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39,571,092,834,760,116. 일, 십, 백, 천, 만, … 보통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읽기조차 힘든 큰 수. 무려 스무 자리 숫자인 이 수는 첫 자리가 천 경이다. 그런데 보기만 해도 아득하고, 웬만한 계산기로도 계산하기 벅찬 이 수를 자유롭게 암산할 수 있는 암산의 달인들이 있어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미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암산 왕’ 으로 유명해진 이정희 선생님과 ‘암산 신동’ 의정부중앙초등학교 6학년 전민석 군이다.
암산 왕 vs 암산 신동
5월 3일 화창한 봄날, 암산 왕 이정희 선생님과 암산 신동 전민석 군을 만난 곳은 서울의 한 스튜디오. 두 사람은 이미 SBS TV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출연한 일을 계기로 아는 사이여서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정희 선생님과 민석 군이 처음 방송을 함께한 것은 지난 2월. 초등학교 6학년 민석 군이 암산 왕 이정희 선생님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방송 당시 두 사람은 천경 자리 숫자 15개를 더하는 암산 대결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 정답을 맞혔지만, 속도에서는 이정희 선생님이 조금 더 빨랐다. 이 선생님은 30초 만에 암산을 마쳤다. 천 경 자리 숫자 15개의 덧셈을 필기도구 없이 암산만으로 할 수 있다니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
이정희 선생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산 11단을 보유한 최고의 암산 실력가다. 민석 군 역시 2010년 주산올림피아드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해 막강한 실력을 가진 국가대표 암산 신동이다. 방송 이후 이정희 선생님은 현재 ‘놀라운 대회 스타킹’ 에서 ‘역전의 공부킹’을 맡아 초등학생 9명을 선발해 특별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5월 14일 방송에서는 한 달 동안 특별 수업을 받은 학생을 공개했는데, 100일 수업을 마친 뒤 학생들의 실력이 얼마나 달라질지 그 결과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암산의 비법, 주산!
암산 왕 이정희 선생님이 말하는 암산의 비법은 바로‘주산’이다. 주산이란 주판이란 도구를 이용해 수를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암산을 하려면 반드시 주판을 이용한 주산 훈련이 필요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언제부터 주산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민석 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서 그러시는데,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숫자를 좋아했대요. 달력이나 물건에 있는 숫자를 보고 읽곤 했다고 해요. 암산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했죠. 그때 주산을 알게 됐으니까 벌써 5년이 넘었네요. 선생님은 언제부터 주산을 시작하셨어요?”
“저는 초등학교 3학년 특별활동 시간에 주산을 처음 알게 됐어요. 그러고 보니 민석 군보다는 조금 늦게 주산을 시작했네요. 특별활동 시간이 끝나고 선생님께서 본격적으로 주산공부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하셨죠. 그때부터 선수 반에 들어가 주산을 공부했어요. 5학년 때 당시 최고단수인 8단에 합격했고, 전국대회에서 상도 받았죠. 당시에는 주산 전국대회가 지금보다 활성화돼 있어서 전교생 모두가 알 만큼 유명해졌어요.”
두 사람 모두 초등학교 때 주산과 인연을 맺어 지금은 암산으로 유명한 사람이 됐다. 방송이 나간 이후 인기를 실감하는지 민석 군에게 물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암산 신동’ 이라고 불러줘요. 덕분에 친구들과 더 많이 친해졌어요. 수업시간에는 친구들이 모르는 것을 자주 물어봐서 그때마다 친구들을 도와주기도 해요.”
암산 신동 민석 군은 인기만 많은 것이 아니라 실력 또한 우수하다. 가장 좋아하는 과목인 수학뿐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우수한 실력을 자랑한다. 그 비결은 뭘까? 암산 왕 이정희 선생님이 대답했다.
“그건 아마도 암산을 통해 민석이가 집중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주산훈련을 하면 빠르고 정확한 계산능력을 갖출 뿐 아니라 집중력도 기를 수 있거든요. 또 집중력은 물론이고 암기력, 판단력 등을 키우며 두뇌를 계발하는 데 도움이 돼요.”
계산은 계산기로 하면 되지 굳이 암산을 할 필요가 있느냐고 생각했던 기자의 생각을 바꾸는 대답이었다. 암산은 계산뿐 아니라 더 폭넓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암산으로 사칙연산 모두 가능해
암산은 덧셈만 가능한 걸까? 방송에서는 큰 수의 덧셈만 계산하던데, 뺄셈이나 곱셈, 나눗셈도 암산으로 될지 궁금했다. 이정희 선생님이 답변했다.
“물론이죠. 사칙연산뿐 아니라 제곱근의 근삿값을 구하는 것까지 가능해요. 뺄셈은 덧셈의 역연산이기 때문에 덧셈의 원리를 이용해 계산하죠. 또 곱셈은 덧셈으로 바꿀 수 있으니까 덧셈원리를 확장해암산으로 할 수 있어요. 같은 원리로 나눗셈은 곱셈의 역연산이니까 나눗셈도 암산이 가능하겠죠?”
암산으로는 덧셈만 되는 줄 알았는데, 사칙연산 모두 가능하다니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기자가 직접 확인해보기 위해 선생님에게 곱셈문제를 냈다. 간단한 세 자리 수와 두자리 수의 곱셈 456×82를 암산으로 답하는 문제다. 2~3초가 지났을까? 선생님은 지체 없이 37,392라고 답을 말했다. 계산기만큼 빠른 속도다. 어떻게 암산으로 곱셈도 가능한지 그 원리를 선생님에게 들어봤다.
“학교에서 곱셈을 계산할 때는 보통 세로로 숫자를 써서 필산으로 해요. 일의 자리부터 곱셈을 해 10이 넘으면 자릿수를 올리는 방법을 쓰죠. 10이 넘을 때마다 자릿수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실수할 가능성이 많아요. 하지만 주판을 이용할 때는 곱셈을 덧셈으로 풀어서 계산합니다. 또 필산과는 다르게 일의 자리부터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맨 앞의 자리부터 계산하고요.”
이정희 선생님은 이처럼 사칙연산의 기본 원리를 토대로 주산을 이용하면 복잡한 계산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자연수의 암산 외에 분수나 소수의 암산도 기본적인 원리를 확장하면 모두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암산 잘하면 수학 잘할까?
인터뷰를 마쳤지만 여전히 암산을 잘하는 것이 수학을 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인가에는 의문이 남았다. 그래서 암산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을 서강대 수학과 정순영 교수에게 들었다. “계산은 수학의 한부분이기 때문에 계산을 수학의 전부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암산을 잘하는 것이 수학을 하는 데 도움이 되겠죠. 특히 계산기나 컴퓨터를 쓸 수 없는 상황에서 민첩하게 계산해야 할 때 암산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 초등학교 수학에서는 계산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초등학교 때 암산을 잘한다면 수학에 자신감을 얻을 수 있죠. 암산을 잘한다고 반드시 수학을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