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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사이언스 북마크] 더 나은 세상의 사고 실험, 어둠의 왼손

    SF와 판타지는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 이야기의 장르다. 이야기가 무엇을 상상하는지, 즉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 세상을 상상하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면 이 장르의 작품을 더 깊고 넓게 즐길 수 있다.

     

    ▲김연정

     

    편집자 주
    서울대·KAIST·POSTECH이 추천한 도서 가운데 12권을, 매달 한 권씩 전문가와 함께 읽습니다. 과학자를 꿈꾸고, 세특·과제·교양을 고민하는 독자를 위한 과학 독서 가이드를 제공합니다.

     

    과학적이며 문학적인 사고 실험, SF

     

    판타지가 현재의 우리와 자연환경이 다른 세상을 주로 상상한다면, SF는 현재의 우리와 다른 기술 문명을 상상한다. 특히 SF는 한편에서는 과학소설(Science Fiction), 다른 편에서는 사변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 칭할 정도로, 세상의 설정값을 조절하는 사고 실험 그 자체다. 현재와 조금, 혹은 많이 다른 기술 문명에서는 인간의 삶과 생각, 마음이 어떻게 달라지거나 달라지지 않는지 보려는 것이다.


    ‘어둠의 왼손’ 속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은 무엇이 다를까? 21세기 한국 SF에도 큰 영향을 끼친 ‘어둠의 왼손’의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작가인 작가 어슐러 르 귄은 우리 세상의 어떤 설정값을 조절했을까. 일단 이 작품은 21세기 지구 문명보다 훨씬 발전한 기술 문명을 상상한다. 작품 속 인류는 초광속 통신 장치 앤서블로 전 우주에서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우주를 여행할 수도 있다. 여기서 지구는 헤인(Hain) 행성 중심의 느슨한 우주연합인 에큐멘에 합류한, 변종 인류 문명이 정착한 여러 행성들 중 하나일 뿐이다(르 귄의 SF는 대부분 이 헤인 세계관에 속한다. 어떻게 인류가 다양한 행성에 정착해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로 각자 문명을 발전시켰는지의 설정도 있지만 ‘어둠의 왼손’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지식은 아니다).


    르 귄의 세계관에서 정말 특이한 점은 따로 있다. 이 우주연합의 행정부인 에큐멘이 전혀 비합리적이지도 부패하지도 착취적이지도 않다는 점이다. 에큐멘의 존재 목적은 다양한 행성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한 인류 문명에 대한 지적 이해와, 이 문명들 간의 평화적·상호 합의적 교류다. 즉 에큐멘은 일종의 우주 UN이다. 국제 정치에서 사실상 무기력하며 국가 간의 역학과 이해관계에 휘둘리는 21세기의 UN과 달리, 에큐멘은 창립 목표에 충실한 형태로 존재하며 현실에 개입한다. 르 귄의 여러 SF 작품은 다른 행성에 파견된 에큐멘의 연구자 겸 외교관이 그 인간 문명의 고유성을 이해하는 과정을 다룬다.


    헤인 세계관은 이상적인 UN과 선의에 기반한 문명 교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더 나은 ‘국제 사회’에 관한 사고 실험이다. 르 귄은 조금 앞선 기술 문명이 다른 문명들을 힘으로 흡수하는 대신, 지적 호기심을 발휘해 신중히 접근했다면 어땠을지 문학적으로 가정한다. 지구가 ‘세계화’되며 일어난 일들(전쟁, 식민 지배, 문화 파괴와 인종 말살 등)이 일어나지 않은 세상은 과연 어땠을지 상상해 본 셈이다. 독자인 우리는 지구와 전혀 다른 ‘문명’을 접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 작품의 가상 미래에서 시뮬레이션한다고 볼 수도 있다.


    최근의 SF적 상상은 디스토피아, 즉 기술 발전에 따른 무시무시한 사회 변화를 상상하는 경향이 강하다. 디스토피아적 상상은 우리가 현재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의 반영이며, 의미 있는 경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디스토피아적 상상만 존재한다면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될 위험이 있다. 디스토피아의 미래만 상상했기 때문에 실제로도 그렇게 되도록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어둠의 왼손ㅡ가이드맵
    ▲시공사
    분야·시기  SF, 현대(1969년)
    의의  어슐러 르 귄은 1969년에 이 작품을 내면서 20세기 후반의 대표 SF 작가로 입지를 굳혔습니다. 바로 다음 해에 미국의 가장 권위 있는 SF 소설상인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 수상하며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았고요. 세계의 SF 독자들이 여전히 사랑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르 귄은 과학 기술 자체는 물론, 기술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류학적, 비판적 관점을 담은 SF를 썼습니다. 특히 이 ‘어둠의 왼손’이 SF 장르에 던진 충격은 판타지 장르에서 J. R.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비견될 정도입니다.
    추천  POSTECH 권장도서 100선
    난이도  쉬움  독서 초반에는 약간의 참을성이 필요합니다. 천천히 다른 세계를 소개하는 흐름에 적응하면 기다린 만큼의 보람과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더 읽기  ‘둠즈데이북’, 코니 윌리스: 시간 여행이 가능해진 2054년, 젊은 역사학도 키브린이 페스트가 대유행 중인 중세 유럽에 홀로 연구를 떠나며 사건이 벌어지는 SF입니다. 역동적인 가상 체험으로서의 SF를 더 읽고 싶다면 가장 먼저 권할 수 있습니다.

    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지음|최용준 옮김|시공사|420쪽|1만 9800원

     

    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역사의 분기점

     

    ‘어둠의 왼손’의 이야기는 아직 에큐멘에 통합되지 않은 변방의 겨울 행성 게센에서 전개된다. 지구 출신인 겐리 아이는 우주연합인 에큐멘이 외교 관계 수립을 제안하기 위해 게센 행성에 파견한 최초의 공식 사절이다. 우리는 이 외교관의 시점에서 이 행성의 낯선 문명을 만난다. 특히 ‘어둠의 왼손’을 소개하는 대부분의 글은 게센인의 특이한 유전 형질에 주목한다. 게센인의 성별은 ‘케머’라는 특정 시기에만 여성 혹은 남성으로 발현해 종을 잇고, 삶의 다른 시기에는 중성이다.


    하지만 게센 행성이 발달시킨 문명은 이들의 성별보다도 여러 면에서 더 특이하다. 겐리 아이의 말을 빌리면 이 행성은 산업 혁명의 기술 수준에 도달했지만 산업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인류가 오래전에 게센 행성에 정착하면서 기술 문명이 발달했지만, 지구라면 오래전에 일어났을 변화들이 이곳에서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지구인이 보기에 이곳의 자동차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다. 이 행성의 기술은 더 빠른 자동차를 만들 수 있지만, 더 빨리 이동할 필요를 못 느껴서 느린 자동차만 만든다. 


    또한 이 행성에 국가는 있지만 전쟁이라는 개념은 나타나지 않았다. 게센인도 폭력의 개념은 안다. 개인 간의 범죄는 지구처럼 발생하고, 신화와 역사적 기록도 지구만큼 잔인하다. 다만 게센에서는 단 한 번도 인간 집단과 인간 집단이 서로를 계획적으로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않았고, 그런 일은 이 행성 어느 누구의 상상 속에도 없다.


    이런 세상이 존재할 수 있을까? 게센 문명은 르 귄이 시도하는 사고 실험이자, 설정값을 약간 조절해 본 지구 문명이다. 우리의 지구는 기술의 편익을 누리려면 기술의 폭력을 감수해야 하며, 가장 빠른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큰 대가도 치를 수 있고,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전쟁을 이미 ‘현실’의 일부로 받아들인 사회다. ‘어둠의 왼손’의 게센 행성이라는 사고 실험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실’이 과연 당연한지 스스로에게 묻게끔 한다. “지구의 방식이 유일한 방식인가? 다른 형태의 기술 문명은 불가능할까?” 기술의 편의를 누리려면 이 모든 환경 오염과 사회적 불안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받아들여야만 할까.


    하지만 게센의 문명은 역사적 분기점 앞에 서 있다. 게센 행성의 국가들 중에서 대국인 카하이드 왕국은 오래된 사회 체제를 고수하지만, 카하이드와 대립하는 국가인 오르고린은 좀 더 ‘현대적’인 사회 통제 방식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겐리 아이는 카하이드를 벗어나 오르고린을 여행하며 초기 형태의 강제노동 수용소, 비밀경찰 같은 현대 지구 문명의 역사적 사례들을 접한다. 게센 문명이 지구와 같은 길로 갈 조짐을 본 것이다. 게센의 느린 자동차나 낡은 관습들이 답답했던 화자도 이런 변화들 앞에서 흠칫한다. 지구가 문명 발전의 유일한 길인가? 만약 선택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구식 발전을 다른 행성에 권할 수 있을까? 

     

    임지원 강원대 교수가 추천한 어슐러 르 귄의 작품
    ▲Marian Wood Kolisch(W)

     머나먼 바닷가(1972년)  

     ‘어스시 전집’은 용이 나오는 전형적 판타지 같으면서도 어딘지 스산한 점이 매력입니다. 이 책은 ‘어스시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어스시 전집 중 초기작인 3부작 전체를 추천하지만 단 한 권만 본다면 이 책입니다. 르 귄은 흥미롭게도 SF 소설가로서는 ‘밝은’ 세계를 쓰는 편이지만 판타지 소설가로서는 서늘한 면이 있습니다.

     

     테하누(1990년)    

    그래서 영웅이 세계를 구한 다음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나이가 들고 은퇴한 영웅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어스시 3부작으로부터 20년 가까이 지나 발표한 후속작입니다. 용이 존재하는 섬에서 펼쳐지는 르 귄의 가장 어둡고 ‘현실적인’ 작품으로, 르 귄이 통찰한 환상과 상상의 본질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빼앗긴 자들(1974년)

    우주를 바꿀 기술의 열쇠가 내게 있다면? 공산주의 행성과 자본주의 행성으로 나뉜 쌍성계에서 헤인 세계관의 사람들이 초광속 통신 기술인 앤서블을 발견한 과정이자, 이 우주적 기술을 발명한 천재 물리학자 쉐백의 선택과 성장의 이야기입니다. 파괴된 지구 출신의 외교관이 쉐백에게 지구 역사를 토로하는 마지막 장면이 압권입니다.

     

     세상의 생일(2002년)

    헤인 세계관의 행성들을 여행하는 단편집입니다. 특히 ‘고독’과 ‘잃어버린 천국들’을 추천합니다. ‘고독’에서는 몰락한 초고도 문명의 생존자들이 새로 세운 문명을 만납니다. ‘잃어버린 천국들’은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을 찾아가는 ‘세대 우주선’의 사건들을 다룹니다. 고향도, 새로운 행성도 만나지 못할 우주선 속 세대는 어떤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할까요?

     

    현실과 이상을 넘어선 SF만의 기쁨

     

    ‘어둠의 왼손’은 역사적 분기점 앞에 선 게센 행성의 이야기이자 이 결정적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겐리 아이는 이 행성 사람들에게 범우주적 인류 문명의 존재를 알리고 행성 간의 외교 관계 수립을 권유하기 위해, 게센의 거대 왕국인 카하이드의 고위 관리 에스트라벤의 힘을 빌리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독대하는 1장에서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각각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대변하는 듯 보인다. 개인적 삶을 포기하고 비무장 단신으로 우주 건너편의 낯선 행성 파견을 자원한 겐리 아이는, 에큐멘 정부라는 거대한 역사적·사회적 이상을 대변한다. 에스트라벤은 카하이드의 복잡한 정치판에서 살아남은 전략가이자, 겐리 아이의 우주적 이상 앞에서도 정치적 이득만 셈하는 듯이 보인다.


    ‘어둠의 왼손’에서는 이상주의자가 소위 ‘현실의 맛’을 보고 계몽되지도, 현실주의자가 이상주의자로 변화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은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이야기이지만 이들이 알게 된 진실은 단순하지 않다. 겐리 아이는 자신도 에스트라벤을 이상의 실현을 위한 도구로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에스트라벤의 현실주의가 추구하는 목표가 오직 이기주의적, 근시안적이지는 않다는 진실도 있다. 그래서 ‘어둠의 왼손’은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세계와 역사를, 세계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한 사람을, 이해해야 하는 이야기다. 하나뿐인 개인과 모두를 위한 이상 중 무엇을 선택하거나 희생하라는 권유가 아니다. 


    ‘어둠의 왼손’의 독자가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요즘 ‘우리 세상’의 속도에 비해 이 SF의 앞부분 전개가 느릴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보다 조금 느렸던 시대에 쓴 소설이고, 게다가 느린 행성의 느린 이야기인 까닭이다. 하지만 한 조각 한 조각 쌓이는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이 겨울 행성 게센에서의 잊을 수 없는 체험을 완성해 줄 블록들이다. 


    모든 장르 소설은 결국 고유한 가상 체험이다. 우리가 가본 적 없고 갈 수도 없을 세계를 체험하는 기쁨이야말로 ‘어둠의 왼손’의 성취이자, 모든 SF의 존재 목적이다. 느리게 흐르는 거대한 세계 속으로, 르 귄의 인도를 따라 한 걸음씩 들어가다 보면 기다린 가치가 있는 SF만의 기쁨에 이를 것이다. 

     

    ▲California Digital Library
    아메리카 원주민인 야히족의 마지막 생존자(오른쪽)과 함께 있는 어슐러 르 귄의 아버지 알프레드 크뢰버. 인류학자인 크뢰버는 낯선 문화와의 소통과 교류를 다양하게 상상한 르 귄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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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년 9월 과학동아 정보

    • 임지원 강원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 에디터

      라헌
    • 디자인

      박주현,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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