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줄거리
현세의 자본력에 따라 내세의 등급이 인간, 동물, 식물로 정해지는 세계에 사는 설진은 가족에 대한 애정이 거의 없다. 식물 등급을 받은 아버지가 태어날 위치를 알 수 있는 내세 좌표를 받기 위해 구청에 들렀다가 어쩔 수 없이 구청 직원과 신경전을 벌인다. 이후 회사의 중요한 프로젝트 미팅 장소로 향하는데….
설진이 도착한 곳은 ‘미채 美菜’라는 간판의 채식 요리 전문 식당이었다. 일본의 다다미 식으로 꾸며진 내부로 들어서자 직원이 예약 손님이냐고 물었다. 설진이 이름을 말하자 이내 7호실로 안내해 주었다. 정갈한 인테리어로 꾸며진 가게 내부의 모습에서 육류는 단 1g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견고한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다.
7호실로 들어서자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홀로 찻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눈에 띄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를 한층 세련되어 보이게 만들었다. 설진의 인기척을 느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설진은 자신의 이름을 재관이라고 소개한 그와 정중하게 인사를 나눈 뒤,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눈은 구청 직원과는 사뭇 달리 또렷했고 강단이 있었다.
“말도 없이 채식 식당으로 예약을 잡아서 미안합니다. 제가 육식을 못 하는 탓에..., 채식도 괜찮죠?”
그의 상냥한 질문 이면에는 설진의 가족 중에 식물 등급이 당연히 없을 것이라는 무의식적 확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여태껏 그와 만나 온 대부분의 사람은 수월하게 인간 등급을 받고 살아가는 부유층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설진은 생각했다.
“네, 전 뭐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실은 아버지가 식물 등급을 받긴 했는데 원예용이라서요. 이렇게 식용으로 먹는 것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본인의 혈육이 식물 등급이라고 밝힌 설진은 순간 부끄러움을 느꼈다. 자신의 가정사가 중차대한 기회에 괜한 걸림돌이 되진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괜스레 머쓱해진 설진은 찻잔을 들며 재관의 눈치를 살폈다. 재관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뇨. 정말 저는 상관없습니다. 만약 아버지가 치커리나 양상추 등급을 받으셨으면 영 찝찝하겠지만, 다행히 아니라서요. 하하.”
“그래요. 사실 제 모친도 동물 등급으로 받고 돌아가셨거든요. 오소리로 배정을 받으셨는데, 저는 설진 씨처럼 비위가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육식을 한다는 게 괜히 찝찝하더군요. 오소리 고기는 평생 먹어 볼 일도 없는데 말이죠.”
그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설진은 일단 웃어 보였다. 이 사람과의 만남이 향후 자신의 내세 등급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리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려 한국은행의 투자 전문가였다. 그에게 투자를 얻어 내기만 한다면 진급은 물론이거니와 지긋지긋한 동식물 등급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설진은 재관 못지않게 두 눈을 또렷하게 뜨려 애쓰며 그의 말에 시종 고개를 흔들어 댔다. 등급 상향을 위해서라면 뒷목 통증쯤이야 아무런 일도 아니었다.
“설진 씨 프로젝트 자료를 훑어봤는데 꽤 괜찮아요. 수익성도 좋아 보이고. 근데 다만 걸리는 게 건물을 올리려면 그 부지를 싹 밀어야 되는데, 그게 요즘 쉽지가 않아요. 내세 배분제 때문에 부동산 업계도 엄청 애먹고 있어요. 다들 예민한 거죠.”
“예, 그렇지 않아도 그 부분에 대해서 저도 알아봤는데요. 부지에 심어진 식물 같은 경우엔 한 달 동안 가족의 연락이나 구매자가 없으면 소유권이 토지주한테 귀속된다고 하더라고요. 이곳이 좁은 동네니까 소유권 관련 문제는 저희 쪽에서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쉽지 않을 겁니다. 내일 발표하실 때도 관계자가 그 부분을 분명 짚고 넘어갈 거예요. 거기서 문제가 발생해 버리면 투자자인 저희 입장도 곤란해지니까요. 아무튼 잘 준비해 오시리라 믿습니다.”
재관은 다시금 안온한 미소를 보였다. 그제야 긴장이 다소 풀린 설진은 접시에 놓인 감자전에 샐러드를 곁들여 한입에 넣었다. 설진은 눈앞에 놓인 여러 가지 채소 요리에 대해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내일 계약 건만 성사시키면 두 다리 쭉 펴고 지낼 수 있으리란 희망에 마음이 점차 부풀어 올랐다. 오랜 식사를 끝마친 재관은 설진에게 마치 은밀한 얘기라도 전하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 참, 저희 부장님은 시간 약속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중요한 팁이니까 새겨 들으셔도 좋을 겁니다. 그럼 이제 일어날까요?”
설진은 벗어 둔 코트를 챙기며 휴대전화 달력 앱에서 발표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오후 네 시. 늦으려고 애써도 결코 늦기가 어려운 시간이었다. 식당을 나선 설진은 재관에게 다시 한번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는 헤어졌다. 그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설진은 집에 돌아와서 최종적으로 프로젝트 자료를 검토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해 왔기에 반드시 성사되리라는 확신이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재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굳이 팁이라는 단어까지 써 가며 당부하듯 말하는 재관의 어투가 영 마음에 걸렸다. 한편으론 시간만 엄수한다면 무리 없이 계약이 진행될 것이란 맥락으로 그 문장을 해석할 수도 있었다. 설진은 하루빨리 인간 등급으로 배정받고 싶었다. 인간 등급을 받아 놓아야지만 그제야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