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바로 그 모호함이 이 책의 매력이다. 화학 구조와 소설, 악보, 걸작 회화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저자인 로얼드 호프만이 1981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과학자이자 인문학적 통찰을 전한 시인이라는 배경을 보면, 이 책의 방대한 스펙트럼도 이해할 수 있다.
편집자 주

화학의 재미를 전하는 거장의 진심
저자인 로얼드 호프만은 “화학이 과연 얼마나 재미있는 분야인가를 보여주고 싶다”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바로 이 첫마디에서 그의 깊은 진심을 읽었다. 화학은 우리 삶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삶의 물질 그 자체다. 화학 실험실에 갇힌 학문이 아니다. 호프만은 이 사실을 널리 알린 과학 대중화의 진정한 선구자였다.
내게도 이 책은 ‘인생 책’이나 다름없어서 학생들에게 일독을 적극 권하곤 한다. 특히 지금 연구년을 보내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화학과에서 묘한 인연을 접하며 이 책의 의미도 내게 더 확고해졌다. 이곳의 제프리 롱 교수가 미국 코넬대에서 호프만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애제자여서다. 나는 호프만을 직접 만난 적은 없는데도, 롱 교수를 보며 그 스승의 가르침도 느낀다. 다양한 분야에 열린 민감성, 자유로우면서도 타협하지 않고 높은 기준을 지키는 연구, 그리고 따뜻함 속에 서려 있는 엄격함. 이런 대칭적이고도 조화로운 분위기는 이 책에 담긴 호프만의 철학에 닿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 담긴 거장의 통찰을 언제든 배울 수 있다는 건 우리 후학들의 큰 행운이다. 이제 호프만이 들려주는 화학의 지적이고 아름다운 세계를 살펴보자.
같은데 같지 않은 화학의 얼굴, 양면성
먼저 호프만은 1부 ‘정체성’에서 두 얼굴을 가진 로마 신화의 신 ‘야누스’에 화학을 비유한다. 인류에게 이롭기도, 해롭기도 한 화학의 입체적인 면모를 압축한 표현이다. 저자는 1장 ‘쌍둥이의 삶’부터 10장 ‘분자 모방’에 걸쳐서 단순한 흑백논리를 적용하지 않고, 화학이 지닌 두 얼굴을 살펴본다.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란 제목에 담긴 화학의 깊은 의미를 가장 잘 대변하는 것도 이 1부다.
이 중 동위원소 이야기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깬다. 동위원소는 원자번호(양성자 수)는 같지만, 중성자 수가 달라서 질량이 다른 원소다. 물(H2O)도 동위원소를 고려하면 무려 18종이다. 물 한 모금에도 동위원소들이 섞여 있다. 아주 적은 양의 삼중수소가 포함된 물의 방사선은 수백만 년에 걸쳐 생물의 진화에 영향을 줬을지 모른다.
더 나아가 우리 몸속 헤모글로빈을 생각해 보자. 헤모글로빈은 탄소 2954개, 수소 4516개 등으로 구성된 거대 분자다. 여기에 동위원소의 경우의 수를 대입하면 헤모글로빈의 종류는 천문학적인 수가 된다. 피 한 방울 속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헤모글로빈 분자를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같다’와 ‘다르다’의 경계는 이토록 모호하다.
10장은 화학의 이 모호한 경계가 우리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바로 일산화탄소의 구조가 산소와 비슷하기 때문에, 헤모글로빈은 산소 대신 일산화탄소와 결합해서 인간을 질식시킨다. 부동액의 주성분인 에틸렌글리콜을 실수로 마셨을 때 술(알코올)을 먹이는 응급 처방 또한 이 분자 모방을 역이용한 지혜다. 알코올이 분해 효소와 먼저 결합해서 에틸렌글리콜이 강한 독성의 옥살산으로 대사되지 못하고 무해한 상태 그대로 배설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사례들을 풍성하게 차린 아이디어의 파티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논문 너머의 직관까지 표현한 창조성
2부의 중심은 화학의 언어, 즉 ‘표현 방법’이다. 17장 ‘발버둥’에서 예로 든 캠퍼(장뇌) 분자는, 2차원 평면에 3차원 분자 구조를 표현하려는 화학자들의 치열한 고민을 생생히 그려낸다. 캠퍼의 구조는 두 개의 고리가 입체적으로 얽혀 있어서, 2차원으로 표현하면 결합의 위치가 앞인지 뒤인지 알 수 없고, 결합각도 왜곡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의 굵기 및 점선 등의 시각적 약속을 정해서 2차원 언어로 표현했다. 이것은 현대의 입체 화학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 화학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도록 표현하는 노력이 얼마나 예술적인지 보여준 장면이다. 화학의 언어로 구조를 표현할 때, 그 본질도 드러난다.
호프만은 화학의 언어를 소개하면서, 건조한 과학 논문 형식이 우연한 발견과 과학자의 창조적 직관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도 드러낸다. 자신이 받은 혹독한 논문 심사평을 가감 없이 공개한 대목을 보자. 노벨상 수상자조차 “이 논문은 출판 가치가 없다”는 악평을 받았다는 사실은 논문 거절에 좌절해 본 수많은 연구자에게 묘한 위로와 용기를 준다.
이어지는 3부는 ‘창조와 발견’의 경계를 묻는다. 과학은 자연의 비밀을 벗기는 ‘발견’이고, 예술은 무에서 유를 만드는 ‘창조’라는, 흔한 통념을 향한 질문이다. 호프만은 단언한다. “화학이야말로 창조적 예술이다.” 자연 상태에 없는 1000만 종 이상의 새로운 분자를 합성해 낸 화학자들은 분자 세계의 예술가라는 의미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화학과 예술을 가르치고 있기에, “합성은 예술이다”란 이 외침에 전율을 느꼈다. 특히 합성 과정에서 생기는 정교한 중간 생성물을 ‘짓는 중인 건물을 유지하는 받침대’에 비유한 설명에서 항상 무릎을 친다.
과학자의 가장 무거운 책임, 민감성
인공 합성한 펜타닐은 전신 마취제, 말기암 환자의 강한 진통제로 쓰지만 불법 유통, 오남용으로 중독, 집단 사망도 초래한다. 이렇듯 새롭게 합성한 물질이 경우에 따라 약과 독을 오가기도 한다. 4부에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묵직한 메시지가 있다. 바로 ‘탈리도마이드 비극’이다. 탈리도마이드를 복용한 산모 수천 명이 사지 기형의 태아를 낳은 이 사건은, 합성 물질을 만드는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다.
탈라도마이드는 기존 신경안정제의 화학구조를 모방한 거울상 이성질체가 두 종류 포함했다. 이 중 약효가 있는 하나만 검증한 채, 둘을 분리하지 않고 사용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른 이성질체가 태아의 사지 기형을 유발했다. 이 비극은 과학자가 자신이 창조한 물질에 대한 ‘민감성’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경고다. 안전할 것이라 믿고, 보고 싶지 않은 데이터를 무시하면 결국 재앙으로 돌아온다.
6부 ‘화학에서의 삶’은 노벨 화학상 수상자인 프리츠 하버의 양면적인 일생을 다룬다. 하버는 공기 중의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하버-보슈 공정’을 개발해 지구의 식량난을 해결했다. 독일 출신인 그가 개발한 독가스로, 나치 독일이 수만 명을 학살했다. 결국 나치에게도 버림받은 그의 비극적 운명은 화학의 ‘이원성’ 자체를 상징한다.
8부 또한 사회 속 화학의 자리를 묻는 장이다. 저자는 사과 성장 조절제인 알라(Alar)를 둘러싼 ‘알라 사과 파동’의 괴로운 경험을 돌아본다. 알라의 주재료 다미노자이드가 분해될 때 나오는 불포화 디메틸히드라진이 발암 물질이란 연구가 나오면서 사회적 공포가 확산됐고, 알라 처리한 사과가 암을 일으키려면 몇천 kg씩 먹어야 한다는 후속 연구와 비판도 제기됐다. 전문가인 자신조차 성장 조절제에 무지했다는 저자의 반성은 실험실 밖에서 대중과 투명하게 소통하는 실천까지 나아간다. “과학 교육은 흥미롭고 자극적이어야 한다”는 그의 지론도 이런 소통의 토대로서 과학 교육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기에 지금 한국의 교육 현장에도 큰 울림을 준다.
정적이며 동적인 화학 세계를 끌어안은 통찰
호프만은 이 책을 마무리하며 입자이자 파동이고, 정적이며 동적인 분자의 미시 세계를 독일 철학자 헤겔의 변증법과 그리스 신화의 반신반마인 ‘케이론’에 비유한다. 9~10부에서 이 상호보완적이고 모순적인 미시 세계를 살펴보며 그 본질인 ‘긴박감’을 느낄 수 있다. 저자는 이 긴박한 세계를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은, 정적이며 동적인 두 개념을 동시에 끌어안는 것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마지막 장을 넘기면, “이 책을 스승들에게 바친다”는 노학자의 겸손한 고백이 기다린다. 교단에 서는 필자에게 깊은 뭉클함을 남긴 결말이기도 하다.
총 10부 51장의 이 책은 방대한 주제를 깊이 살펴본 ‘가장 인간적인 과학서이자 철학서’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한 챕터씩 음미하길 권한다. 관심이 덜한 부분은 과감하게 넘겨도 좋다. 다만 자신의 생각에 파동을 일으키는 문장을 만난다면 깊이 사색해 보길 권한다. 그런 시간이 모여서 이 책은 화학 전공자에게는 필독서가, 비전공자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사이언스 북마크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합성 물질의 종류는 이 책이 나온 지 30여 년 만에 20배 이상 폭증해 3억 개에 가까워졌다. 인공지능(AI)과 하드웨어의 진화로, 기존에 일주일 걸렸던 구조 분석은 이제 몇 시간 만에 끝난다. 여러분은 과거의 화학자가 평생을 바쳐야 했던 연구를 훨씬 효율적인 도구로 신속하게 마칠 수 있는 경이로운 가속도의 시대를 살고 있다.
2. 탈리도마이드 비극과 하버의 독가스는 과학의 야누스적 면모를 보여준다. 여기서 호프만이 강조한 과학자의 ‘민감성’과 책임이란 무엇일까?
민감성이란 단순한 관찰을 넘어, 내 연구가 사회에 미칠 파장을 끊임없이 성찰하는 태도다. “의도는 좋았다”는 변명 대신, 잠재적 위험까지 치열하게 고민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과학자의 책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