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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동아클리닉]사라진 어진을 찾아라

한옥마을 수학산책



천방지축 후손, 보물을 잃다



우리나라의 긴 역사 속에는 수많은 왕이 있습니다. 왕의 진짜 모습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수십여 곳에 나눠 보관할 만큼 어진의 수와 종류가 많았습니다.

어진은 나라와 운명을 함께 했습니다. 임진왜
란으로 소실됐다가 복원되기도 했고, 6·25전쟁
때는 부산의 한 창고에서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1954년 12월 10일, 용두산에서 시작된 불이 이 창고까지 퍼졌습니다. 이 화재로 불에 타 없어진 어진은 약 40여 점으로 추정됩니다. 창고의 열쇠를 누가 가지고 있는지 몰라 어진을 빼낼 수 없었다고 당시 신문이 전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있던 것 중 현재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어진은 단 세 분의 어진, 4축뿐입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어진 중에 조선시대 이전의
어진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어진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것까지 포함해 조선왕조의 임금 26명 중 단 다섯 분의 어진 6축이 전부입니다.


[축 어진을 세는 단위.]



일곱 관문을 넘어야 하는 이유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태조의 어진은 모두 25~26점이 있었지만, 지금 남아있는 건 단 1점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태조의 어진은 경기전 내 정전에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손홍록, 안의 등 신하들이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겨 보호한 덕분에 어진 1점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최근까지 태조 이성계의 어진은 전주 한옥마을에 오면 누구나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한옥마을의 경기전 정전으로 들어가면 복도에 현존하는 어진의 모사본이 쭉 걸려 있었고, 태조 어진도 모사본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씨 문중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을 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005년 문화재청 국정감사 중 어진의 비단 받침 부분이 30cm 가량 찢어진 것이 발견됐습니다. 문화재청은 어진을 회수해 복원하기로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중요성을 인정받은 태조 어진은 2012년 6월에 국보 제317호로 지정됐습니다.

지금부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어진을 되찾기 위해 일곱 가지 관문을 거치려 합니다. 각 관문은 태조 어진이 있었던 경기전에서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곳곳에 숨은 일곱 문제를 모두 푸는 사람만이 우리 어진과 문화재를 지킬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관문_ 최적 경로 결정하기

문제 하나를 풀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잊힐 뻔한 어진을 하나씩 만날 수 있습니다. 총 일곱 가지 문제가 경기전의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경기전 안내도를 보면서 문제가 숨은 장소를 확인해 보세요. 그 전에 경기전을 효율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경로를 정하는 게 좋습니다.

모든 문을 한 번만 지나 전체를 돌아볼 수 있을까?

경기전의 모든 문을 단 한 번씩만 지나면서 일곱 문제를 전부 찾을 수 있다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요?

경기전의 구조를 단순하게 그리고, 장소마다 A~F로 표시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어진박물관을 G로 표시합니다. 여기서 필요한 건 경기전의 각 장소를 서로 연결하는 문입니다. 그러므로 각 장소를 점으로, 두 점을 연결한 선은 반드시 문 하나를 통과하도록 표시할 수 있습니다.

장소 A로 통하는 문은 2개입니다. A에서 문을 통해 곧바로 B나 G로 나갈 수 있습니다. 즉, 점 A에서 점 B나 점 G를 향해 선 두 개를 그릴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래프를 그렸을 때 한 점에서 뻗어나가는 선의 개수를 ‘결합수’라고 합니다. 따라서 점 A의 결합수는 2, 점 B의 결합수는 3이 됩니다. 같은 방법으로 점 C의 결합수는 2, 점 E의 결합수는 4가 됩니다.

우리가 장소 B로 들어간다고 생각해 봅시다. B로 한 번 들어갔다가 다른 문으로 나올 수는 있지요. 하지만 또 한 번 B로 들어간다면 이미 사용한 문을 지나지 않는 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D도 그런 장소입니다. 결합수가 홀수인 장소는 출발점 또는 도착점이어야만 합니다. 즉 B(동재)와 D(정전), 두 장소 중 하나에서 출발한다면 모든 문을 한 번씩만 통과해서 경기전 전체를 둘러볼 수 있습니다.






 




문제를 푸는 최적 경로는?

경기전 전체를 빠르게 둘러보는 방법을 알았다고 기뻐하긴 이릅니다. 사실 문제를 풀기 위해 모든 장소를 돌아볼 필요는 없으니까요. 관문이 숨어 있는 장소를 모두 들르는 가장 짧은 거리를 찾는 게 첫 번째 관문입니다. 관문이 있는 장소에 대해서만 연결망을 만들어 보면 가장 짧은 거리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번 관문을 통과하면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초상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관문_ 경기전에서 수 어림하기




무사히 첫 번째 관문을 넘었나요? 두 번째 관문은 경기전의 원래 넓이를 어림하는 것입니다. 먼저 경기전 안의 오래된 집인 동재를 보고, 당시 그 곳에 살던사람들의 키를 어림잡아 구하는 연습을 해 봅시다.











동재 살던 아무개의 키는?

동재는 3칸짜리 집입니다. 방이 두 개, 마루가 한 개여서 3칸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1칸으로 세기 때문입니다. 1칸은 6자, 즉 1.8m입니다. ‘자’는 팔뚝에서 손가락 끝까지 길이인데, 약 30cm입니다. 하지만 이 단위는 왕마다 제각각이었는데, 세종대왕 때는 1칸을 8자(2.4m)로 정했고, 그 전에는 1칸이 11자(3.3m)였습니다.

세종대왕 때를 기준으로 1칸은 2.4m이므로 방 1칸의 넓이는 2.4m×2.4m=5.76m2입니다. 1평이 약 3.3m2이므로 지금으로 치면 약 1.7평인 셈입니다. 방 안에 아무런 짐을 놓지 않는다고 해도 기둥 때문에 키가 220cm가 넘는 사람은 눕기 어렵습니다. 약간 여유를 둔다면 성인의 평균 키는 약 160~170cm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 황영일, 신동훈 교수팀은 15~19세기 조선시대 성인 116명(남성 67명, 여성 49명)의 유골로 당시 성인 남녀의 평균 키를 추정했습니다. 추정 방법은 유골에서 넓적다리의 뼈 길이를 잰 다음, 이 값을 전체 키에서 넓적다리뼈가 차지하는 비율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구한 조선시대 성인 남녀의 평균키는 각각 161cm, 149cm입니다.

이처럼 유골 중에서 넓적다리뼈(F), 정강이뼈(T),위팔뼈(H), 아래팔뼈(R)의 길이를 알면 성인의 키(h)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경기전은 얼마나 넓을까

현재 경기전 전체의 넓이는 4만 9590m2입니다. 고전에 따르면 원래 경기전은 ‘2결(結), 70부(負)로, 걸음으로 둘레가 616보’였습니다. 둘레의 길이가 616보라는 점을 이용해 경기전의 원래 넓이를 어림하는 것이 두 번째 관문입니다. 이 관문을 넘으면 순종 황제의 아버지인 고종 황제의 어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경기전의 넓이가 달라진 건 우리 조상의 터를 뚝 잘라 원래 모양을 찾아 볼 수 없게 만든 일제의 만행 때문입니다. 일제시대인 1919년, 일본이 경기전의 서쪽 땅과 부속 건물을 철거하고 일본인 소학교를 세우면서 원래 넓이의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갔습니다. 일본인 소학교는 다시 지금의 전주중앙초등학교가 됐습니다. 2004년에 경기전 부속 건물을 복원할 때 전주중앙초등학교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입니다.

두 번째 관문을 넘은 여러분, 다음 세 번째 관문을 기대해 주세요. 과연 여러분이 생각한 순서대로 관문을 넘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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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수학동아 정보

  • 이연희 전주용소초 교사
  • 백광현 호남중 교사
  • 진행

    고은영 기자
  • 자료출처

    전주시청 전통문화과,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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