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진행자도, 대본도, 정답도 없어요! ‘아무도 안 보면 물건을 훔쳐도 될까?’ 같은 질문을 놓고 어린이끼리 토론하는 EBS TV 프로그램 ‘어린 철학자’ 이야기예요. 이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지현 PD를 만났어요.
벽 뒤에 숨은 어른들, 토론은 어린이 몫!
어린이에게 질문할 권리를 돌려주고 싶었어요.” 이지현 PD에게 어린이 철학 토론 프로그램을 만든 까닭을 묻자 돌아온 답이에요. ‘어린 철학자’는 2026년 3월 첫선을 보였어요. 어린이 여섯 명은 짧은 애니메이션을 함께 본 뒤 토론을 시작해요. 옳고 그름부터 존재의 의미, 아름다움과 예술까지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지요. 애니메이션 마지막에는 정답 없는 질문이 나와요. 어린이들이 저마다 생각을 내놓으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대화도 점점 깊어져요.
‘어린 철학자’의 토론에는 어른 진행자가 없어요. 카메라 감독과 PD, 작가 등 제작진도 벽 뒤에 숨어 보이지 않지요. 어린이들이 어른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안하게 얘기하도록 만든 거예요. 제작진은 되도록 토론에 끼어들지 않아요. 대화가 한참 동안 제자리를 맴돌 때만 새로운 질문을 던지지요. 이 PD는 “어린이들이 서로 ‘그건 어떻게 생각해?’라며 제작진이 하려던 질문을 먼저 꺼내면 무척 반갑다”고 말했어요.
‘어린 철학자’에는 대본도 없어요. 출연자들은 촬영장에서 처음 토론 주제를 들어요. 찬성과 반대 입장을 미리 정하지도 않아요. 토론하다 보면 의견이 자연스럽게 나뉘고, 친구 말을 듣고 생각을 바꾸는 어린이도 있어요. 이 PD는 “어린이들은 토론 중에 생각을 바꿔도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어른들도 이런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어요.
철학은 어른도 어렵게 느끼는 학문이에요. 이 PD가 어린이와 철학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 PD는 대학에서 철학을, 대학원에서 다큐멘터리를 공부했어요. EBS에 들어가서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지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뒤에는 어린이 프로그램 ‘딩동댕 유치원’ 제작을 맡았어요.
이 PD는 아이를 키우며 생긴 고민을 방송에 담았어요. 자녀가 같은 반 친구를 이해하기 어려워했는데, 그 친구에게 자폐성 장애가 있었어요. 이 PD는 ‘딩동댕 유치원’에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별이’를 등장시켰어요. 휠체어를 타는 ‘하늘이’, 다문화 가정에서 자란 ‘마리’도 나왔지요. 모두 그동안 어린이 프로그램에서 보기 드물던 캐릭터예요. 이 PD는 세 캐릭터로 ‘어린이라면 누구나 권리가 있고 존중받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어요.
이 PD는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었어요. 어린이에게 권리를 알려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어린이 스스로 자기 권리를 요구할 힘을 길러 주고 싶었지요. 자기 권리를 요구하려면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생각하고, 자기 생각을 말할 수 있어야 해요. 이 PD는 철학이야말로 스스로 생각하고 말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이라고 여겨 ‘어린 철학자’를 만들었답니다.
“AI 시대일수록 철학이 필요해요”
인공지능(AI)이 척척 답을 내놓는 시대에 왜 철학이 필요할까요? 어린 철학자들은 어떤 대답으로 PD를 놀라게 했을까요? 이지현 PD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어요.

같이 생각해 봐요!

Q. 토론 주제는 어떻게 정하나요?
주제를 미리 정해 두지 않고 여러 아이디어를 펼쳐 놓아요. 철학의 기본 주제부터 사회에서 의견이 갈리는 문제까지 다양하죠. 질문을 고를 때는 어린이가 관심을 가질 만한지, 정답이 없는지, 생각하는 방법 자체를 돌아볼 수 있는지를 따져요. 철학 연구자와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함께 고민해 줘요.
Q. 어린이의 대답에 놀란 적이 있나요?
어른에게 어려운 질문도 어린이는 아주 간단히 답할 때가 있어요. ‘AI 시대에 인간의 쓸모는 무엇일까?’ 물었더니 “난 살아 있잖아”, “난 달리기를 잘해. 그게 내 쓸모야”란 답이 나왔어요. 순수함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죠. ‘AI가 사람보다 더 똑똑해지면 사람만 할 수 있는 건 뭘까?’ 묻자 “기계는 계산을 잘하지만 사람은 용기를 낼 수 있어”라고 말했고요. 정보나 지식은 어른이 더 많겠지만, 어린이의 꾸밈없는 대답이야말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알려줘요.
Q. AI 시대에도 철학이 중요할까요?
AI는 답을 빠르고 효율적으로 내놓지만, 언제나 옳거나 공정한 답을 내놓지는 않아요. AI의 답이 누군가를 소외하지는 않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맞는지 살펴봐야 하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따져 보며 판단 기준을 세우는 것, 바로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이에요. AI에게 무엇을 맡기고 어디에 쓸지 정하려면 내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아야 해요. 철학은 판단 기준을 세우고 내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도구예요.
Q. 철학할 때 토론을 하면 무엇이 좋나요?
혼자 생각하다 보면 내 생각 안에서만 맴돌 수 있어요. 친구와 이야기하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의견을 만나 생각이 바뀌기도 해요. 토론하면서 내 생각을 흔들어 보고, 다시 세워 보는 경험을 해 보길 바라요.
Q. PD님은 어떤 어린이였나요?
‘왜?’라고 자주 묻는 어린이였어요. 누가 무엇을 하라고 하면 “왜 해야 해요?”, “이건 왜 이래요?” 하고 물었어요. “그냥 해”, “원래 그런 거야” 같은 말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고요. 어린이 프로그램 PD가 된 뒤에도 늘 “왜 어린이는 안 돼?”라고 물었어요. ‘어른도 어려운 철학을 어린이가 어떻게 하겠냐’는 편견을 깨고 싶었고요. 저처럼 질문하는 어린이를 응원하고 싶어서 ‘어린 철학자’를 만들었어요.
Q.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나요?
종교에 관한 질문을 다뤄 보고 싶어요. 성교육이나 학교폭력, 아동 학대처럼 어린이의 삶과 가까운 문제도 이야기하고 싶고요. 모두 어려운 주제지만 ‘어린이는 몰라도 돼’ 하고 감추고 싶지는 않아요. 어린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안전하게 이야기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어요.
Q. 새로운 이야기는 어디에서 찾나요?
저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한때는 제 삶이 너무 평범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알고 보니 평범한 일상에도 이야깃거리가 많더라고요. 아이가 “우린 죽으면 어디로 가?”라고 물은 일, 제가 어릴 때 겪은 일도 모두 방송 재료가 됐죠. 여러분도 일상에서 겪는 일과 감정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