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
밴드 자우림입니다. 한국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20년 동안 멤버의 변화가 없는 밴드는 찾기 힘듭니다. 그만큼 자우림이 팀워크도 탄탄하고,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밴드라는 뜻이지요. 자우림의 멤버는 마녀가 주술을 걸듯 노래로 대중을 매료시키는 보컬 김윤아, 연주실력이 탄탄한 기타 이선규, 베이스 김진만, 드럼 구태훈입니다. 안타깝게도 바로 얼마 전 드러머가 개인 사정으로 잠정 탈퇴했습니다.
자줏빛 비가 내리는 숲이라는 뜻의 밴드 이름처럼 처음 자우림의 곡을 들으면 어딘가 모르게 음산하기도 하고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꾸 듣다 보면 위로를 받게 돼요. 힘든 사람들의 마음을 공감해주는 가사로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우림의 음악을 들으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쓸쓸함과 외로움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요. 아무도 몰라주는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내 편이 생긴 기분이랄까요?
사랑 고백 숫자 암호 17171771
자우림의 음악은 다채롭습니다. 몽환적이거나 슬픈 곡 말고도 유쾌하고 아름다운 사랑노래도 있어요. 경쾌한 사운드에 보컬이 무대를 방방 뛰어다니면서 부르는 명랑한 곡 ‘일탈’이나 ‘하하하쏭’이 그것이 지요. 또 아주 은밀하게 암호를 만들어 사랑을 고백하는 음악도 있어요.
자우림의 ‘17171771’이라는 곡입니다. 제목만 봐서는 어떤 노래인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2004년 처음 곡이 발표됐을 때부터 많은 이의 궁금증을 자아냈지요. 가사를 보니 사랑을 표현하는 곡이네요. 이 숫자 암호가 사랑 고백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숫자를 180° 돌려 봅시다. 그럼 l L L l L l L l이 되지요. 이것을 적당한 간격으로 떨어뜨려 볼게요.
l L L l L l L l
I LUV U 와 모양이 비슷해져요. 모양을 적절히 변형해서 만든 암호입니다. 억지스럽다고요? 이런 숫자 암호가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삐삐 세대는 암호로 소통해
1990년대 초반과 중반을 주름잡았던 무선기기가 있습니다. 일명 삐삐! 수신을 받으면 삐빕~ 하는 소리가 나며 울렸다고 비퍼, 또는 삐삐라고 불렀지요. 1990년대는 우리나라에서 삐삐가 없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고, 청소년까지 이용하기 시작하자 청소년의 삐삐 소유를 문제 삼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에 이르러 거의 멸종해 버립니다. 짧은 시간 무엇보다 화려하게 빛나는 전성기를 보낸 삐삐는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왜 사라졌냐고요?
삐삐는 무선호출기로 요즘 휴대폰과 달리 수신만 가능한 기기였습니다. 수신만 가능했기 때문에 공중전화나 유선전화로 전화를 걸어 내용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면에 많아야 20글자 정도, 심지어 숫자만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재미있는 숫자 암호가 생겼습니다. 예를들어 급한 연락이 필요할 땐 ‘빨리빨리’와 발음이 비슷한 8282를 남겼습니다. 다비치의 노래 ‘8282’도 있잖아요!
우리끼리만 아는 암호
암호란 본래 중요한 정보를 변형하여 비밀을 모르는 사람은 이용할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요즘에는 양자암호처럼 고급 기술이 이용된 컴퓨터 암호를 개발하고 있지만, 고대에는 정말 단순한 방법으로 암호를 만들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오래된 암호로 알려져 있는 스키테일 암호는 나무 봉에 종이테이프를 겹치지 않게 감아 올려 정보를 숨기는 획기적인 암호였지요. 또 A~Z를 1~26에 대응시킨 뒤 숨기고 싶은 문장을 만들고, 대응된 알파벳을 같은 칸씩 이동해 원래 정보를 숨기는 카이사르 암호도 단순하지만 유명한 암호지요.
1990년대 삐삐를 이용하던 사람들도 참 다양한 방법으로 암호를 만들었습니다. 사랑한다는 표현도 다양한 숫자 암호로 나타냈지요.
슬프게도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도 있습니다. 유사한 발음을 이용한 메시지 012982(영원히 굿바이) 처럼요. 17171771은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만든 숫자 암호입니다. 노래가 발표되고 한참 뒤에 보컬 김윤아가 남편을 위해 만든 곡이라고 밝히며 더 의미 있는 아름다운 곡이 됐지요. 자우림은 20주년 기념으로 올해 새 앨범을 발표할 예정입니다. 이번엔 또 어떤 사랑스러운 곡을 만들지, 혹은 위로가 되는 곡을 만들지 기대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