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셀의 발자취를 따라서… ●
2023년 한국.
띵—. 띵—.
비행기에서 좌석벨트를 매라는 알림음에 게슴츠레 눈을 떴습니다. 정면에 있는 모니터를 확인해 보니 영국 런던에 도착하기까지 1시간이 남았네요. 저는 지금 교환학생 생활을 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나고 있습니다. 2022년에 전산학과에서 수학과로 전과했어요. 더 깊은 수학과 철학의 세계를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우선 역사적으로 수학과 철학이 함께 발전해온 영국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지내며, 학자의 삶을 맛보려 합니다. 러셀의 발자취도 따라가볼 거예요.
지금 이 비행기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몰라 두렵기도 하지만 묘하게 설렙니다. 어린 러셀이 마차에 실려 펨브로크 로지로 보내졌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겠지요. 왜 러셀은 부모님도 없이 홀로 그곳에 가게 된 걸까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러셀이 2살일 때 병으로 세상을 떴고, 얼마 안 있어 러셀의 여동생도 똑같은 병으로 죽었습니다. 연이은 가족의 죽음에 실의한 러셀의 아버지는 그로부터 2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러셀의 남은 친족이라고는 조부모와 형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러셀은 할머니가 사는 펨브로크 로지로 옮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러셀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전반적으로 행복했다고 회고합니다. 러셀을 행복하게 만든 것은 특히 펨브로크 로지의 넓은 정원이었습니다. 정원에는 떡갈나무, 밤나무, 갈잎덩굴나무, 삼나무, 그리고 인도의 왕자에게 선물 받은 개잎갈나무가 있었습니다. 정원이 너무나 넓어 어른에게 들킬 리 없는 숨겨진 장소도 많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러셀은 자신의 비밀 아지트를 가꾸고 온갖 생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가장 좋은 점은 정원 앞으로 탁 트인 넓은 전경이었습니다. 펨브로크 로지는 비교적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서 넓디넓은 엡솜 다운스 고원부터 여왕님이 사는 윈저 성까지 다 보였어요. 해질녘이 되면 어린 러셀은 정원에 가만히 앉아 런던의 드넓은 고원이 석양빛으로 물들어 가는 풍경을 지켜보며 수학 생각에 푹 빠져 있었어요.
말년에 러셀은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일평생 넓은 전경과 석양 없이는 좀처럼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전경과 석양.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친 위대한 학자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참으로 사소한 것들이었네요. 아니, 어쩌면 위대한 학자였기에 사소한 것이 주는 행복의 소중함을 알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