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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형 교수의 수학 산책] 수학자의 여행


수학 공부는 수학 세계를 탐험하는 여행이다. 실제로 수학자의 삶에는 물질세계로의 여행과 동시에 다양한 문화경험이 뒤따른다.
어째서일까? 세계 속에 사는 수학자의 고향은 어디일까?


수학자의 자녀교육


2009년 여름,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개최된 정수론학회 마감 만찬 도중의 일이다. 피에르 들리뉴 교수가 그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학이 인생의 전부인 그에게는 장성한 두 딸이 있는데, 둘 다 수학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 종종 수학 공부를 도와 주곤 했지만, 어느 문제든지 적어도 세 가지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습관이 있어 아이들이 꽤 괴로워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그저 정답을 말해 주길 원했는데 말이다.

들리뉴 교수는 일생 동안 수학의 여러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는 1978년 학자들이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는 필즈상을 받았고, 2005년에는 자신의 출신지인 벨기에에서 후작 칭호를 받았다. 2013년에는 수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아벨상을 수상했다.

그는 프랑스 고등과학원에서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일하다가 미국 프린스턴에 있는 고등과학원으로 자리를 옮겨 은퇴할 때까지 수학 연구에 매진했다. 따라서 그의 딸들은 완전히 미국 문화 속에서 자랐고, 지금도 미국에 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딸 모두 상당한 벨기에 애국자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벨기에를 방문하길 좋아했고, 지금도 틈만 나면 벨기에에서 휴가를 지낸다고 한다. 들리뉴 교수는 웃으면서 “제가 벨기에에 대해서는 세 가지로 다르게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자식은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거세게 도망쳐 나오는 경우가 많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났던 재미교포 2세 중에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젊은이가 많았다. 어쩌면 그 젊은이들 역시 부모에게서 한국 전통의 의미에 관한 설명을 수없이 듣고 자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모였던 약 15개국 출신의 수학자들은 들리뉴 교수의 이야기에 모두 공감했다. 그들은 영국인, 한국인, 일본인, 독일인, 브라질인, 유럽인, 아시아인이기 이전에 하나 같이 ‘수학자’라는 정체성을 공통으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녀 중에 부모를 따르는 아이는 수학을 따라하게 되고, 부모에 반항하는 아이는 수학에 반항하는 듯했다.


수학은 세계 유산

영국의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가 1960년대에 제작한 다큐멘터리 <;문명>;은 책으로 출판돼,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대학 교재로도 사용되었다. 중세유럽에 관한 대목에서 종교가 사회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보여 주는 예로 캔터배리 대주교의 국제화를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모든 국민이 중요시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자리였던 만큼 객관적인 실력 말고는 따로 따질 만한 자격 요건이 없어서 대주교의 국적은 상관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수학의 중심지에서도 수학자의 국적이 중요시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교수 채용, 대학원생 입학전형, 연구지원 심사과정 등에서 수학 실력 외의 조건은 무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 때문에 수학자들은 상당히 자유롭게 전 세계에서 직장을 구할 수 있으며, 연구 활동과 동시에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할 기회를 갖는다. 나 역시 수학을 하다 보니 3개 대륙에서 직장 생활을 했고, 많은 나라와 도시를 방문하게 됐다.

이러한 국제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시설은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한다. 프랑스 파리 남부의 고등과학원(IHES), 독일 본에 있는 막스플랑크연구소(MIPM), 영국 케임브리지의 뉴턴연구소(INI), 일본 교토의 수리과학연구소(RIMS), 그리고 서울의 고등과학원(KIAS) 등은 이런 학문적 교류를 지원하는 목적으로 설립된 기관이다.

덕분에 수학자는 여러 고장에서 조용히 생활하며 하루 몇 시간씩 일할 공간을 마련해 주는, 일종의 고향 같은 친근한 장소를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 여러 나라에 대한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도 갖는다.

수학이 보편적인 지위를 인정받은 것은 오늘날의 일만은 아니다. 고대 문명의 중심지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600~700년 동안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운영을 지원했다. 이 도서관은 당시 전 세계의 과학사를 모아놓은 서고였을 뿐 아니라, 과학 교류와 연구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 당시 도서관을 거쳐 간 수학자 중에서는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 그곳에는 상주하는 수학자 이외에도 현재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 시리아, 리비아, 모로코, 이란, 이라크와 같은 나라가 된 여러 지역으로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을 갖고 모인 사람들이 많았다.

도서관의 창건은 제국의 국제화를 원하는 알렉산더 대제의 선견지명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마케도니아로부터 인도 서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하나의 제국을 세우고자 했는데 말년에 페르시아에 머물면서 진정한 국제사회의 창조를 겨냥하는 많은 사업을 벌이다가 결국 요절했다고 전해진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군사 정복과 국제화를 결부시켜서 생각하기는 힘들다. 알렉산더 제국은 조각나고 말았지만, 국제사회라는 개념이 훨씬 현실에 가까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수학처럼 이해관계를 초월한 보편적 원칙으로 매개되는 것만은 물론 아니다. 마케도니아 제국의 자취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중동 지역을 지나 보면, 국경과 분쟁이라는 정치적 신기루를 넘어서서 경제와 문화 교류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두바이 공항과 같은 문명의 교차점을 지나면 14~15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안내원들이 다색인종 사업가들의 편의를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언젠가 런던 북쪽의 집으로부터 히드로 공항으로 가는 길에 어느 택시회사 사장의 한탄을 들은 적이 있다.

“요새 와서는 메카 순례를 가도 종교적인 분위기를 찾기 힘들어요. 오랜 시간 줄서서 카아바를 배회하며 기도하고 나오면 가족들에게 끌려 최신 에어컨 시설을 갖춘 쇼핑몰로 직진하지요.”

파키스탄 출신인 그는 또 메카에 가면 사우디 사람들의 오만과 바가지 장사에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도 견디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마음의 고향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오버볼파흐라는 작은 마을에 한 수학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소는 1년 내내 학회장소로만 사용된다. 대체로 한 주제 당 일주일을 할당받아서 여러 나라 수학자들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먹고 자고, 강연하고 토의한다. 저녁때는 맥주도 한 잔 마시면서 밤과 숲의 향기 속에서 수학 이야기를 끝없이 나눈다.

상주하는 교수가 없기 때문에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비서 몇몇뿐이다. 입구 옆 사무실에는 방문객 담당관 아네테 디시 여사가 근무한다. 그녀는 이 마을에서 태어난 일생 동안 이 곳을 떠나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아들은 자동차수리공인데, 한국인인 나를 만나자 아들이 현대자동차를 좋아한다며 말을 건넸다.

“제 아들은 당신들처럼 머리가 좋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고등학교를 나오고 일을 시작해서 이제는 사업이 잘되고 있습니다. 옆 마을에 살고 있어 주말이면 보곤 하지요.”

디시 여사는 30년 넘게 이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수학인물상을 잘 알고 있다. 8~9년 전, 여름 산술기하학회 기간 중에 그녀가 나를 마을 중심에 있는 기념품 가게까지 차로 데려다 준 적이 있었다. 그녀가 데려다 주는 내내 부모, 자식, 날씨, 동네의 시냇물 등 얘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며 나에게 “먼 데서 온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도와 드리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지요. 은퇴할 때까지 연구소에서 일해야지요.”라고 말했다.

그날 나는 오후 늦게 바이에른 특산 나무인형 몇 개를 사가지고 나른한 시냇물 길을 따라 자그마한 교회 묘지 앞까지 걸어 나왔다. 웅장한 보리수 그늘에서 몇 분 기다리자, 약속대로 디시 여사가 물뿌리개를 들고 울타리 사이로 튀어 나왔다. 일주일에 한 번은 조부모 묘지 주위의 꽃밭을 가다듬고 간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터전을 다른 이와 쉽게 공유하기도 한다. 그 덕에 수학자는 다른 사람의 고향을 엿보면서 조금씩 자기 마음의 고향을 만들어 가는지도 모른다. 덜컹거리는 차를 타고 산길을 올라갈 무렵, 아름다운 석양이 흑색 전나무 삼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2014년 01월 수학동아 정보

  • 김민형 교수
  • 진행

    장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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