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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평화를 위한 화학] 3. 희뿌연 용액 속에서 시작된 기적의 섬유, 케블라

    ▲milly, GIB

     

    1975년 12월 23일 미국 시애틀. 무장 강도가 쏜 총탄이 경찰관 레이먼드 존슨의 심장과 폐 쪽에 명중했다. 그러나 존슨은 금방 일어나서 도주하던 범인을 잡았다. 방탄조끼가 존슨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이 해 시애틀 경찰에 미국의 화학기업 듀폰의 방탄조끼가 시범 보급됐다. 총알을 막는 섬유, 케블라(Kevlar)가 세계에 알려진 순간이다.

     

    편집자 주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은 요즘, 더 안전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과학의 역할을 고민하게 됩니다. 전 육군사관학교 교수이자 한국 육군 장교로서 국가 안보를 위해 연구해 온 정근홍 서강대 화학과 교수가 치열하게 평화를 준비하는 군사 분야 화학의 세계를 소개합니다.

     

    ▲ANHUI PARKER NEW MATERIAL CO.,LTD

     

     

    특이한 용액, 더 특이한 화학자

     

    1965년, 미국 델라웨어 윌밍턴의 듀폰 섬유연구소. 이 연구소에서 미국 출신의 화학자 스테파니 퀄렉이 케블라 섬유를 발명했다. 이때 42세였던 퀄렉은 당시 듀폰사 전체에서도 매우 드문 여성 연구원이었다. 퀄렉은 1946년 미국 카네기멜런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의대 진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회사에 입사했는데, 고분자 화학의 매력에 빠지면서 40년 넘게 이 회사에서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퀄렉은 실험 과정에서 얻은 묽고 뿌연 용액으로 총알을 막는 섬유 신소재, 케블라를 만들었다. 많은 화학제품의 발명과 성공 스토리가 그렇듯, 원래 이 용액은 동료 화학자들이 실험 실패로 단정한 화합물이었다. 원래 퀄렉이 맡은 연구 과제는 불시에 닥칠 석유 파동(석유의 대량 부족 사태)에 대비한 타이어 보강용 합성 섬유의 개발이었다. 석유가 부족해지면, 더 가볍고 강한 타이어용 신소재로 자동차 연비를 높여 석유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 신소재 개발을 위해 퀄렉은 파라페닐렌디아민(PPD)과 테레프탈로일 클로라이드(TPC)를 저온에서 반응시켜 새로운 아라미드(aramid) 고분자를 합성했다. PPD와 TPC는 서로 교차해 ‘CO-NH’의 아마이드(amide) 결합 사슬을 형성한다. 아라미드 고분자는 아마이드 결합 사슬과 방향족(aromatic)인 벤젠 고리가 교대로 배열된 구조이다. 아라미드의 이름도 방향족 아마이드를 줄인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퀄렉은 기존 용액과 전혀 다른 고분자 용액이 합성된 것을 확인했다. 보통의 고분자 용액은 꿀처럼 점도가 높고 투명하다. 그런데 이 용액은 물처럼 묽은 데다 불투명한 유백색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는 이 용액을 합성 실패로 판단하고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퀄렉은 이 비정상적인 고분자 용액을 녹여서 실을 뽑아내기로 했다. 즉, 이 낯선 물질을 방사해서 섬유로 바꿔보려 한 것이다. 듀폰의 방사 기술자인 찰스 스멜리에게 이 용액으로 실을 뽑아달라고 부탁했지만, 처음에 그는 불투명한 덩어리들 때문에 방사 장비의 구멍들이 막힐 것이라고 거절했다. 퀄렉은 포기하지 않았다. 끈질긴 설득으로 마침내 진행된 시험 방사의 결과는 놀라웠다. 이 용액의 실로 만든 섬유의 강도가 기존 나일론의 무려 9배였다. 퀄렉도 측정 장비의 오류를 의심하며, 실험을 여러 번 반복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같은 무게 기준으로 강철보다 5배 강한, 전례 없는 합성 섬유가 탄생했다. 

     

    분자들이 단결하면 벌어지는 일

     

    화학 섬유인 케블라가 이토록 강한 이유는 분자 구조에 숨어 있다. 케블라의 화학명은 폴리(파라-페닐렌 테레프탈아미드)인데, 이 긴 이름의 핵심은 그리스어로 ‘반대쪽’을 뜻하는 접두어 ‘파라’(para)다. 케블라를 구성하는 아마이드 결합이 벤젠 고리의 마주 보는 위치에 연결돼 있다는 뜻이다. 케블라는 이 파라 배열 덕분에 고분자 사슬이 꺾이거나 꼬이지 않고 곧은 막대 모양으로 뻗는다. 스파게티 생면을 한 움큼 쥔 것처럼, 수많은 직선형 분자가 나란히 정렬한 구조다.

     

    ‘CO-NH’의 아마이드 결합이 중간에 있고, 양옆으로 육각형 벤젠 고리가 나란히 연결된 케블라의 화학 구조식. 강철보다 높은 케블라의 강도는 아마이드 결합과 벤젠 고리가 연결된 분자 구조에서 나온다.


    수소 결합도 케블라의 특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수소 결합은 원자가 아닌 분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전기적 인력이다. 다른 화학 결합보다 약해서, 수소 결합을 각각 하나씩 나누면 끊기 쉽다. 하지만 케블라 섬유를 끊으려면 이 분자를 구성하는 아마이드 결합의 사이사이에 촘촘히 형성된 수소 결합 네트워크 전체도 한 번에 끊어야 한다. 케블라 섬유는 평행 정렬된 모든 분자 사슬 사이에 대단히 많은 수소 결합이 동시에 형성되기 때문에, 이 섬유를 절단하기가 매우 어렵다. 스파게티 생면 한 가닥은 쉽게 부러지지만 수백 가닥을 접착제로 붙이면 부러뜨리기가 훨씬 어려워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섬유를 구성하는 분자들 간의 이 모든 상호작용이 결합한 결과, 케블라 섬유의 인장 강도는 같은 무게의 강철보다 5배가 높다. 게다가 케블라는 녹는점이 없다. 분자 간 결합이 너무 강해서, 온도를 올리면 녹기 전에 섭씨 약 500°C에서 분해돼 버리기 때문이다. 
    처음에 퀄렉이 만든 뿌옇고 묽은 용액은, 액체와 고체의 중간 상태인 액정 상태의 케블라였다. 용액 속의 직선형 고분자 분자들이 나란히 정렬해서 빛을 산란시킨 탓에 뿌연 유백색을 띤 것이다. 그러므로 이 용액에서 뽑은 실도 분자 정렬이 유지돼 매우 강한 섬유를 만든 것이다. 액정 고분자라는 새로운 화학 분야까지 케블라가 펼친 셈이다.

     

    ▲DuPont
    케블라 섬유의 생산 초기인 1970년대에 미국 버지니아 리치먼드의 듀폰 섬유공장에서 케블라 원사를 살펴보고 있는 스테파니 퀄렉.

     

    총알로 뚫을 수 없는 유연한 섬유

     

    1970년대 초에 케블라가 상용화되면서 가장 극적으로 바뀐 것이 바로 방탄조끼다. 총알이 케블라 직물에 충돌하면 어떻게 될까? 핵심은 에너지 흡수와 분산이다. 총알의 운동에너지가 방탄조끼에 전달되면, 촘촘하게 직조된 케블라 섬유가 늘어나면서 이 에너지를 전체 조끼로 분산시킨다. 딱딱한 철판은 총알의 운동에너지를 한 점으로 받아내므로 관통되거나 깨질 수 있지만, 케블라 섬유는 총알이 명중한 부위가 유연하게 변형되면서 섬유 전체로 에너지를 흡수한다. 그래서 케블라는 파괴되기 직전까지 흡수할 수 있는 에너지의 총량이 매우 크다.


    1975년 미국 법무부는 케블라 방탄조끼를 15개 도시의 경찰에 시범 보급했다. 그해 12월, 이 조끼를 착용한 시애틀 경찰관 레이먼드 존슨이 총격을 당하고도 생존한 것이 케블라 방탄조끼가 생명을 구한 첫 실제 사례로 알려져 있다. 시범 보급된 1년간 이 조끼가 경찰관을 보호한 사례는 총 18건이다. 이후로 케블라 방탄조끼가 세계 각국의 경찰, 군에 빠르게 보급됐고, 2018년 ‘미국사법연구원(NIJ) 저널’에 실린 마크 그린 NIJ 기술표준국장의 논문에 따르면 2016년까지 방탄조끼로 생명을 지킨 미국의 법 집행 공무원은 3000여 명에 이른다.


    물론 케블라의 역할은 방탄조끼에 그치지 않는다. 1983년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로 사용해 온 강철 헬멧을 케블라 헬멧(PASGT)으로 전면 교체했다. 케블라 헬멧은 파편 방어력이 같은 무게의 강철 헬멧보다 25~40% 높고, 무게가 훨씬 가볍다. 군대에서 전투모를 쓰고 훈련을 받은 분은 상상하겠지만, 강철 전투모는 오래 쓰고 있기에는 꽤 무겁다. 케블라 헬멧은 군인의 전투 피로도를 낮추면서 기동성은 높였다. 현재도 케블라가 핵심 소재인 군용 헬멧의 성능은 지속적으로 향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케블라는 장갑차 내부의 파편 차단막, 항공모함의 주요 구획에 설치되는 방호 장갑, 군용 낙하산, 폭발물처리(EOD) 방호복, 대인지뢰 방호 부츠에도 쓰인다. 예를 들어 미국을 대표하는 니미츠급 항공모함은 탄약고 등 핵심 구역 주변에 케블라 장갑이 설치됐다. 케블라의 가벼운 무게 덕분에 함정의 무게 중심을 낮추면서도 충분한 방호력을 확보할 수 있어서다.

     

    ▲Eric Long, Smithsonian Institution
    케블라 섬유로 제작한 안전 헬멧과 밧줄, 방탄조끼, 방호 장갑 등은 다양한 상황에서 많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냈다. 현재는 케블라를 토대로 한 차세대 방호 소재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케블라를 직조한 과학적 본질

     

    2016년 6월,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 미국의 경찰 특수기동대(SWAT) 대원 한 명이 착용한 케블라 헬멧에 범인의 총탄이 정통으로 맞았다. 총알은 헬멧 표면에 구멍만 내고 멈췄고, 이 대원은 눈 주위에 경미한 부상만 입었다. 케블라 섬유가 총알의 에너지를 흡수, 분산시켜 두개골 관통을 막아낸 것이다.


    케블라는 화학이 사람을 살린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다. 케블라의 활약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연재 첫 화에서 다룬 노비촉이 화학의 어두운 면이라면, 케블라는 화학의 빛나는 면이다. 타이어 보강재를 찾던 연구에서 우연히 태어난 케블라는 이제 거리의 경찰관부터 전장의 군인까지 지키는 구명의 화학 소재가 됐다. 게다가 케블라는 안전을 지켜야 하는 긴박한 현장뿐만 아니라 스키 장비부터 스마트폰 케이스, 고음질 스피커, 작업용 장갑까지 가볍고 강한 성질이 필요한 우리의 일상 곳곳에서 쓰인다. 오늘도 우리는 보이지 않지만 튼튼한 케블라의 도움을 받았을 수 있다.


    내가 화학자로서 케블라의 개발 과정에서 주목하는 점은 단연 ‘상식을 의심하는 태도’다. 퀄렉이 뿌옇고 묽은 용액을 버리지 않고 실을 뽑아낸 것, 기술자의 거절을 설득으로 바꾼 것, 놀라운 결과 앞에서도 장비 오류를 의심하며 반복 실험한 것. 이 모든 과정이 과학적 발견의 본질을 알려준다. 케블라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이상한 결과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치밀한 관찰과 끈기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방호 소재는 케블라를 발판 삼아서 초고분자량 폴리에틸렌(UHMWPE), 탄소나노튜브 복합재, 전단농화유체(STF)를 활용한 액체 방탄복까지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이 모든 차세대 소재의 출발점이 60년 전 한 화학자가 '이상한 용액'을 버리지 않은 순간인 셈이다. 

     

     

    필자 소개
    정근홍: 서강대 화학과 교수, 화학무기금지기구(OPCW) 과학자문위원회(SAB) 자문위원. 육군사관학교 물리화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인공지능(AI)과 양자기술을 활용한 화학무기 후보 물질의 예측 및 분석 연구로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한 화학 연구에 힘쓰고 있다. doas1mind@sog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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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9월 과학동아 정보

    • 정근홍 서강대 화학과 교수
    • 에디터

      라헌
    • 디자인

      박주현,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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