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규칙한 걸음걸이, ‘랜덤 워크’
‘비틀비틀’. 술 취한 사람들의 걸음걸이는 자신의 몸을 바로 가누지 못하고 이리저리 쓰러질 것 같이 불안하다. 그런데 어디로 갈지 좀처럼 예측하기 힘든 이와 같은 불규칙함 속에도 수학이 있다. 1905년 영국의 수리통계학자인 칼 피어슨은 ‘랜덤 워크’라는 확률 모델★을 제안했는데, 그 모양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의 걸음걸이와 비슷해 한자로는 ‘취보(醉步)’라 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무작위 행보’라고도 부른다.
랜덤 워크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간단한 1차원에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원점에서 출발하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한 칸(+1) 또는 왼쪽으로 한 칸(-1) 이동할 수 있다.(그림❶) 이때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각각 움직일 확률은 모두 1/2로 같다.
만약 원점에서 왼쪽으로 한 칸 움직였다고 하자. -1인 지점에서 다시 왼쪽으로 한 칸 또는 오른쪽으로 한 칸 움직일 확률은 역시 1/2로 같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원점에서 출발한 사람이 1/2의 확률로 움직이게 되는 무작위적인 시행을 반복하면, 그림❷와 같이 뾰족뾰족 불규칙한 그래프로 나타난다.
2차원 평면에서의 랜덤 워크는 어떨까? 평면에서는 원점에서 상하좌우로 총 네 번 움직일 수 있으므로 각각 이동할 확률은 1/4이다. 1차원 랜덤 워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시행을 반복하면 그 모양은 그림❸과 같이 나타난다.
이와 같이 원점에서 출발한 1, 2차원에서의 랜덤 워크는 무작위적인 걸음에 의해 언젠가는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경우가 반드시 생긴다. 그러나 3차원부터는 무작위성이 커져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
[확률 모델★이란, 동전 던지기와 같이 우연한 결과를 통해 나타나는 현상을 수식화한 것을 뜻한다.]
작은 입자들의 랜덤 워크, ‘브라운 운동’
과학에서 랜덤 워크의 또 다른 이름은 ‘브라운 운동’이다. 브라운 운동이란 액체 또는 기체를 이루는 작은 입자가 움직이는 불규칙한 운동으로, 물에 떠 있는 꽃가루의 운동이나 냄새가 퍼져나가는 현상이 그 예다.
브라운 운동은 1827년 영국의 식물학자인 로버트 브라운이 맨처음 발견했다. 당시 로버트 브라운은 물에 떠 있는 꽃가루를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있었는데, 꽃가루에서 나온 작은 입자가 수면 위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움직이고 있었다.
이전의 과학자들은 모두 액체 속에서 움직이는 입자를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생명체로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브라운은 무기물인 유리나 금속, 바위 등을 곱게 갈은 다음 액체에 뿌려 관찰했을 때에도 꽃가루의 움직임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즉, 입자의 움직임이 생물체와는 상관없는 물리적인 현상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190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브라운 운동을 물리학적으로 접근해 불규칙한 움직임의 원인을 밝혀냈다. 꽃가루 입자가 물속에서 불규칙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은 꽃가루 입자들이 주위의 물 분자와 끊임없이 충돌하며 튕겨 나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꽃가루 입자들이 움직이는 평균 거리는 시간의 제곱근에 정비례한다는 성질도 밝혀냈다. 즉, 입자가 4초 동안 움직인 평균 거리는 1초 동안 움직인 거리의 2배가 된다는 뜻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은 브라운 운동과 일정 부피의 기체와 액체 속에 있는 분자의 수인 아보가드로의 수를 연관 지어 추정하는 실험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의 논문 발표 3년 뒤인 1908년, 프랑스의 물리학자 장 바티스트 페렝은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실험을 검증해 그 공로로 192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
입자의 랜덤 워크 현상은 오늘날 태양 내부에서 발생한 빛이 표면까지 도달하는 현상과, 양자 이론까지 과학의 여러 분야에 쓰이고 있다.
랜덤 워크 이론, “주가, 예측할 수 없다!”
주식 시장에서는 주식을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의 상관관계와 회사의 발전 가능성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주식의 가격이 결정된다. 주식의 가격을 뜻하는 주가는 매일매일 시시각각 값이 변하기 때문에, 주가의 변화를 표현한 그래프는 항상 뾰족뾰족하고 불규칙한 형태를 띤다. 어떤 경우도 직선 형태이거나 부드러운 곡선을 띠는 법이 없다.
이처럼 불규칙한 모양의 그래프를 띠는 이유는 주가의 움직임이 ‘무작위’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랜덤 워크 이론’의 핵심이다.
사실 주가의 움직임이 무작위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여러 수학자와 경제학자들의 오랜 연구 결과 덕분이었다. 그 시작에는 프랑스의 수학자 루이 바실리에가 있었다. 1900년 루이 바실리에는 프랑스의 증시 주가의 움직임을 분석한 결과, 주식 시장은 입자의 불규칙한 움직임처럼 무작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때문에 ‘주식 투기의 수학적 기댓값은 0이다’고 설명했다. 바실리에는 주가의 움직임을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과학의 브라운 운동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바실리에의 주장은 당시 학계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가 생을 마친 뒤에 폴 새뮤얼슨이라는 경제학자에 의해 재조명 되었다. 새뮤얼슨은 ‘경제학을 수학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경제학의 현상을 수학적으로 이론화 한 미국의 경제학자이다. 그는 바실리에의 뛰어난 이론을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실리에 이론의 실수를 보완해 ‘기하 브라운 운동’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주가가 0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던 바실리에의 주가 모형을 보완한 것이다. 수학자에 의해 발견된 주가의 무작위성이 경제학자에 의해 좀 더 체계적이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이론으로 완성된 것이다. 이후 새뮤얼슨의 ‘기하 브라운 운동’은 현대 금융공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탄자니아 하드자 부족의 이동, ‘레비 워크’ 따른다!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북부 지방에는 수렵채집 방식으로 생활하는 ‘하드자 부족’이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매일 먹을거리를 찾아 먼 거리를 걷는 전통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들의 이동 경로를 조사한 결과, ‘레비 워크’로 불리는 수학적 패턴을 따른다는 사실이 발표됐다.
레비 워크란 랜덤 워크의 변형된 형태로, 한 지역에서 짧은 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뤄진 다음 다른 지역으로 장거리 이동이 일어나는 이동 패턴이다. 이에 랜덤 워크와는 조금 다르게 걸음걸이가 일정 구간에 모여 있다가, 먼 곳으로 이동해 다시 모여 있는 형태를 띤다. 레비 워크는 프랑스의 수학자 폴 레비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먹이를 찾아 이동하는 동물의 이동 패턴을 찾는 것을 포함해 광범위한 분야에 쓰이고 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 인류학과 연구팀의 실험은 매우 간단하다. 연구팀은 하드자 부족의 이동 패턴을 알아보기 위해 먼저 그들의 손목에 GPS가 장착된 시계를 채운 후, 사냥과 채집을 위해 이동할 때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그 결과, 부족들의 움직임이 레비 워크 형태를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부족들은 의식적으로 사냥을 위해 레비 워크의 패턴을 따라 움직이는 걸까? 연구팀은 “하드자 부족의 움직임에서 발견된 레비 워크 패턴은 이미 상어나 꿀벌과 같은 동물의 이동 패턴에서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사냥과 채집을 하는 동물들의 본능적인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레비 워크라는 수학적 패턴을 통해 동물과 사람의 움직임과 같은 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연구팀은 “인간의 이동 패턴이 밝혀지면서 인류학자들은 과거에 인류가 원료를 어떻게 운반했는지, 마을과 같은 거주 영역이 어떻게 확대되었는지 등 인류의 생활 모습을 분석하는 데에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의 연구 계획에 대해 기대감을 보였다.
엑셀로 ‘랜덤 워크’ 그래프 그려 보기!
지금까지 랜덤 워크의 수학적인 개념과 의미는 물론이고, 과학과 경제학, 인류학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는 사례도 살펴보았다. 랜덤 워크 그래프를 직접 그려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1차원 랜덤 워크 그래프를 쉽게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음 과정을 따라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