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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초 유럽인은 여성이 수학과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704년 창간한 영국의 수학잡지 ‘숙녀들의 수첩’은 “요즘 여성들은 요리보다 수학을 더 좋아한다”며 식재료 보관법이 아니라 수수께끼와 수학 문제만 싣기로 했다. 이 시기에 이름을 떨친 여성도 수학자 마리아 아녜시처럼 수학 분야에서 활동하거나 물리학자 로라 바시처럼 수학과 관련된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천부인권사상이 프랑스를 흔들 때부터 여성은 수학계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해부학자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뇌가 말랑말랑하다거나 두개골의 크기가 작다며 이성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증명하려 애썼다. 이를 토대로 여성은 수학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부인권사상 인간은 남에게 침해받지 않을 기본적 권리를 태어나면서부터 가진다는 사상. 프랑스 인권 선언에 영향을 줬다.

그런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지만, 선입견은 오래도록 남았다. 영화 ‘히든 피겨스’는 이런 선입견이 아직 강하게 힘을 발휘하던 20세기 중반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1935년 NASA의 전신인 국립항공자문위원회(NACA)가 처음으로 여성을 계산 업무에 채용했을 때 연구소의 백인 남성들은 “여자가 수학처럼 엄밀하고 정교한 학문을 어떻게 다룬다는 말인가?”라고 물었다. 이 시절 수학을 좋아한 여성들에게 고생길이 얼마나 창창하게 놓였는지 느껴지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어서 이런 어두운 전망도 수학을 향한 ‘언니’들의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여성인 데다 흑인인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은 결국 편견에 맞서 미국을 우주 개발 강국으로 만드는 숨은 주역이 된다. 영화는 미국 최고 영화상인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2주 연속 북미 박스오피
스 1위를 기록했다.
캐서린이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해 설명하고 있다.


‘우주비행사 지킴이’의 탄생

여성과 흑인에게 냉랭하던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서야 인재를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항공 무기를 개발해야 하는데, 원래 연구 분야에서 일하던 백인 남성이 대부분 전쟁터에 갔기 때문이다. 수백 명의 인력을 구하려면 여성과 흑인에게 문을 열어야 했다. 1943년, NACA의 랭글리 연구소는 지역 신문 ‘데일리 프레스’에 이런 광고를 실었다.

 
“집안일을 줄이자! 당당하게 소매를 걷고 이전까지 남자가 하던 일에
도전할 여성은 랭글리 항공연구소로 연락바랍니다!”


 
‘히든 피겨스’의 주인공 캐서린 존슨, 메리 잭슨, 도로시 본도 이때 랭글리에 들어가 컴퓨터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컴퓨터란 계산하는 사람을 뜻했다. 수학과를 졸업하면 수학 교사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여성에게 연구와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가 열린 것이다.

다른 편에는 흑인 민권운동과 여성운동이 있었다. 1941년 시민들의 요구로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대통령이 공공업무와 전쟁 관련 일자리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 8802를 내렸다. 1963년 베티 프리댄의 저서 ‘여성의 신비’는 여성이 어떤 일이든 남성만큼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퍼뜨렸다. 시민들의 열망과 시대적 상황이 흑인 여성에게 닫혀 있던 문을 좁게나마 열었다.


용기와 능력으로 기회를 잡은 캐서린 존슨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소련이 먼저 인공위성을 올리고 최초로 인간을 우주로 보내자 미국은 우주 개발 연구에 모든 자원을 쏟았다. 이제 여성 컴퓨터들은 우주선이 포물선을 이루며 올라갔다가 대서양으로 안전하게 내려오는 궤도를 계산해야 했다. 그중 가장 돋보인 건 캐서린 존슨이다.

캐서린은 해석기하학에 뛰어났다. 대학 시절 캐서린의 능력을 높이 산 교수에게 일대일 수업으로 해석기하학을 배웠기 때문이다. 우주선의 궤도를 계산하려면 지구의 중력은 물론 지구가 약간 납작한 타원형 구체라는 사실과 지구의 자전 속도를 고려해 기하학 문제를 풀어야 한다. 캐서린은 22개의 주요 방정식과 9개의 오차식을 만들었다. 캐서린은 차별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흑인 전용 화장실 대신 백인 전용 화장실에 드나들었고 흑인 전용 식당에 가는 대신 자신의 책상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남성 직원이 자신이 회의에 들어가는 것을 막았을 땐 “여성은 왜 회의에 참석하면 안 되?”라고 끊임없이 물었고 마침내 참석하는 데 성공한다.

해석기하학 여러 가지 도형과 그들의 관계를 방정식으로 나타내 연구하는 수학 분야.
 
NASA의 여성 컴퓨터들은 계산기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계산했다.
 
캐서린의 능력과 당당한 태도는 미국 최초로 우주인이 된 존 글렌의 신뢰를 얻었다. 존은 IBM컴퓨터가 아니라 “그 여자가 숫자를 확인하게 해주면 우주로 가겠다”고 말했다. 죽음까지 각오해야 하는 두려운 상황에서 캐서린을 믿은 것이다.

캐서린은 우주여행 중에 컴퓨터가 꺼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늘 고민했다. 그 결과 1967년 앨 헤이머와 함께 컴퓨터 없이 하늘의 별을 보고 항해해서 우주선을 귀환시키는 방법을 담은 첫 논문을 썼다. 그리고 4년 뒤, 아폴로 13호의 전기 시스템이 폭발로 망가지자 비행사들은 캐서린의 방법을 사용해 살아남는다.

그들이 숨겨진 이유

‘히든 피겨스’의 의도는 필립 카우프만의 고전영화 ‘필사의 도전’과 비교하면 잘 드러난다. 같은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는 ‘필사의 도전’은 우주비행사의 용기와 공포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다만 우주비행사부터 연구원까지 모두 백인 남성이다. ‘히든 피겨스’는 ‘필사의 도전’에서 백인 남성들이 복도를 걷는 장면을 본떠서 여성 컴퓨터가 복도를 줄지어 걷는 장면을 연출했다. NASA에 있던 흑인과 여성을 숨기지 말아달라는 감독의 뜻이 보인다.

한편 여성 컴퓨터는 가려질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캐서린이 아무리 뛰어나도 여전히 엔지니어 아래에서 일해야 했다. 미국 공대는 여성을 받아주지 않았고 NASA 또한 여성을 엔지니어로 고용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 주인공 중 오직 메리 잭슨만이 상사의 추천을 받고 백인 학교에 다니도록 허가를 받은 뒤에야 겨우 엔지니어가 될 수 있었다.
 
메리는 더 빠르고 안전한 비행기를 개발하는 데 참여했다.
 
그런 메리도 결국에는 자신이 좋아하던 엔지니어직을 버리고 여성과 소수자를 양성하는 직책으로 자리를 옮긴다. 고위 기술직으로 승진하는 데 장벽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컨대 연구진이 인맥을 쌓기 위해 사용하던 골프장은 1967년까지 평일에 여성의 출입을 금지했다.


지금은 ‘히든’ 피겨스가 없을까
최근에는 여성의 수학 능력에 대한 선입견이 깨지고 있다. 2015년 열린 국제학업성취도평가 TIMSS에서는 여전히 초등학교 4학년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유의미하게 수학을 잘한 반면, 같은 해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학생평가프로그램 PISA2015에서는 처음으로 남녀 간 수학 성적 격차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십여 년간 남녀의 수학 성적 격차는 줄어드는 추세다.

그럼에도 수학 관련 연구기술직에는 여전히 여성이 드물며, 교수직은 그 정도가 훨씬 심하다. OECD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과학기술 분야 연구직 비율은 30개국 중 뒤에서 2등이다. 프란시스코 아비사티 OECD 교육기술부 분석가는 “여성이 연구기술직에 드문 것은 남녀 간 임금격차를 유지하는 원인”이라고 우려했다.

남녀의 수학 성적 격차는 점점 줄어드는데 어째서 여성은 남성보다 수학과 관련한 직종을 적게 선택할까. 최근 그 이유를 설명하려는 논문이 사이언스에 실렸다. 2017년 1월 안드레이 킴피안 미국 뉴욕대 심리학과 교수는 이 논문에서 “천재는 남자”라는 선입견에 영향을 받은 여성이 똑똑한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수학과 철학에 참여하기를 꺼린다고 주장했다. 이런 고정관념은 6살부터 형성된다.

그러나 아직 연구자 사이에서 합의된 바는 없다. 고정관념 외에 수학에 대한 자신감, 성차별적인 고용 환경, 취향 차이 등이 후보로 거론될 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앞으로도 누군가를 숨기지 않기 위한 다양한 연구와 정책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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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4호 수학동아 정보

  • 이다솔 기자
  • 도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 기타

    [참고 자료] 마고 리 셰털리의 ‘히든 피겨스’, 론다 쉬빈저의 ‘두뇌는 평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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