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에게 수학은 도저히 뿌리칠 수 없는 뮤즈다.” 미국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타이슨은 왜 예술가에게 수학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생각했을까요?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천재들은 예술가면서 동시에 수학자, 물리학자였는데요.
한양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시인으로 변신해 2009년 박인환문학상부터 2020년 이상시문학상까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함기석 작가. 그에게서 수학과 예술 사이의 수상한 만남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채널이 여러 개인 사람.’
함기석 작가님은 주변 사람이 자신에 대해 표현한 말 중 이 표현이 가장 와닿는다고 합니다. 수학과를 졸업해 다양한 사람을 대상으로, 여러 문학 장르를 아우르는 작가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하기 때문이죠. 함 작가님은 시인이자 동화작가입니다. 시를 쓸 때는 최소한의 언어를 사용해 표현하는 능력을 발휘하고 동화를 쓸 때는 이야기를 만들어 풀어냅니다. 작품의 대상이 성인인지 청소년인지에 따라 시에 사용하는 언어(시어)와 내용도 다르게 합니다.
함 작가님도 처음에는 다양한 채널을 옮겨가면서 작품을 쓰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사람, 사물, 역사적 사건 등에서 새로운 것을 포착하고 그것을 시와 이야기로 엮어서 전달하는 역할은 어떤 채널이든 본질적으로 같다고 봤습니다. 그때부터는 여러 개의 채널을 넘나들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게 됐습니다.
Q. 수학과를 졸업하고 시인이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때 수학을 좋아했어요. 수학 문제를 풀며 답을 내는 과정이 정말 재미있었죠. 어렸을 때부터 상상하거나 모험하는 걸 좋아해 탐험가나 천문학자를 꿈꿨어요. 천문학 같은 과목을 공부할 때 수학이 필수라는 점도 수학을 좋아한 이유였죠. 그런데 대학에서 배우는 수학은 고등학교 때보다 난이도가 훨씬 높아서 공부하기 힘들었어요. 그럴 때 짬짬이 시간을 내서 시집이나 소설책을 읽고 음악을 들었어요.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갖게 된 취미였는데 점점 습관이 됐고 더 깊게 알고 싶어졌어요. 그러다 보니 훌륭한 시인과 작곡가, 철학자 중 많은 사람이 수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고 시인이 된 후에도 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수학도 틈틈이 공부했답니다.
Q. 작품을 쓸 때 어디서 영감을 받나요?
어느 날 약속이 있어서 자주 가던 카페를 들렀는데 평소와 다르게 비가 왔다면 그것은 특별한 경험이 될 수 있어요. 이런 경험은 오랫동안 머릿속에 각인처럼 새겨져 작품에 영감을 줘요. 이렇게 평소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만나는 모든 것이 시의 소재가 되죠. 또 책과 TV를 보는 등 간접적인 경험에서 재미를 느낄 때도 작품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실체가 있는 직간접적인 경험과는 다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영감을 줄 때도 있어요. 꿈이나 기억처럼 현실에 없는 것들이 바로 그런 거죠.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씌워서 제가 받은 영감을 표현하곤 합니다.
시인의 상상을 돕는 기하학
함 작가님은 “수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기하학을 가장 좋아한다”며 수를 다루는 분야보다 공간을 상상하는 일이 더 흥미롭다고 운을 뗐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도형의 위치와 형상을 연구하는 분야인 위상 수학을 혼자서 공부했죠.
함 작가님은 위상 수학을 통해 여느 작가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 전혀 다른 도형으로 여겨지는 정육면체와 구를 위상 수학에서는 똑같은 도형으로 보듯, 어떤 관점을 가지는지에 따라 사람도 세상도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함 작가님은 “기하학을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 것처럼, 수학으로 세상을 관찰하면 색다른 세상을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작가로서 갖게 된 새로운 생각을 사람들, 특히 청소년에게 알려주고 싶다고도 말했죠. 기하학의 차원 개념을 도입해 ‘오렌지 기하학’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서로 영향을 미치는 수학과 시
많은 사람들은 문학과 수학을 전혀 다른 분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함 작가님은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문학이,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수학이 새로운 자극을 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탈출구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수학처럼 논리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스트레스 받을 때 시를 읽으면 기분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세상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문학을 공부하는 건 중요하다고 함 작가님은 강조합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처럼 전문적으로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에게는 수학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함 작가님도 시나 동화를 쓰다 보면 한 줄도 쓸 수 없을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럴 때 수학 문제를 풀면 잠시 문제의 논리에만 몰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문제를 풀다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죠. 함 작가님은 때로는 수학의 난제에 대해 생각합니다. 아무리 고민해도 난제를 풀 수는 없지만 현실의 문제를 잊고 머리를 환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함 작가님의 수학, 과학 공부에 대한 열의는 끊이지 않습니다. 함 작가님은 작년부터 하루에 2시간씩 물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요즘 우주에 대해 상상력을 펼치는 시를 쓰는데, 너무 상상과 관념만으로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확한 이론을 알아야겠다고 느낀거죠. 처음에는 순수하게 알고 싶어서 물리학 공부를 시작했지만 막상 공부하고 나니 작품을 쓰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함 작가님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수학, 과학 도서를 읽고 사고하면 작품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수학 용어가 없는 수학 동시
함 작가님은 수학동아 ‘감수성’ 코너에 올라오는 많은 시를 보며 학생들이 수학으로 시를 쓰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수성 코너에 올라온 시는 수학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시로 볼 수 있다”면서 “엄밀한 의미의 수학 동시는 아니다”라는 의견을 덧붙였습니다.
함 작가님에 따르면 좋은 수학 동시에는 수학 용어가 들어가면 안 됩니다. 수학 용어가 직접 들어있지 않아도 다 읽고 나면 수학 개념이 숨어있는 시가 좋은 수학 동시라고 말했죠. 그러기 위해선 아파트 단지, 도로, 집 등 현실에 있는 것을 자세히 관찰하는 일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관찰을 통해 그 속에 숨어있는 수학적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는 거죠.
함 작가님은 자신의 수학 동시집 ‘숫자 벌레’에 실린 시 중 하나인 ‘무슨 일이 벌어질까?’를 예로 들었습니다. 이 시에는 수학 용어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점점 자라는 사슴의 뿔, 조금씩 부푸는 복어의 배, 계속 자라는 아빠의 콧수염이 표현돼있죠. 이런 것은 일상생활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관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친숙한 소재를 이용해 함 작가님은 수학의 ‘무한’ 개념을 표현했습니다. 이 외에도 자라나는 나뭇가지에서 배수 개념을 떠올려 쓴 ‘배수 나무’와 수학자 이름을 이용해 운율을 맞춘 ‘수학자들이 사는 집’ 등 다양한 수학 시를 썼습니다. 수학 동시의 매력에 풍덩 빠지고 싶다면 수담수담 온라인 클래스를 놓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