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은 지중해의 한 섬에 살고 있는 반인반수다. 이들은 감미로운 노래로 지나가는 배의 선원을 유혹해 섬으로 끌어들인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도 전쟁을 치르고 고향에 돌아갈 때 세이렌과 마주쳤다. 오디세우스는 홀리지 않으려고 선원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고, 자신의 몸은 돛대에 밧줄로 꽁꽁 묶었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새해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을 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월이다. 새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계획한 일은 잘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다. 며칠 만에 실패하고, 음력설을 쇤다며 다시 계획을 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실패해 지키지 못할 계획을 또 세우고 있지는 않은가?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을 홀렸다. 현실에도 세이렌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존재가 많다. 건강한 몸을 위해 영양소 풍부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 걸 알면서도 갈비맛 치킨이 유혹하면 결국 넘어갈 수밖에 없다.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놓으면 미래에 보탬이 될 것을 알지만, 새로 나온 게임기 광고는 우리의 말초신경을 흔든다.
유혹을 뿌리치면 미래에 큰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 당장은 즐거워도 미래 계획이 흐트러진다. 알면서도 우리는 현실의 유혹에 굴복한다. 그리고 또다시 나약한 자신을 탓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진다.
그런데,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미국의 리처드 탈러 미국 시카고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는 말한다. 우리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인간’이 아닌 ‘실제 인간’이니 그게 당연한 거라고.
합리적 인간을 거부한다
경제학은 상황에 따른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학문이다. 경제 현상을 분석하고, 그에 따른 인간의 행동 양식을 연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수학적으로 모형을 만들어 해석한다. 그런데 이 수학 모형 속의 인간에게는 늘 따라붙는 조건이 있다. 합리적인 인간이다. 경제학의 합리적 인간은 항상 최대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만 한다.
마치 기계처럼 만들어진 합리적 인간은 경제학의 수학 모형에서는 잘 작동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모습과는 달랐다. 실제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 분위기나 심리적 요소를 반영한 실제 사람에 대한 분석이 필요했다.
마침내 행동경제학자들이 수백 년간 경제학을 지배한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합리적 인간을 부정해 버린 것이다. 이들은 고전 경제학에 나오는 합리적 인간을 ‘이콘’, 행동경제학에서 다루는 실제 인간을 ‘휴먼’이라 불렀다. 휴먼이라고 부르는 인간은 사회적, 심리적, 생리적인 요소를 반영해 설명한다. 탈러 교수는 이콘과 휴먼이 다른 이유로 ‘제한된 합리성’, ‘사회적 선호’, ‘자제력 부족’ 세 가지를 들었다.
○제한된 합리성 / 깰 수 없는 저금통
새 학기가 시작돼 사야 할 학용품이 생겼다. 이제껏 모은 돈을 꺼내봤다. 간식 저금통에는 3만 원, 학용품 저금통에 2만 원, 그리고 매달 1만 원씩 모으고 있는 여행 통장에 10만 원이 있다.
2만 원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휴먼은 여행 통장과 간식 저금통을 깨지 않고, 동생에게 5000원을 빌린다. 이처럼 전체 가진 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돈을 항목별로 나눠 소비하는 행동이 ‘제한된 합리성’이다.
○사회적 선호 / 우산 가격은 그대로~
기상청에서 폭우예보 알림이 왔다. 우산을 사려는 사람이 많아지기 때문에 우산 가게 주인은 가격을 올리면 이득을 많이 남길 수 있다. 그러나 섣불리 가격을 올렸다가는 가게에 대한 안 좋은 얘기가 떠돌수 있다. 우산 가게 주인은 원래 가격에 팔기로 마음먹는다. 사람들이 비싸지 않은 가격을 보고 선뜻 우산을 사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결국 폭우가 쏟아졌고, 우산은 금세 다 팔렸다. 이유에 상관없이 본인이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행동을 ‘사회적 선호’라 한다. 다른 사람과 관련 없이 철저하게 자기 이득만 따지는 이콘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자제력 부족 / 올해도 반복된 작심삼일
대학생이 되면 혼자 배낭여행을 가는 게 꿈이다. 그래서 용돈을 아껴 쓰며 통장에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번 설에는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다며 친척들이 세뱃돈을 많이 주셨다. 기쁜 마음으로 저축하려는 순간, 새로 나온 게임기 광고가 보인다. 이제껏 모아온 돈과 이번에 받은 세뱃돈을 합치면 살 수 있다. 갑자기 고민이 되며 마음은 게임기를 사는 쪽으로 기운다.
우리 안에는 장기적으로 행복을 극대화하는 ‘계획가’와 현재만 중시하는 ‘행동가’가 있다. 계획가는 미래의 큰 만족을 위해 아끼고, 행동가는 순간의 최대 만족을 누리기 위해 쓴다. 탈러 교수는 ‘계획가-행동가 모형’으로 계획가와 행동가의 소비를 각각 함수로 나타내 인간이 비합리적인 이유를 수학적으로 설명했다.
이것으로 다이어트 결심과 새해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는 이유도 설명된다. 장기적으로 건강을 위해 운동하고 영양 가득한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눈앞에서 맛있는 음식이 유혹하니 다이어트를 미루게 된다. 또 지금 저축해야 멋진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사고 싶은 물건이 생겨 소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무슨 계획이든 작심삼일이 되고 마는 건 우리가 이콘이 아니라 휴먼이기 때문이다. 휴먼이 자제력이 부족한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현재만을 즐기며 살라는 말은 아니다. 가끔 흔들리더라도 멋진 미래를 위해 우리는 욕구를 조절하며 살아야 한다.
실제로 자기 통제능력이 강한 사람이 삶에 대한 만족감도 높다는 연구도 있다. 준 탱네이 조지매이슨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팀은 청소년의 학습습관 통제능력과 성적 만족도, 그리고 삶에 대한 만족도의 관계를 분석했는데, 그 결과 통제능력이 높은 학생이 학업 성취도가 높았다.
오디세우스는 스스로를 돛대에 묶어놓은 덕분에 섬을 무사히 통과한다. 사실 세이렌은 뱃사람을 섬으로 유혹해 끌어들일 뿐 아니라 잡아먹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종족이다. 자제력이 부족했다면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에게 잡아 먹혀 영영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