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말 이색적인 미술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다음달 중순까지 개최되는 ‘위대한 얼굴-한중일 초상화 대전’이 바로 그것입니다. 흔히 동북아 3국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부릅니다. 이번 전시회는 세나라 사람들의 옛모습이 어떠했는지 한눈에 비교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가 되는 것이죠.
우리나라 초상화의 백미는 18세기 선비 윤두서의 ‘자화상’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보는 이를 압도하는 고집스러운 인상과 강건한 남성적 면모가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찬찬히 보노라면 눈가의 안경자국과 어두운 그림자에서 순탄치 않았던 인생역정과 위엄 뒤에 숨은 인자함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옛사람들은 선비란 모름지기 권력에 대해선 몸을 사리지 않는 비판을 하면서도 민초들에게는 늘 따스한 손길을 내밀어야 한다고 가르쳐왔습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바로 선비의 이미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받는 사람 따라 그림 수준 달리해
이처럼 초상화에는 사진으로는 느끼기 힘든 인물의 내면이 담겨져 있다고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실제 모습과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뉴턴입니다. 사람들에게 과학자의 이미지를 물어보면 ‘천재’라는 답이 가장 많을 것입니다. 천재 과학자의 이미지가 바로 뉴턴의 초상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과학사학자 패트리샤 파라는 2002년 ‘뉴턴 : 천재 만들기’란 책을 발표했습니다. 파라 교수는 과학자에 대한 이미지가 뉴턴 당시와 그후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뉴턴 스스로 천재 과학자의 이미지를 만들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 도구가 바로 초상화였다는 것이죠.
전기작가들은 한결같이 뉴턴이 명성에 초연했다고 주장합니다. 천재 과학자라면 당연히 그랬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당시의 과학자들이 기껏해야 한두점의 초상화를 남긴데 비해 뉴턴을 그린 작품은 말 그대로 넘쳐납니다. 알려진 것만 해도 20여점이나 되는데, 양식도 다양해서 반신상, 전신상에 부조와 조각상 등이 뉴턴 생전에 제작됐습니다.
뉴턴은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답례로 이 초상화들을 줬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받는 사람에 따라 초상화의 수준을 달리했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자신의 ‘광학’ 프랑스어판을 낼 때는 많은 돈이 들어간 화려한 모습의 초상화를 편집자에게 줬다고 합니다.
이 초상화에서 뉴턴은 장갑을 손에 쥐고 칼까지 찬 우아한 신사의 모습으로 묘사돼있습니다. 이 정도 그림을 넣기 위해선 책을 최고급으로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또 왕립학회 회장 시절에는 금으로 ‘회장 아이작 뉴턴’이라고 쓴 대형 초상화를 내걸었다고 합니다. 마치 관공서에 대통령 사진 액자 달듯 말입니다.
반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밝힌 ‘프린키피아’의 둘째판을 낼 때는 초판 때의 절실함이 없어서인지 그냥 흑백의 소박한 초상화를 줬다고 합니다. 물론 미적분법을 두고 발견의 우선권을 다툰 라이프니츠와 친한 사람들에게는 한점도 주지 않았죠.
병약한 샌님에서 역사적 천재로
그렇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실제로 대중들에게 천재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뉴턴 생전에는 알려지지 않았던 소박한 초상화였습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를 출간하던 1689년 초상화가로 명성이 높던 고드프리 넬러를 방문해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천재 과학자의 이미지로 자리잡은 창백한 얼굴의 흑백 초상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당시 뉴턴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일개 학자에 불과했습니다. 넬러도 그 모습이 별로였던지 유리창도 없는 방에 틀어박혀 책만 파고드는 유약하고도 우울한 과학자의 이미지로 뉴턴을 그렸습니다. 뉴턴 역시 이 작품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는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뉴턴이 가장 좋아했던 초상화는 로마 시대의 기둥 옆에서 당시 지식인들이 집에서 쉴 때 입는 호사스러운 가운을 입고 시인처럼 몽환적인 표정으로 앉아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고 합니다. 낭만주의가 판치던 당시엔 천재란 시인과 같이 상상력을 펼치는 사람들에게나 어울리지 딱딱한 수학이나 다루는 과학자에겐 가당치도 않는 타이틀이었습니다. 뉴턴으로선 이런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서 자신을 포장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뉴턴 사후 1백년도 훨씬 지난 1857년, 맨체스터지방의 한 과학자가 포츠머스 백작의 저택 복도에서 넬러가 그린 흑백 초상화를 찾아냈습니다. 맨체스터는 영국 산업혁명의 중심지였기에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의 기대와 선망이 대단했습니다. 이들에게 초상화에 그려진 창백한 얼굴과 가느다란 손가락, 정돈하지 않은 머리칼과 소박한 옷, 그리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은 천재의 이미지 그 자체였던 것이죠. 심지어 예수의 모습에 비교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이 작품이 뉴턴의 공식 초상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초상화와 뉴턴의 실제 모습은 얼마나 닮아있을까요. 20년 동안 뉴턴을 알고 지냈던 로체스터의 주교는 한마디로 “초상화에서처럼 강렬한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증언했습니다. 또 골상학자들은 깎아지른 듯한 이마는 유럽인보다는 아메리카 인디언에 가까운 형태라고 분석했습니다. 과학계 초대 얼짱은 이렇게 탄생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