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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자유를 사랑한 수학자 로랑 슈와르츠 탄생 100주년


 
3월 5일은 세계적인 수학자이자 프랑스 지성의 상징으로 존경받는 로랑 슈와르츠(1915~2002)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는 함수의 개념을 일반화하는 이론을 발표해 1950년 프랑스인으로는 처음 필즈상을 받았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와 베트남의 독립을 지원하며 식민지 국민들의 인권 운동에도 앞장섰다. 수학은 물론 사회 활동도 활발하게 했던 그의 삶을 되짚어 보자.

양자역학의 초기 발전 단계부터 물리학자들이 자주 사용하던 디랙 델타 함수는 수학자들에게 골칫거리였다. 이게 이름과 달리 사실은 함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우 유용하지만, 함수도 아닌 것을 가지고 미분과 적분을 논하고 있었으니 수학자들의 눈에는 위험천만해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실수인 변수 하나를 갖는 함수의 그래프를 상상해 보자. 평면 위에 x축과 y축이 있는 평범한 그래프인데, x값이 0에서는 무한히 솟구치지만 그 외에서는 0인 그림을 연상하면 된다. 이때 그래프 아래의 면적은 1이라고 하자. 당연히 이는 연속이 아닐뿐더러 함수조차 아니다. x가 0일 때 함숫값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래프 아래의 면적이 1이라는 조건 때문에 0에서의 값이 아주 큰 무한이 아니고 적당한 무한이라는 뜻이니, 정말 골치 아픈 놈일 수밖에 없다. 큰 무한과 작은 무한을 비교하는 일은 독일의 수학자 칸토어 이후 많은 진전이 있었지만, 어쨌든 다루기 까다로운 건 여전하다.

프랑스 최초의 필즈상

슈와르츠는 이런 골치 아픈 녀석을 포함하는 새로운 수학적인 대상을 도입하려고 했다. 그는 이를 ‘디스트리뷰션’이라고 불렀다. 흔히 일반화된 함수라고도 부른다. 그는 여기에 엄밀한 수학적 구조를 부여하고 다루는 데 성공했다.

슈와르츠의 이 연구는 해석학의 편미분방정식 이론에 새로운 장을 열었고, 물리학이나 공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서 1950년 프랑스인으로는 처음 필즈상을 받았다. 프랑스는 슈와르츠 이후로 전체 필즈상 수상자 중에 단일국가로는 가장 많은 13명을 배출하며, 넘볼 수 없는 수학 강국으로 부상했다.
 

식민지 국가 독립을 외치다

유태인인 슈와르츠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생명의 위협을 받았다. 당시 독일은 ‘인종 청소’를 목적으로 유대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실제 그의 동료들 중에는 체포된 뒤 연락이 두절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로랑-마리 셀리마르땡이라는 가명을 사용하며, 대학에서 근무했는데 다행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발각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 때문에 그는 평생 전체주의(개인의 자유는 억압하고 지도자의 권위만 앞세우는)를 혐오했다.
 

슈와르츠는 한때 사회주의에 심취했다. 사회주의를 따랐던 소비에트 연방의 전체주의 성향 때문에 사상을 바꾸긴 했지만, 외국 여행을 하는 데 제약을 받았다. 특히 미국 방문이 쉽지 않았다. 1950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수학자대회에서 필즈상을 받을 때 주최 측의 탄원과 수학계의 노력으로 겨우 참석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1950년대 프랑스 식민지이던 알제리에서는 공포통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슈와르츠는 일명 ‘오댕 사건’ 때문에 이런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모리스 오댕은 슈와르츠 지도 아래서 박사 학위 논문을 쓰던 알제리 출신의 대학원생이었다. 그는 어느 날 알제리에서 체포된 뒤에 사라졌다. 알제리 독립운동을 하다가 투옥됐고, 모진 고문 끝에 사망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슈와르츠는 프랑스 내에 오댕 위원회를 설립해 진상조사를 계속해서 요구했고, 오댕에게 박사 학위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프랑스 식민지 정책을 바꾸는 사회 운동으로 확대됐다. 1960년 7월에는 슈와르츠와 장 폴 사르트르, 시몬느 보봐르 등 당대 최고 프랑스 지식인 121명이 알제리 독립을 지지하고 프랑스군의 알제리 파병을 반대하는 선언을 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내 극우파가 지식인을 협박하며 대립했다. 슈와르츠의 집도 폭탄 테러를 당했다. 다행히 집에는 아무도 없어 인명 피해를 입지는 않았지만, 자칫 일가족이 몰살당할 뻔한 아찔한 사건이었다. 아들이 납치돼 억류당하는 슬픔도 겪었다. 몸담고 있던 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해임되는 수난도 겪었는데, 국제적인 구명 노력을 통해 우여곡절 끝에 복직할 수 있었다.

슈와르츠는 당시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던 또 다른 수학자인 버트란드 러셀과 함께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인권 상황 개선에도 힘썼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의 비극적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중재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슈와르츠는 베트남에서 국민적 영웅으로 추대받았다.



수학 대중화의 개척자

“수학이 무슨 효용이 있냐고요? 수학 없이는 물리학을 할 수가 없어요. 물리학 덕분에 냉장고를 만들 수 있고요. 냉장고에는 바다가재를 보관할 수가 있는데, 수학자는 그걸 먹고 수학을 더 잘 할 수 있게 되죠. 그래서 물리학에 도움이 되고요. 덕분에 냉장고를 만들 수 있고, 그래서 바다가재….”

여러 곳에서 인용된 그의 대중 강연 내용 중 일부다. 수학 때문에 과학이 발전할 수 있고, 그로 인해 인류의 삶이 개선된다는 메시지를 재미있게 전달한 것이다. 사실 슈와르츠는 명강의로 유명했다. 그는 강의를 듣는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곤 했다. 전문적인 수학 연구에 관한 강의에서도 그랬지만, 교육자로서도 가르침의 즐거움을 널리 알리며 큰 족적을 남겼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슈와르츠의 대중 강연에는 많은 청중이 운집해 귀를 기울였다. 인용된 강의 내용만 봐도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소통하던 슈와르츠의 재기를 엿볼 수 있다.

그는 노년까지 강연과 사회 활동을 계속하며 프랑스 최고의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다.
 


 

2015년 03월 수학동아 정보

  • 박형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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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행

    조가현(gahyun@donga.com) 기자
  • 강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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