경비원으로 신분을 감추고 살아가는 탈북한 천재 수학자가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노래를 통해 수학의 아름다움을 증명한다.’

시나리오의 해당 장면을 백 번 넘게 읽으면서 머릿속에 장면을 계속 떠올렸어요. 인물의 머릿속, 마음속 그리고 처한 상황에 완전히 이입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다 보니 누구나 칠 수 있는 쉬운 곡이고 듣기 좋은 노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아노를 치는 인물들이 영화에서 피아노 전공자도 아닌 데다 즉흥적으로 합주하는 장면이기 때문이에요. 갑자기 어려운 곡을 멋지게 쳐버리면 오히려 관객의 영화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요.

 

Q. 파이송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떻게 끌고 가고 싶었나요?

영화의 주제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중요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어요. 한 명이 숫자를 선율로 제시하고 그에 맞춰서 다른 이가 화음을 만들어 넣는 노래예요. 단순한 선율이 기승전결이 있는 음악으로 완성돼 나가는데, 그 과정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도록 만든 거지요. 그래서 곡의 초반부는 ‘과연 이렇게 해서 답이 나올까?’라며 의구심이 느껴지도록하고, 후반부는 답을 찾아 확신을 주는 경쾌한 분위기로 작곡했습니다.

 

Q. 원주율 소수점 아래 자릿수는 정해져 있는데요. 파이송을 만든 원리가 궁금합니다.

1은 도, 2는 레, 3은 미은 시 그리고 8은 다시 다음 옥타브의 도로 정했어요. 그런데 소수점 아래 자릿수가 불규칙하게 나타나니까 그대로 음악을 만들면 지루한 곡이 될 것 같았어요. 음악에서는 반복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반복되는 멜로디가 있으면 그 음악이 어떤 음악인지 인지하기 쉽고 오히려 지루하지 않게 느껴져요. 그래서 초반 숫자 몇 개만을 이용해 주요 멜로디를 만들었어요. 이 멜로디를 어디서 몇 번 반복할 것인지, 몇 번째 자릿수까지 칠 건지 등을 고려해 파이송을 완성했습니다. 한 2일 만에 만든 것 같네요(웃음).

 

Q. 음악과 수학은 어떤 관계일까요.

음, 오스트리아 작곡가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12음 기법’처럼 수학의 힘을 활용해 다양한 음악을 만들려는 시도가 꽤 있어요. 사실 음악과 수학은 관련이 깊은데요. 음악에서는 감성적인 면과 이성적인 면 모두가 중요합니다. 이성적인 면은 음악을 구조적으로 딱딱 맞아떨어지게 만듦으로써 음악을 아름답게 만드는 거예요. 이 원리에 수학이 많이 있답니다.
 

Q. 2002년 드라마 ‘겨울연가’ 배경음악으로 데뷔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작곡과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했던 아르바이트가 시작이었어요.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피아노를 치는 배용준 배우의 대역을 하기로 했는데, 당시 연주할 곡이 시간에 맞춰 준비되지 않아서 제가 고등학생 때 만든 곡을 쳤습니다. 그 자리에서 장면의 분위기에 맞게 편곡해서 연주한 거예요. 그렇게 우연히 제 곡이 드라마에 삽입돼 이름이 알려지면서 배경음악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계속 들어왔어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한 건 영화 ‘올드보이’ 음악이었습니다. ‘이번 노래만 만들고 유학 가야지’ 했는데 어느새 20년이 훌쩍 넘게 이 일을 하고 있네요.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고 협업해서 하나의 음악을 완성해 나간다는 점이 너무 재밌어요. 물론 대중성과 음악성을 모두 잡아야 한다는 점이 여전히 쉽지 않아요.

 

Q. 작곡을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요.

초등학교 2학년 담임선생님이 동요를 작곡했어요. 선생님이 작곡하는 모습을 자주 본 데다 쓰다 버린 악보를 주워서 따라 그리면서 작곡에 관심이 생겼어요. 10살인 어느 날 집에서 체코 음악가 안토닌 드보르자크의 ‘신세계로부터’를 듣는데 너무 멋진 거예요. 악보사에서 이 악보를 찾아보다가 작곡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반대하시는 부모님 앞에 신문에서 작곡을 가르친다는 신문광고를 가져가서 설득했습니다. 그렇게 작곡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작곡가가 아닌 다른 꿈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Q. 앞으로의 목표가 궁금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제 앨범 ‘아리랑 콘체르탄테’에 수록된 곡들입니다. 아리랑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곡이에요. 제가 영화에 쓰이는 현대 음악을 많이 해온 데다, 한국인이기 때문에 그 어떤 외국 작곡가보다 우리나라 음악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탄생 시키는 일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우리나라 전통곡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열심히 할 생각이에요.

 

※이 감독은 2018년 평창 패럴림픽 개폐회식 음악감독을 맡기도 했습니다. 30곡 정도가 들어갔는데 영상, 음향, 시나리오, 연출 등 다양한 관계자와 여러 회의를 거치며 기획만 1년이 걸렸어요. 이 감독은 “내가 만든 공연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그 현장감과 감동은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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