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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스미디어] 무한대를 본 남자, 라마누잔

머릿속에 그려지는 수많은 공식을 세상 밖으로 펼쳐 보이고 싶었던 인도 빈민가의 수학 천재 라마누잔. 운명적으로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알아본 영국 왕립학회의 괴짜 수학자 하디 교수를 만나게 된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이제껏 증명하지 못한 수많은 공식을 증명해낸다.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은 인도에서 태어난 천재 수학자다. 어렸을 적부터 수학뿐 아니라 영어, 지리학 시험을 지역 수석으로 통과할 정도로 영특했다. 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회계사로 일하게 된다.

어려운 가정형편도 수학에 대한 라마누잔의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라마누잔은 권위 있는 수학자들에게 자신의 수학적 발견을 수차례 편지로 보냈다. 그러나 증명도 없이 수학계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로 써놓은 공식은 수학자들에게 낙서와 다름없었다. 그렇게 라마누잔은 수학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했다.


비극적인 삶의 연속
그러던 어느 날,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교수에게 답변이 왔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 것일까? 당대 최고의 수학자 중 한 명인 하디는 라마누잔의 천재성을 알아본 유일한 수학자였다. 하디는 인도에 있는 라마누잔을 영국 케임브리지대로 불러 함께 연구하자고 제안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후 수많은 수학적 업적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라마누잔의 삶은 영국에서도 평탄하지 않았다. 인종차별을 당하기 십상이었고, 학교에서는 라마누잔이 암산으로 계산해 낸 것을 인정하지않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했다.

채식주의자였기 때문에 음식 문제도 골칫거리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전쟁이 일어났다. 라마누잔이 먹을 수 있는 식량은 구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결국, 라마누잔은 병원에서 요양 생활을 하다가 서른두 살의 나이로 요절한다.

라마누잔의 32년 짧은 생에서 수많은 업적이 나온 것은 고작 몇 년뿐. 영화는 이런 라마누잔의 삶을 담아냈다.


반대의 삶을 살아온 두 수학자의 만남
라마누잔은 그의 스승이자 동료 하디와 전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다. 두 사람은 어떻게 달랐을까?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
하디는 영국에서 교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하디 또한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인 수학자다. 하디는 영국 윈체스터 사립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입학한 지 2년 만에 케임브리지대 우등 졸업 인증 시험에서 수학 부문 4등을 했다.

하디는 수학계에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많은 수학자를 미치게 한 리만 가설에서도 중요한 사실을 밝혀냈다. 무한히 많은 리만 제타 함수의 영점이 일직선 위에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하디는 자신의 가장 큰 업적은 라마누잔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디는 무신론자였다. 단순히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신을 싫어했다. 재밌는 일화로 어느 날 하디가 배를 탔는데 폭풍우가 몰아치자 하디는 리만 가설을 해결했다고 전보를 보냈다. 만약 신이 존재하면 거짓을 용납하지 못해 배를 침몰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였다. 하디는 무사히 돌아왔다.
 

하디와 라마누잔의 아름다운 연구
하디가 없었으면 라마누잔도 없었다. 하디만이 유일하게 역사를 바꿀 천재 수학자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수학 선진국으로 유명한 영국에서 굳이 제대로 된 기호도 쓸 줄 모르는 인도 회계사에게 관심을 둘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하디는 라마누잔의 타고난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언젠가 하디는 타고난 수학적 능력에 대한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기도 했다. 자신에게 25, 동료 수학자 리틀우드에게 30을 줬다. 하디가 살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수학자 힐베르트에게는 80을 주었는데, 라마누잔에게는 100을 줬다. 하디가 생각하기에 수학적 능력이 높을수록 큰 숫자를 줬다.


라마누잔의 π
영국으로 오게 된 라마누잔은 스승이자 동료인 하디와 공동연구를 하기 시작한다. 1915년 6월, 런던 수학회 저녁 회의에서 하디의 발표를 포함해 라마누잔은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이때 발표한 것 중 하나는 원의 지름에 대한 원주의 비율인 파이의 근삿값을 구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수많은 수학자가 파이값을 구하기 위한 함수나 공식을 구했다. 특히 17세기 중반 미적분이 등장하고 나서는 무한급수를 이용해 파이값을 구하는 방법이 많이 등장했다. 하디는 파이값을 구하는 수많은 급수 중에 라마누잔의 방법이 가장 흥미로우며 새로운 결과를 많이 포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라마누잔이 파이값을 구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급수 중 하나는 첫 번째 항만을 이용해 소수점 이하 8자리까지 계산할 수 있었다. 몇 해 뒤에 라마누잔의 연구는 컴퓨터로 파이값을 결정하는 데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알고리듬인 ‘점진적 단계법’의 기본이 됐다.


라마누잔-하디 수, 1729
제1차세계대전 종전 즈음에 라마누잔은 콜리네트 하우스라는 요양원에 입원해 있었다. 한번은 런던에서 하디가 택시를 타고 라마누잔의 문병을 오는데, 택시 번호가 1729였다. 하디가 라마누잔의 침실에 들어서 불만스레 택시 번호에 관해 얘기했다. 하디가 1729가 따분한 숫자라며 나쁜 징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하자 라마누잔이 말했다.

“아닙니다, 하디 선생님. 아주 흥미로운 숫자군요. 그건 두 가지 방법으로 두 세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수거든요.”

택시수 1729는 두 개의 자연수 세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다. 한 쌍의 세제곱 합인 숫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다른 두 쌍의 세제곱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는 수를 찾기는 어렵다.

그런데 라마누잔은 그 자리에서 1729=123+13=103+93, 즉 1729가 A=B3+C3=D3+E3라는 형태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작은 수라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세상을 떠난 뒤 유명해진 라마누잔!
하디와 라마누잔이 연구한 정수론은 현대 응용수학 분야에 많은 영향을 줬다. 암호나 통신은 물론 공학에도 활발히 쓰이고 있다. 그래서 라마누잔의 업적은 오히려 죽은 뒤에 더 높게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라마누잔이 발견한 수학적 사실이 블랙홀의 엔트로피 계산과 같은 분야에도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디와 라마누잔의 공동 연구결과인 ‘하디-라마누잔 점근 공식’은 물리학에서 닐스 보어가 원자핵의 양자 분배 함수를 찾는 데 쓰였다.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보스-아이슈타인 계의 열역학적 함수를 유도하는 데도 쓰였다.

이런 라마누잔에 대해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는 “라마누잔은 한 권의 수학 교과서를 가지고 현대 수학을 통째로 재창조하고 그 분야를 전진시켰다”며, “만약 그가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라고 평가했다.

자연수를 사랑한 수학자 라마누잔의 낭만적이지만 비극적인 삶을 다룬 이야기는 11월 3일 개봉하는 영화 <;무한대를 본 남자>;에서 만나볼 수 있다.

2016년 11월 수학동아 정보

  • 조혜인 기자
  • 사진

    (주)판시네마
  • 기타

    [참고자료] <수학이 나를 불렀다>, <어느 수학자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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