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와본 여자고등학교. 남고를 나온 기자는 괜히 쭈뼛거리며 교문을 들어섰다. 그런데 이게 웬일! 교문 옆 경비실에는 남학생이 가득했다. 방문기록을 적는 기자에게 경비아저씨가 이유를 알려 줬다. ‘펜로즈’를 만나러 간 지난 11월 28일은 바로 ‘제103회 인천여고 크로바 예술제’가 열리던 날이었다. 스산한 날씨에도 학교는 왁자지껄 떠들썩한 축제의 열기로 뜨거웠다.
펜로즈가 있다는 2층 회의실에 들어서자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머리에 빨간 공을 단 펜로즈 회원들이 소시지 떡꼬치와 초콜렛 과자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수학동아리가 맞나?’하는 생각이 들 무렵, 한 편에서 친구들에게 열심히 수학 퀴즈를 내고 있는 두 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맞은 편에는 ‘오더리 삼각형 열쇠고리 만들기’, ‘요시모토 큐브 만들기’ 같은 수학 체험을 설명하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많이 어수선하죠. 이것부터 보고 계실래요?” 어색하게 서성거리는 기자에게 펜로즈를 담당하고 있는 송지영 선생님이 엽서 한 꾸러미를 건넸다. 하나 하나 모두 정성스레 그린 손엽서였다. 단순한 퍼즐에서 조금 복잡한 문제까지 다양한 수학퀴즈가 담겨 있었다. ‘이 엽서는 왜 만들었을까?’하는 궁금증이 생길 무렵, 강당으로 학생들을 부르는 방송이 전교에 울려 퍼졌다. 썰물처럼 손님들이 빠져 나갔고, 그제서야 펜로즈와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찾아왔다.
삐걱대던 펜로즈, 톱니바퀴로 거듭나다
펜로즈는 올해 4월 처음 생긴 어린 동아리다. 인천여고에는 이미 ‘ME’라는 오래된 수학동아리가 있었지만, 수학을 좋아하는 모두가 이곳에서 활동할 수는 없었다. 이예빈 학생(2학년)과 이민주 학생(2학년)도 그 중 하나였다.
10명이 모이면 동아리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친구는, 직접 수학·과학 융합 동아리를 만들어 보자며 뜻을 모았다. 먼저 부지런히 동아리 부원을 찾기 시작했다. 어렵사리 2학년 친구 10명, 1학년 후배 9명이 모였고, 송지영 선생님을 담당 교사로 모셔왔다. 동아리 이름도 각자 하나씩 뽑아와 투표로 정했다. 2014년 4월 마침내, ‘펜로즈’의 역사가 시작됐다.
출발은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흐릿했던 동아리의 목표였다. 수학과 과학이 합쳐진 융합 동아리를 만들자고 했지만, 갓 태어난 ‘펜로즈’에겐 버거운 일이었다. 처음 해보는 동아리 운영도 서툴기만 했다.
그래서 하나 하나 맡을 일부터 정하기로 했다. ‘수학동아부’는 <;수학동아>;를 읽고 흥미로운 기사나 퀴즈를 골라오는 임무를 맡았다. ‘토러스 만들기(3월호)’ ‘장미큐브 만들기(5월호)’는 수학동아부가 발굴한 가장 인기 있는 주제다. ‘문제풀이부’는 수학동아부가 가져온 문제를 푸는 일을, ‘EBS부’는 재밌는 수학관련 영상을 찾아오는 일을 했다.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펜로즈는 점차 동아리다워졌다.
즐거운 수학, 함께 나누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경험을 물어보자, ‘봉사활동’을 첫 손에 꼽는 학생이 가장 많았다. ‘수학동아리가 무슨 봉사활동이야?’ 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지만, ‘봉사’는 펜로즈를 가장 잘 나타내는 활동이다. 펜로즈 회원들은 한 달에 한 번 아동센터를 찾아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쳐 주고 있다.
“처음엔 다들 재미 없어 하고 계속 장난만 쳤어요” 수학교사가 장래희망인 김솔(2학년)학생은 처음 아동센터를 찾았을 때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름만 들어도 싫어하는 수학, 흥미를 끌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까 봤던 엽서가 떠올랐다. 손수 만든 수학 엽서는 조금이라도 수학을 재미있게 알려 주기 위한 펜로즈 학생들의 아이디어였다. 어려운 수학도 예쁜 엽서에 담기자 좀 더 쉽게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었다. <;수학동아>;에서 참고한 다양한 체험활동도 큰 도움이 됐다. “수학을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활동을 했더니, 아이들도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김솔 학생의 말처럼, 아이들은 점점 펜로즈 학생들과 함께 ‘놀기’ 시작했다. ‘함께 나누는 즐거운 수학’은 펜로즈만의 독특한 색깔로 자리잡아 갔다.
“혹시 봉사활동 점수나 자소서 때문에 하는 것은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모두 고개를 저을 만큼 학생들은 함께 나누는 즐거움에 푹 빠져 있었다. 때묻은 잣대로 학생들을 바라본 기자가 부끄러워졌다. 정보인 학생(2학년)은 더 큰 꿈을 이야기한다.
“봉사활동대회에 나가보니, 저희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앞으로는 아동센터뿐 아니라 노인복지원 같이 더 많은 곳을 찾고 싶어요.”
수학동아리를 넘어선 경험
인터뷰 동안 기자가 가장 많이 들은 단어는 ‘스스로’와 ‘함께’였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다같이 동아리를 만든 지난 1년이 학생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은 보조 역할만 했다고 표현한 송지영 선생님은 “소극적이었던 학생들이 먼저 스스로 해보겠다고 나서는 모습으로 변한 것”이 지도교사로써 가장 소중한 경험이었다며 “수학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서 성적이 많이 오른 학생도 있다”고 귀뜸했다.
1학기 회장을 지낸 이예빈 학생은 “서로 다른 친구들끼리 처음엔 소통조차 안됐다”며 “회장으로써 모두를 이끌고 나가기가 정말 힘들었다”고 털어 놓았다. 하지만 “다양한 수학활동을 통해 서로 함께 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는 뿌듯함이 곧 따라왔다.
펜로즈 학생들은 이제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민주 학생은 올 여름 세계수학자대회를 찾았다 뜻밖의 경험을 했다. 수학연산프로그램 ‘매스매티카’를 만든 물리학자 스티븐 울프람을 직접 만난 것이다. 처음 보는 프로그램과 과학자였지만 이민주 학생은 이것저것 열심히 물어봤다. 이 모습이 인상 깊었는지 울프람은 직접 이민주 학생과 친구들을 서울대에서 있었던 자신의 강연에 초대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민주 학생에게선 왠지 모를 자신감이 느껴졌다. 간호사가 꿈인 이민주 학생에게 울프람과의 만남은 어떤의미로 남을까?
“한 문제를 풀더라도 모두 다르게 푼다는 점이 신기했다”는 김솔 학생의 말처럼, 수학동아리는 단순히 수학 문제만 풀 것이라 생각해 온 기자에게 펜로즈는 단어 그대로 신선한 동아리였다. 안심하기엔 이르다. 펜로즈 앞에는 아직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함께’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분명 사진 속 펜로즈처럼 활짝 웃는 앞날이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