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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컴한 눈 대신 마음으로 연구 시각장애 뛰어넘은 수학자들




 
공을 찢거나 구멍 내지 않고 안과 밖을 완벽하게 뒤집을 수 있을까?

만약 양말이었다면 구멍을 통해 안쪽 면을 바깥으로 잡아당겨 쉽게 뒤집었을 것이다. 하지만 구를 뒤집는 일은 이론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수학자들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수십 년 동안 고민했다. 답을 내놓은 사람은 프랑스의 미분기하학자 베르나르 모랑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앞을 전혀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었다!

모랑처럼 시각을 잃고도 위대한 발견을 한 수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수학을 연구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시각 없이도 수학을 공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마음의 눈’으로 구를 뒤집은 모랑


베르나르 모랑은 6살에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었다. 일반 학생들과 똑같이 일반 학교를 다녔는데, 앞이 보이지 않아 프랑스어나 영어처럼 지문을 읽거나 글을 써야 하는 과목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 수학과 철학에서는 두각을 나타냈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의 수학자가 된 모랑은 시각장애인이 수학을 잘 하려면 두 가지 능력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하나는 ‘암산’을 잘 하는 것이다. 공식을 일일이 종이에 쓰면서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랑은 암산을 잘 못했다. 그 대신 그는 두 번째 능력인 ‘공간적 상상력’이 뛰어났다. 직선이나 곡선이 회전하면 어떤 도형이 되는지, 그 도형을 변형하면 어떤 모양이 되는지 마음속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모랑은 사물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손으로 만져서 도형의 모양을 익혔다. 그 결과 실제로 만들기 어려운 도형의 모양도 마음껏 상상하며 연구했다. ‘구의 안팎 뒤집기’처럼 실제로 재현하기 어려운 과정을 알아낸 비결이었다. 모랑이 알아낸 개념은 눈이 잘 보이는 사람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그는 구를 뒤집는 과정을 점토로 빚어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모랑은 셀 수 없이 많은 띠가 모여 하나의 구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띠들은 무한대로 구부러지거나 늘어날 수 있고, 절대 끊어지지 않으면서 서로 통과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그는 구의 위아래 점이 서로 자리를 바꾸고 옆면을 이루고 있는 띠들이 비틀리면서 안팎 면을 뒤집으면 결국 구가 뒤집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과정 중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를 비틀면 시작과 끝의 위상이 같은 도형이 된다는 것도 알아냈다. 이 도형을 ‘모랑 서피스’라고 부른다.



-시각장애인이었던 베르나르 모랑은 공간적 상상력이 뛰어났다. 그래서 구에 구멍을 내지 않고도 뒤집는 과정을 알아냈다.

-모랑 서피스.

-레프 폰트랴긴은 어머니 타티아나의 노력으로 수학자가 되었다. 타티아나는 아들의 눈이 되어 수학의 원리를 읽어주었다.


시각장애 이긴 어머니의 사랑

시각장애임에도 수학을 연구한 사람은 베르나르 모랑뿐이 아니었다. 함수인 f(x), 삼각함수인 sin, cos, tan처럼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수학 기호를 가장 많이 만든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도 시각장애인이었다. 원래는 앞이 보였지만,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연구하던 31세 즈음에 열병을 앓고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59세가 될 무렵에는 나머지 눈마저 시력을 잃었다. 양쪽 시력을 다 잃은 그는 예전 기억을 더듬어 연구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놀랍게도 그가 연구한 논문 850개의 절반이 시각을 잃은 뒤에 쓴 것이다.
 

옛 소련 수학자인 레프 폰트랴긴(사진)은 14세 때 일어난 폭발사고로 시각을 잃었다. 그는 어머니 타티아나 폰트랴긴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수학자가 되었다. 타티아나는 아들의 눈이 되어 수학에 대한 책이나 논문을 읽어 주었다. 수학을 하나도 몰랐기 때문에 합집합 기호 ∪는 ‘위를 향한 꼬리’, 교집합 기호 ∩는 ‘아래를 향한 꼬리’처럼 수학기호를 생김새대로 읽어주었다고 한다.

폰트랴긴은 위상수학에서 쓰이는 여러 개념을 고안했다. 한번 들은 것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암기력이 뛰어난 덕분에 위상수학뿐 아니라 수리물리학과 미분방정식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눈이 사물을 보는 원리

눈은 시각정보를 뇌로 전달한다. 홍채가 동공을 수축 또는 확대시키면서 빛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수정체가 빛을 모아 망막에 상하좌우가 뒤집힌 상이 맺힌다. 여기서 시각정보는 전기신호가 되어 시신경을 통해 뇌로 전해진다. 러시아 과학자인 알렉세이 소신스키는 3차원 사물이 망막에서 2차원으로 맺히기 때문에 우리가 고차원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는 일반인이 가진 편견

모랑이나 오일러, 폰트랴긴처럼 시각장애를 극복한 수학자 중에는 기하학이나 위상수학을 연구한 사람이 많다. 눈이 보이지 않아 사물의 생김새나 구조를 단번에 알기 어려운 그들이, 어떻게 도형에 대해 연구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일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일지도 모른다.

최근 과학자들은 3차원 구조를 파악하는 시각장애인의 능력이 일반인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밝혔다. 심지어는 공간을 상상하는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지난 2008년 미국 하버드대 의대 안이비인후과교실 로피 미라베 박사와 칠레대 컴퓨터과학과 제임 산체스 교수 공동연구팀은 시각장애인과 일반인이 3차원을 인지하는 능력이 어떻게 다른지 실험을 통해 비교했다. 실험참가자들에게 복잡한 구조를 가진 도형을 설명한 다음, 레고로 조립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시각장애인은 일반인과 비슷한 시간 내에 도형을 완성했다. 두 번째 실험에서 연구팀은 방이 23개나 있는 복잡한 구조의 2층짜리 가상 건물을 이용했다.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 실제처럼 문을 여닫거나 이동해 특정 물건을 찾는 것이다. 시각장애인 참가자에게는 노크 소리나 걷는 소리 등으로 문과 복도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 결과 일반인보다는 느렸지만 시각장애인도 물건을 찾는 데 성공했다. 또 여러 번 반복하자 건물의 구조를 외워 물건을 옮기더라도 일반인과 비슷한 시간 내에 찾았다. 시각장애인이 3차원 공간을 인지하는 능력이 일반인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증명한 셈이다.

연구팀은 현실에서는 소리를 들을 뿐 아니라 직접 만질 수도 있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실험 때보다 정확하게 3차원 공간을 파악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시각장애인은 고차원적 상상력이 더 뛰어나

레프 폰트랴긴도 일반 사람도 상상하기 힘든 고차원적인 공간을 연구했다. 이에 대해서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수학적방법학연구실 알렉세이 소신스키 선임연구원은 그가 쓴 책 <;수학으로 묶은 매듭>;에서 “3차원 이상의 고차원은 공간적 상상력으로만 생각할 수 있다”며 “오히려 눈이 보이는 것이 고차원을 상상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폰트랴긴이 일반인에 비해 고차원을 상상하는 일이 자유로웠다는 얘기다.

그 근거로 소신스키는 눈이 사물을 보는 원리를 들었다. 빛이 망막에 맺힐 때 뇌는 3차원 세상을 2차원 이미지로 인식한다. 그래서 사물을 3차원적으로 생각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은 물건을 손으로 만지거나 물건이 움직이는 소리로 생김새를 상상하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물체를 회전시키거나 변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망막에 맺히는 상은 착시를 일으킬 때가 있으므로 3차원 물체에 대해 오해할 소지가 있다고 말했다. 소신스키는 시각장애인이 7차원까지도 상상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맹학교에서 키우는 수학자의 꿈

지금도 여느 학교에서는 미래의 수학자가 꿈을 키우고 있을 것이다. 시각장애 학생들이 모여 있는 맹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난 3월 6일, 한빛맹학교의 한 교실에서는 시각장애 학생들이 한창 수학수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겉표지는 일반 교과서와 똑같지만 비교적 두툼한 시각장애인용 교과서를 펼쳐보니 온통 새하얬다. 글자와 그래프를 눈 대신 손가락 끝으로 읽을 수 있게 점역(점자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점자는 2개씩 3줄로 총 6개의 점으로 돼 있다. 어떤 점이 볼록하게 나와 있느냐에 따라 나타내는 글자가 다르다. 한글이나 알파벳뿐 아니라 숫자와 수학기호도 점자로 나타낼 수 있다. 우리가 교과서를 눈으로 읽듯이 시각장애 학생들은 손가락 끝으로 훑으면서 읽는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이나 계산하는 과정을 점자정보단말기인 ‘한소네’로 적기도 한다. 자판 여섯 개를 두드리면 점자판이 움직이면서 무엇을 썼는지 읽을 수 있고 문서로 저장할 수도 있다. 국내 업체인 힘스인터내셔널이 만든 이 기기로 점자로 친 문서를 일반 문서로, 일반 문서를 점자 문서로 바꿀 수 있다.
 
저학년 시각장애 학생들은 그래프의 개념을 익히기 위해 입체적인 그래프를 만들어본다(왼쪽). 최근 프랑스텔레콤 연구소의 연구팀은 그림을 그리면 선을 따라 진동이 느껴지는 시각장애인용 보드를 개발하기도 했다.

수학을 직접 손으로 만지면서 배우기도 한다. 저학년은 스티로폼에 핀으로 털실을 붙이거나, 철판에 자성을 띠는 줄을 붙여 그래프를 그린다. 고학년이 되면 머릿속으로 그래프를 그리는 연습을 한다.

시각장애 학생에게 함수나 방정식, 행렬은 특히 어려운 분야다. 일정한 규칙이나 연관성이 전혀 없는 알파벳과 숫자가 잔뜩 나오기 때문이다. 이날 삼차방정식 수업에서도 수많은 식을 적는 대신 무조건 외워야 했다.

안승준 교사는 수업 내내 방정식을 외우는 훈련을 시켰다. 예를 들어 y=5x³-4x²+x라는 식이 있다면 ‘y는 오마사일(오, 마이너스, 사, 일)’이라고 외우는 것이다. 역시 시각장애인인 안 교사가 학창시절에 스스로 만든 방법이다.

웬만하면 암산하기 때문에 일일이 필기하고 있던 기자보다 학생들이 훨씬 빨리 답을 내놨다. 오랫동안 식을 암기해온 덕분인지 삼차방정식 여러 개를 외워 계산하는 데에도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비록 눈이 보이지는 않지만 손가락으로 책을 더듬고 점자 자판을 두드리면서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교실을 가득 채웠다. 베르나르 모랑과 레프 폰트랴긴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수학을 연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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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수학동아 정보

  • 이정아(zzunga@donga.com) 기자
  • 겨자씨
  • 이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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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승준 교사
  • 도움

    미국 일리노이대 수학연구실
  • 도움

    러시아 모스크바주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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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merican printing house for the bl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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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텔레콤
  • 사진

    이정아(zzunga@donga.com) 기자
  • 사진

    안승준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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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일리노이대 수학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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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모스크바주립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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