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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기하학의 방향을 바꾼 동양의 작은 거인, 천싱선

박형주 교수의 수학자 이야기


20세기 최고의 기하학자로 손꼽히는 천싱선은 지난 2004년에 9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위대한 기하학자였을 뿐 아니라, 젊은 수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최고의 스승이었으며, 세계 도처에 명성 있는 수학연구소를 설립한 탁월한 리더이기도 했다.


중국 지성사의 자랑

천싱선은 청나라 시대에 태어나 만 1살 때 공화국으로 바뀐 중국에서 자라며 교육을 받았다. 난카이대를 거쳐 칭화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중국에서 수학분야에서 수여된 역사상 최초의 석사학위라고 기록되어 있다. 천싱선은 이후 독일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수학자 대부분의 삶은 미국에서 보냈다. 시카고대와 버클리대에서 30여 년을 근무하고 은퇴한 뒤에는 중국에 돌아와 중국 수학을 현대화 시키는 데 여생을 바쳤다.

1957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양전닝은 천싱선의 어릴 적 친구였는데, 이 둘은 학자로서 일가를 이룬 후에 고국인 중국에 돌아와 후학을 기르며 과학연구의 씨앗을 뿌린 선각자로 중국인들의 지극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80년대에 중국을 방문해 그의 모교인 난카이대에 수학연구소를 설립하던 시절에는 중국의 모든 아이들이 그의 이름을 알았다고 한다. 이뿐만 아니라 그가 어디를 가든 카메라가 그를 따라가며 톱 스타를 대하는 것 같았다고 하니, 오늘날의 아이돌 스타보다 더한 인기였던 모양이다.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천(Chern)’이라고 하면 바로 천싱선을 가리킨다. 그의 성인 진(陳)은 중국에서는 흔한 성으로 ‘Chen’으로 쓰는 것이 보통인데, 그가 1934년에 독일로 유학가면서 이런 방식으로 표기한 모양이다.

언젠가 들은 우스갯소리 중에 중국의 진(陳)씨 성을 가진 어떤 대학원생 이야기가 있다. 이 학생은 유학을 가기 위해 여권을 신청하면서 그의 이름 영문 표기를 ‘Chern’으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전해들은 지도교수가 그를 불러 호되게 야단을 치며 당장 ‘Chen’으로 되돌리도록 했다는 것이다. 주눅 들어 연구실을 나서는 학생의 뒤에 대고 중얼거린 교수의 말이 “이 세상에 Chern이라는 성을 쓸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인데, 감히 주제를 모르고….”였다는 것이다. 가히 중국인들 사이에서 그에 대한 존경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기하학의 역사를 새로 쓰다

천싱선은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나서, 파리에서 프랑스의 수학자 카르탕 밑에서 잠시 연구를 한 뒤에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공산당의 집권 때문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에서 연구하게 된다.

1940년대는 그에게 수학자로서 인생에 중요한 시기였는데, 이 시기에 그는 미분기하학의 역사에 두고두고 남을 주요 업적을 쌓았다. ‘가우스-보네 정리’의 우아한 증명을 발표하며 ‘특이류’라는 개념을 도입했는데, 이 기하학적 불변량은 이제 ‘천류(Chern class)’라고 불린다. 이 개념은 미분기하학을 넘어서서 위상수학과 대수기하학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많은 수학자들의 집중적인 후속 연구를 통해 현대 기하학에서는 사고의 주요도구로까지 여길 정도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었다.

1970년대에는 당시 젊은 수학자 제임스 해리스 사이먼스와 함께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의 결과는 지금은 ‘천-사이먼스 이론’으로 불리며 이론물리학의 게이지 이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사이먼스는 천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고 평생 그를 스승이자 친구로 여겼는데, 이 영특한 젊은 수학자는 그 뒤에 투자분야에 뛰어들어 큰 부자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 최고의 거부인 이건희 회장보다 더 부자가 된 사이먼스는 그의 스승이 버클리에 세운 수리과학연구소에 상당한 기부를 해서 천 강당(Chern Hall)이 건립되는 데 기여를 했다. 뿐만 아니라 사이먼스는 많은 젊은 수학자들이 연구 방문할 수 있도록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2010년부터 세계수학자대회 개막식에서 필즈메달과 함께 주요 수학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수여되는 천 메달의 상금 50만 달러도 대부분 그가 지원한다.

바로 이 제임스 해리스 사이먼스가 2014년 8월 13일 저녁에 세계수학자대회 대중 강연을 하러 서울에 올 예정이다.

"난 일생 동안 딱 한 가지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수학입니다.” _천싱선

게이지 이론
★ 양자역학과 특수상대성이론을 결합한 양자장론에서 쓰이는 이론으로, 대칭과 관련이 있어 수학자들이 많이 연구한다.

위대한 비전을 가진 리더

천싱선은 세계 도처에서 지내며 족적을 남겼고, 젊은 수학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존재였다. 또 여러 개의 수학연구소를 건립하는 데 기여했다.

1982년에는 미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버클리에 수리과학연구소(MSRI)를 건립해 초대 연구소장으로서 그 기틀을 닦았는데, 이 연구소는 이제 세계 최고의 수학연구소 반열에 올라 있다. 또한 대만의 타이완에 위치한 중국 중앙 연구원 소속의 수학연구소도 그가 40년대에 설립해 당대 중국의 주요 수학자를 길러낸 곳이다.

1984년에는 중국 난카이대에 난카이 수학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이 연구소는 지금은 ‘천 수학 연구소’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80년대에 휠체어를 타야 했던 그를 위해서 중국 정부는 연구소 바로 옆에 기거할 수 있는 집을 지어 그가 연구소에 오가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그를 극진히 예우한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연구소 건립이 여러 번이나 가능했던 이유는 물론 천의 세계적인 명성과 그의 강력한 설득력 때문이었다. 말년에 천은 그의 생전에 중국에서 세계수학자대회가 개최되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이에 당시 국가주석이었던 장쩌민에게 호소해 결국 2002년 베이징에서 세계수학자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고, 대회 당시 그는 명예조직위원장을 지냈다. 2년 뒤인 2004년에 천싱선은 사망했지만, 이 대회는 중국 수학을 획기적으로 세계화하는 데 기여했다.

필자는 유학생 시절에 천을 만난 적이 있다. 군복무를 위한 2년여의 휴학을 마친 뒤 막 버클리로 돌아온 1993년이었다. 당시 대학원 담당 부학과장이던 롭 커비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누군가 노크도 없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놀란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커비 교수의 태도였다. 그렇게 빠를 수 있을까 싶은 속도로 의자에서 일어난 그는, 문을 박차고 들어온 동양인 노신사 앞에서 마치 잘못을 한 아이처럼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서 있었다. 바로 이 노신사가 세기의 기하학자인 천싱선이었다. 그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는 훌륭한 위상수학자 커비에게는 천싱선이 감히 얼굴도 쳐다보기 힘은 위대한 수학자였던 것이다.

84세의 나이에도 자신이 연구한 것을 미국수학회지에 실을 정도로 끊임없는 지적 작업에 몰두했던 이 위대한 학자에 대한 존경의 정도를 목격하고, 동양인으로서 자부심까지 느꼈던 그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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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수학동아 정보

  • 박형주 교수, 2014 세계수학자대회 조직위원장
  • 사진

    포토파크닷컴
  • 사진

    위키미디어
  • 진행

    장경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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