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저 선이예요. 이렇게 편지를 쓰려니 왠지 쑥스럽네요. 오늘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연필을 들었답니다….’
어린이 스트레스, 왜 생기는 걸까?
엄마, 전 요즘 속이 답답하고 머리도 자주 아파요. 엄마는 공부하기 싫어서 꾀병을 부리는 거라고 하시지만 사실 정말 아프거든요. 특히 엄마가 공부 좀 하라고 잔소리를 할 때마다 두통이 심해져요.
갑자기 우울하거나 눈물이 날 때도 있어요. 친구들에게 물어 보니 다들 비슷하대요. 혹시 해서 인터넷을 찾아봤더니 스트레스라고 해요. 어린이도 스트레스를 받는대요. 그것도 무척 많이요.
스트레스는 무엇일까?
스트레스는 크게 ‘신체, 심리적 안정을 위협하는 외부의 힘’이자 ‘그런 환경 속에서 적응하려는 상태’로 정의한다. 원래 스트레스는 야생에서 살았던 인류가 천적 앞에서 쉽게 도망치거나 싸우기 위해 온몸을 긴장시키는 행위에서 비롯됐다. 포식자를 피하기 위한 생존본능인 셈이다. 이 때문에 적당한 스트레스는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최근에는 외부에서 오는 압박 그 자체를 스트레스로 보기도 한다.
어린이 스트레스의 이유
어린이들은 생활환경이 갑자기 바뀌거나, 나이를 먹을수록 늘어나는 주변의 기대 등으로 인해 어른 못지않은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는 상태다. 특히 ‘일상적 스트레스’의 반복에 약한 특징이 있다. 일상적 스트레스는 평소에 겪는 사소하지만 마음에 부담이 가는 사건을 말한다. 부모님의 잔소리, 친구와의 다툼, 성적 문제 같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사건이 동시에 여러 개 일어나면 누군가의 죽음 같은 큰 사건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어린이 스트레스, 지금 어떤 상태?
얼마 전부터 초등학생이 학업 스트레스로 자살했다는 기사가 간간이 나오잖아요. 정말 무서운 건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거예요. 저도 시험 성적이 떨어져서 많이 혼나면 저렇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돼요. 그뿐만 아니에요.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는 되기 싫지만, 가끔 물건을 부수거나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이것도 다 스트레스 때문일까요?
잠깐! 스트레스는 호르몬 때문에 생긴다?
스트레스 상황이 되면 뇌의 시상하부가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킨다. 여기서 나온 ‘부신피질자극호르몬방출호르몬’이 뇌하수체를 자극해 ‘부신피질자극호르몬’을 내고, 이 호르몬이 다시 부신에 도착해 스트레스 호르몬인 ‘당질 코르티코이드’를 만들게 한다. 코르티솔이 대표적인 스트레스 호르몬이다. 부신이 코르티솔을 분비하면 몸은 긴장되고, 심할 경우 두통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
100명 가운데 2명은 ‘정신이 힘들어요’
한국건강보험공단과 통계청이 2007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7~19세의 아동·청소년 가운데 정신질환을 겪고 있는 수는 100명당 2.08명꼴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 때문에 힘들어 하는 걸까? 2011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전국 초등학생 4~6명 246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스트레스의 원인은 학업, 진로, 외모, 부모와의 관계 순으로 나타났다.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문제가 초등학생의 정신을 괴롭힌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초등학생 가운데 자살 계획을 세워 본 어린이의 비율은 전체의 13.7%, 실제로 시도해 본 비율도 2.7%나 됐다.
어린이 스트레스가 일으키는 문제
또래 집단과의 단절
친구들과의 좋은 관계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건강하게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어린이는 우울, 폭력 같은 문제행동을 일으키기 쉬워 심할 경우 친구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다시 스트레스를 받는 악순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인터넷 중독, 폭력 등으로 확대
스트레스를 발산하려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거나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어린이들도 있다. 가족이나 친구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 인터넷과 게임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여러 연구에서 가족이나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심한 초등학생일수록 게임중독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만성 질병
포르투갈 민호대학교 디아스 페레이아 교수팀이 2009년 쥐로 실험한 결과, 만성 스트레스는 기억을 감퇴시키고 습관적인 행동을 늘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 스트레스가 반복되면 코르티솔의 신호에 따라 뇌의 스트레스 반응이 끊이지 않고, 몸의 긴장 상태도 풀리지 않기 때문에 만성 질병의 위험도 높아진다.
성장 후에도 영향을 미쳐
연세대학교 박미현 박사팀이 어린이 2844명을 5년간 추적 조사한 결과, 나이가 들수록 스트레스와 우울은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다. 스트레스가 높을수록 ‘중2병’으로 통칭되는 사춘기 정서불안 증세도 강했다. 게다가 미국, 독일 등 다른 나라에서 한 추적 조사 결과에 따르면 어린이 스트레스는 성인이 될 때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강한 어린이 스트레스가 일생을 좀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어린이 스트레스, 집에서 비롯된다?
엄마는 매일 말씀하시죠.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공부만 해라, 시키는 대로만 하면 잘 될 거다. 평소에는 따뜻한 엄마의 얼굴이 그 때만은 도깨비처럼 보여요. 기억나세요? 시험이 끝나고 놀이공원에 가고 싶다고 했더니 무섭게 화를 내셨잖아요. 이 시험 성적으로 어디 놀 생각을 하냐면서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용돈 모아둔 것으로 좋아하는 가수 음반을 사려고 했는데, 어디 애가 세상물정 모르고 비싼 걸 사냐며 야단치셨죠. 엄마가 혼내실 때마다 난 왜 이렇게 어리석은 아이인가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난답니다.
부모님은 지나가는 한 마디, 자녀는 평생
어린이~청소년기는 자아를 만들어가는 시기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공부나 생활 태도 면에서 압력을 주기 쉽지만, 반복되는 압박과 지시는 어린이의 자아존중감을 떨어뜨리게 된다. 자아존중감이 부족해 자신에게 부정적인 어린이는 긍정적인 아이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뿐 아니라 우울, 신경증, 두통 같은 정신적 질환에 시달리기도 쉽다. 어린 시절에 한 번 형성된 자아존중감은 성인이 된 뒤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문제다.
꽁꽁 묶을수록 ‘스트레스’
2013년 숙명여자대학교 연구팀에서 서울 초등학생 9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부모의 양육태도에 따라 어린이의 자기조절능력이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가 자신을 ‘자율적’으로 대할수록 자기조절능력이 높아지는 것.
자기조절능력이 높은 어린이는 스트레스를 덜 받고, 일정 수준의 스트레스는 건강하게 발산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반면 부모님이 자녀의 능력을 너무 기대하거나 성적 올리기 등을 강요하면 어린이 스트레스는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린이 스트레스, 부모부터 변해야?
엄마, 저 공부 열심히 할 거예요. 하지만 엄마의 잔소리 때문이 아니라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였으면 좋겠어요. 휴일에 놀이공원에서 신 나게 소리 지르며 스트레스를 풀고 싶기도 해요. 엄마와 마주 앉아서 게임도 함께 하고, 오늘 즐거웠던 일이나 앞으로의 꿈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부모가 변해야 어린이도 변해요
어린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첫 걸음은 부모의 태도 변화에서 비롯된다. 덕성여자대학교, 경상대학교 등 다양한 연구팀이 ‘학업 부담과 강요하는 태도를 줄이고 자녀를 편안하게 대하기 위한 부모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밝히고 있다. 어린이의 학업이나 행동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아존중감을 높이는 길이다.
저는요, 엄마가 정말 좋아요. 엄마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금처럼 엄마를 보면 무섭고, 머리가 아프고, 밥도 못 먹을 상황이 계속되는 건 싫어요. 공부하라고 하기 전에 제가 어떤 걸 공부하고 싶은지 들어 주세요. 꾀병이라고 야단치기 전에 제가 어디가 왜 아픈지 알아 주세요. 자살하는 초등학생이 어리석다 혀를 차시기 전에 왜 그 아이들이 그렇게 행동했는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지를 생각해 주세요. 아직 어린 아이라고 해도, 저에겐 제 생각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 주세요.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딸 최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