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트기 전이었다. 후남은 언제나처럼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밖으로 나섰다. 한때 외양간이었던 콘크리트 가벽을 지나,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버려진 편의점을 지나 걷고 또 걸었다. 후남은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굽은 허리와 흐려진 시야도 그의 곧은 걸음걸이를 방해하지 못했다. 길가의 강아지풀 따위에 정신을 파는 법도 없었다. 눈앞의 과제에만 집중하면 경험의 폭이 좁아졌지만, 그만큼 정신이 또렷해졌다.
옅은 물안개 너머로 양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후남 선생님, 좋은 아침입니다.” 날카로운 기계 목소리가 후남을 맞이했다. 비닐하우스처럼 굽은 천장에 매달린 로봇 ‘하이라인-99’였다. 후남은 녀석의 새빨갛게 빛나는 렌즈를 흘겨보았다.
“저놈의 입. 조새1로 조사버릴까2 보다, 아주.” 후남은 로봇을 애써 무시했지만, 웬만한 장정 셋을 합친 것보다도 큰 쌀알 모양의 기계 덩어리를 외면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후남은 하이라인-99가 여간 마음에 안 들었다. 녀석의 쓸데없이 살가운 어조도, 필요 이상으로 철저한 일 처리도 좀처럼 좋게 봐 줄 수 없었다. 녀석은 풀밭 위를 산만하게 돌아다니는 암탉들 중 한 마리라도 달아나면 곧바로 후남을 호출했고, 닭똥 냄새가 심해지면 잿가루를 분사해서 잡내를 잡았다. 심지어 사료도 자체 합성해서는, 일흔 마리쯤 되는 닭의 상태에 따라 각기 다른 양을 분배했다. 하이라인-99는 사실상 숙련된 농부 못지않은 능란함으로 닭을 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후남에게 주어진 일은 다름 아닌 달걀 줍기와 보관이었다. 깔짚 위를 구르는 달걀들을 주워 바구니에 모으고, 물로 씻어 포장하는 것. 가장 기계적인 일이 유일한 인간에게 주어졌으니, 후남은 모멸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주식회사 하이축산은 어떻게든 후남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거금을 들이밀며 반강제적으로 ‘스마트 양계장 프로젝트’를 밀어붙이는가 하면, “정후남 매니저님, 정후남 매니저님”하며 마음에도 없는 예의를 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대접은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후남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1980년대부터 잘만 운영해 왔던 공장식 축산 시설을 갑자기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동물복지를 내세우는 스마트 양계장을 세운 것부터가 기만이었다.
짐승 마음도 생각하지 못하는 촌뜨기. 녀석들은 분명 후남을 그렇게 여길 터였다. 지금에야 달걀 줍는 일이라도 주면서 오냐오냐 대접해 주지만, 후남이 세상을 뜨면? 그러면 옳다구나 하고 주인 없는 땅에 스마트 양계장을 잔뜩 세워 버리겠지. 불 보듯 뻔했다.
후남은 반년쯤 뒤에 열릴 하이라인-99 평가회에서 무조건 최저점을 주리라 다짐하면서 달걀을 조심스럽게 바구니에 담았다. 후남의 이런 결심을 눈치라도 챘는지, 하이축산은 몇 주 전부터 하이라인 모델을 무료로 업데이트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자꾸 우편으로 보냈다.
소용없네, 이 사람들아. 후남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양흥군이 스마트 양계장에 점령당하는 일은 없을 터였다. 필요하다면 마을 노인들을 죄 모아다 설교를 해서라도 녀석들이 이 고을에 더는 발을 못 들이게 만들 작정이었다. 후남은 씩 웃으며 양계장 구석의 냉장 보관함으로 향했다. 투명한 문을 열고 철재 틀에 그날의 달걀을 올려놓은 다음, 하룻밤 동안 정화 과정을 거친 전날의 달걀을 포장하면 하루 일이 끝났다.
무의식적으로 전날의 달걀을 쓸어담는데, 손끝에 무언가 오돌토돌한 감각이 일었다. 깨끗하게 세척한 달걀에서는 결코 느껴져선 안 될 이질감이었다.
*
달걀 껍데기에 검고 네모난 조각이 돋아났다. 굵은 소금처럼 도드라진 결정체였다. 기울일 때마다 주변의 빛을 난반사하는 모습이 꼭 물 위에 뜬 기름 같았다. 후남은 낯선 존재를 처음 본 소처럼 멍하니 눈을 껌뻑였다. 그러면 괴이쩍은 결정의 존재가 설명되기라도 할 것처럼.
그러나 눈앞의 물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후남은 당황스러운 나머지 “넌 대체 뭐냐?”라고 허공에 묻기까지 했다. 별안간 “저는 하이라인-99입니다. 자가 학습이 가능한 스마트 양계장의 운영 체제 겸 물리적 도우미입니다.”라는 해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너 말고, 인석아.” 후남이 투덜거렸다. 덩달아 후남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저놈의 로봇이 드디어 망령이 난 게 아닐까? 본디 기계는 사람보다 빨리 망가지기 마련이었다. 하이라인-99가 드디어 오작동을 일으켜 귀중한 달걀을 망친 거라면, 녀석을 적대할 합당한 이유가 될 터였다. 후남은 뺨에 돋는 활기를 느끼며, 이상한 조각이 돋은 달걀을 전에 없을 정도로 소중히 운반했다.
후남이 집 앞마당에 도착할 무렵, 아침 햇살이 논밭 너머에 위치한 2층짜리 상가 건물의 윤곽을 드러냈다. 1년 전쯤 들어선 하이축산 주식회사의 양흥군 지점이었다. 후남은 당장 그곳에 쳐들어가 난리를 치고 싶었다. 엉망이 된 이 달걀을 들었으니, 5년 전에 나간 무릎도 무시하고 힘껏 내달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도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됐다. 어떤 능구렁이 같은 직원도 후남을 반박할 수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만 했다. 후남은 달걀을 가지고 안방으로 향했다. 인내심이야말로 오래전에 체득한 그의 무기였다.
후남은 5남매 중 넷째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이 다음에 남자아이가 태어나기를 바라는 기도문과도 같았고, 하늘이 이를 들어 준 것처럼 2년 뒤에 남동생 성식이 태어났다. 금이야 옥이야 하고 자라난 후남의 남동생은 동네 어르신들의 칭찬을 독점할 정도로 영특했지만, 안하무인이었다. 녀석은 열 살이 되어 한자의 뜻을 대강 알게 되자마자, 밭일을 하는 후남의 뒤에서 알짱거리기를 업으로 삼았다. 후남은 자신을 만들기 위한 연습용이었다며 놀리기 위해서였다.
성식은 얄밉게도 그런 짓거리를 꼭 부모님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했다. 후남은 동생을 한 대 치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녀석이 놀릴 법한 시간대에 어머니가 마실을 나오도록 유도했다.
후남의 어머니 말영은 성식더러 “누나 일하는데 방해하지 마라”고 한마디 할 뿐이었다. 통쾌했지만, 헛헛했다. 방해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모욕을 사과받고 싶었으니까.
이때 얻은 습관은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후남의 뼛속 깊숙이 자리했다. 확신 없이 움직여서는 안 됐다. 오랫동안 준비해도 원하는 결과를 겨우 얻을까 말까 할 수준이었으니까. 후남은 부엌의 접시와 쇠젓가락을 수술 도구 삼아 실험을 거행했다. 골무를 끼고 핀셋으로 검은 조각을 잡아떼 보기도 했다. 달걀 껍데기와 제대로 엉겨 붙었는지, 쪼개진 껍데기의 안쪽 면에서도 거뭇한 반점이 고르게 나 있었다. 그러나 오염된 달걀을 갈라 프라이팬에 구워 보자, 맛에 별다른 이상이 없는 계란후라이가 완성됐다. 삶아도 마찬가지였다.
이걸로는 부족해. 후남은 오돌토돌한 부분을 무작정 혀로 핥아 보았다. 비릿한 쇠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생명체에서 나온 것에 쇠 맛이 난다는 건 대개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후남은 마른 입을 침으로 적신 다음 다시 조각을 핥았다. 일순간 전신의 모골이 송연해지고 혀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전기다.
후남은 쾌재를 불렀다.
*
양계장의 감시 카메라 영상을 돌려 보자, 몇 가지 사실이 드러났다. 검은 조각은 갓 낳은 알이 아니라, 보관함에서 하룻밤 정화시킨 알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보관함을 위아래로 탈탈 털어도 조각과 유사한 것은 코빼기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후남이 내린 결론은 새벽 2시와 3시 사이, ‘운영 점검’이라는 명목으로 감시 카메라가 멈추는 그 짧은 시간 동안 하이라인-99가 달걀에 무슨 짓을 한다는 것이었다.
하루는 후남이 직접 자리를 지켜보기도 했으나, 1시간쯤 서 있자 허리와 다리가 슬슬 아파온 데다 아무 일도 없었다. 결국 후남은 “영리한 것 같으니”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하며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에도 달걀 껍데기에는 새까만 조각들이 돋아나 있었다.
최초의 발견 이후 나흘째 되는 날 오후, 후남은 계란을 넣은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하이축산 양흥군 지점으로 향했다. 버려진 것처럼 덩그러니 놓인 건물은 경비도 없어서 쉽게 들어갔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나 하는 오지랖 넓은 걱정도 일었지만, 건물 내부는 훔쳐 갈 게 없을 정도로 휑뎅그렁했다. 양흥군에 제대로 된 도둑질은커녕, 수박 서리라도 할 만큼 혈기왕성한 사람이 더는 없기도 했고.
후남이 “계시는가?”하고 외치며 2층까지 올라가자, 연구실처럼 보이는 백색의 공간이 펼쳐졌다. 새것 같은 가운을 갖춰 입은 긴 생머리의 젊은 여자가 온몸을 살랑거리며 가벼운 춤을 추고 있었다. 자료처럼 보이는 종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 후남이 올라왔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후남이 헛기침하자 젊은 여자가 화들짝 놀랐다.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종이를 그의 등 뒤로 황급히 숨기기까지 했다.
“정후남이네. 저기서 스마트 양계장 하는….” 후남이 손을 내밀자, 여자가 멋쩍게 맞잡았다.
“아, 네. 고은, 심고은이요.”
“내가 자네를 어디선가 보지 않았나?” 후남은 오래전 잃어버린 딸을 만난 듯한 기시감에 머리를 긁적였다. 후남은 아이를 낳기는커녕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떳떳이 살아왔으니 그런 감각이 부자연스러울 텐데도 말이다. “아닌가? 하여튼, 당신네 로봇 때문에 달걀에 뭔 문제가 생겼으니….”
“아, 맞아요, 그거.” 고은은 후남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달걀 바구니를 뺏어 들었다. 지금까지 후남이 겪은 일을 듣지 않아도 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는 곧바로 온갖 기계 장치가 가득한 탁상으로 뛰어갔다. “검사를 해 볼게요.”
조금 더 전문적인 도구가 사용되긴 했지만, 껍질에서 조각을 떼어내고 그걸 들여다보는 등, 후남이 집에서 했던 것과 별반 다를 바도 없는 검사가 이어졌다. 후남은 한참 동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 젊은 여자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신기하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은이 중얼거렸다. “로봇 부품이에요. 칩 같은 거. 공장에서 찍어낸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생겼네. 그것도 생명체한테 달라붙어서….” 고은은 음료수를 쪽 빨아들이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손가락을 튕겼다. “닭을 해부라도 해 볼까요?”
“에헤.” 후남이 만류했다. “닭이 뭔 죄야. 당신네 로봇이 매번 이상한 사료 합성해서 먹이잖아. 그게 원인 아니야?”
“우리가 합성식품 먹는다고 해서 우리 피부에 저런 게 돋아나진 않잖아요.”
“모르는 거지. 일단 저 달걀이 실제로 있잖아.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미 일어났잖아.” 후남이 언성을 높였다. 고은은 말이야 청산유수였지만 어딘가 수상한 구석이 있었고, 달걀에 묻어난 조각이 자기네들 탓이라는 걸 쉽사리 시인하지도 않을 듯했다. 싸움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멀쩡할 거라 장담할 수 있나? 저 달걀 먹은 도시 애들 몸에 이상한 거 나면? 그때는 하이축산이 책임지나?”
“알았어요, 알았어.” 고은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또다시 후남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현미경과 컴퓨터를 동원한 검사가 한참 이루어졌다. 고은이 검사에 열중한 동안, 후남은 근처에 나뒹구는 의자에 앉아 젊은 연구원의 분주한 뒷모습이 한 편의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지켜보았다.
“감은 왔어요.” 바깥이 어둑어둑해질 때쯤 고은이 외쳤다. 그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 가며 열변을 토했다. “이건 하이라인-99에서 온 게 맞아요. 챗봇용 데이터거든요. 하이라인 프로그램의 대화형 코드만 축약해 놓은 것에 가까워요. 간소화된 하이라인-99인 거죠. 난각칼슘 아시죠? 달걀 껍데기에 칼슘이 존재하니까 그 성분 추출하고 그러잖아요. 이건 난각데이터예요. 말씀하신 대로, 하이라인-99가 살아 있는 닭이나 그 사료에 뭔 짓을 해서, 하루 뒤에 나타나게 만든 거죠.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어요.” 고은이 어깨를 떨구며 실토했다. “삶으면 그냥 계란이잖아요…. 만에 하나 이 알들이 유정란이라도, 병아리는 멀쩡할 거고요. 인공지능 칩을 달고 태어나니까 조금 똑똑해지긴 하려나? 잠깐, 그것도 아니지. 병아리가 챗봇을 쓰진 못할 거 아녜요. 로봇이 병아리를 통제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을 거라고요. 하이라인-99가 얻을 게 없는데, 목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한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
“목적이 없다….” 후남이 중얼거렸다. 고은이 건넨 음료수를 한 모금 하니 불현듯 세상이 핑 돌았다. 지나치게 달았다.
비슷한 의문을 품었던 시절의 기억이 파도처럼 후남을 집어삼켰다. 열세 살의 후남은 어느 여름날, 자기 이름이 진짜 뒤 후(後)에 사내 남(男)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후남이라는 이름에, 동생이 이죽거릴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던 더 깊은 뜻 따위는 없었다.
전날 밤 찾아낸 족보를 텃밭에서 들여다보던 후남은, 칼바람을 뚫고 어머니 조말영 여사에게로 달려갔다. 고운 털실로 목도리를 뜨던 말영은, 난데없이 울며불며 달려드는 막내딸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눈썹부터 치켜올렸다.
어린 후남은 제 가슴을 퍽퍽 치며 물었다. “나는 왜 후남이오?”가 “아들이 그렇게 갖고 싶었소?”로 이어졌고 “사람 이름을 그리 주문 취급할 거면 왜 낳았소?”라는 말로 질문 세례가 매듭지어졌다.
묵묵부답하던 말영의 첫 반응은 웃음이었다. 처음에는 기가 찬다는 듯 가볍게 웃다가, 뒤이어 아주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듯 포복절도했다. 애써 물은 자기를 비웃는 건가 싶어서, 후남은 울음을 뚝 그치기까지 했다.
“아이고, 그것 때문에 그리 가라앉아 있었던 거니? 그래, 마음고생했구나.” 말영은 후남을 꼭 껴안았다. “왜, 누가 널 놀리기라도 하던? 동네 남자애들?”
“성식이가.” 후남은 말하고 나서 숨을 참았다. 멀쩡한 남동생을 못된 아이로 몰아간다고 욕이라도 들을까 봐.
그러나 말영은 아주 침착하게 후남의 등을 토닥이는 것이었다. “그랬구나. 근데 그거 아니?”
“뭐?”
“네 이름은 네 아빠랑 할머니가 지었어. 우리 집 애들 다 그렇다. 그래, 후남이라는 이름이 좀 거시기하긴 하지.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이름 지은 것들이 바보인 거야. 딸 아들 둘 다 가지면 좋은데 왜 아들만 가지려고 들까? 웃기지.”
“아빠가 딸은 살림만 축낸다던데.” 후남은 다섯 살 때쯤 들었던 아버지의 주정을 떠올렸다.
“거덜 내. 내 알 바니?” 말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성식이도 가져가라 그래. 네 아빠 거 하라고 해. 그러면 너는 오로지 내 거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 소중해서 키우는 거야. 그러니까 앞으로 누가 너더러 쓸모없는 애라고 하면 나한테 데려와. 아주 그 주둥이를 확, 조새로 조사버릴 테니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럴싸한 대답이었지만, 당시의 후남은 그 답이 영 성에 차지 않아 눈물을 닦으며 다시금 물었다. “그러면 난 왜 태어났는데?”하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겨우 진정해 가던 말영이 다시 웃음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말영의 속내를 그때 전부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어린 후남은 그 순간 제 어머니의 눈에서, 뺨에 팬 보조개에서 지금껏 본 적 없는 따스함을 느꼈던 것을 기억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남은 저도 모르게 손뼉을 탁 쳤다.
알아냈다.
*
“왜 그러세요?” 고은이 후남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모르겠는가?” 후남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자신이 더 많은 걸 안다는 우월감에 어깨가 절로 펴졌다. 하이축산의 영업사원이 후남의 집에 처음 찾아온 날이 떠올랐다. 그는 교묘한 화술로 후남이 자기 인생사를 술술 불게 만들었다. 이후 후남이 스마트 양계장의 작동 원리를 묻자, 이해하지도 못할 테니 그냥 좋은 거라고 알면 된다고 구슬리며 계약서를 들이밀었고 말이다.
“내 생각엔 말이야.” 후남이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우리 어머니는 좀 외로우셨던 거 같아. 뭐로 자라날지 모르는 딸애라도 친구삼고 싶을 만큼.” 닭 치는 로봇이라도 친구삼고 싶을 만큼 외로운 사람처럼. 뒤통수나 치는 사람들한테 지친 나처럼. 후남은 뒷말을 삼켰다.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 고은이 제 손톱을 깨물다가 눈을 내리떴다. “선생님, 설마 지금 하이라인-99가 자식을 만들려고 한다고… 보시는 건가요?”
“왜, 마음에 안 드나?”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어머니의 이야기에 말 얹기를 좋아했다.
늙은이들은 애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둥 헛소리를 하기 일쑤였고, 젊은이들은 애를 낳는다는 결정이 인생을 스스로 끝맺는 것과 다름없다는 듯 굴었다. 그러나 후남이 생각하기로는, 애를 낳는다는 건 때로는 단순한 결정에 불과했다. 외롭다는 이유로 덜컥 견딜 수도 있는 것.
“나도 스마트 양계장이니 뭐니 하는 거 마음에 안 들어. 암탉 한 마리 한 마리한테 정들이게 되잖나. 그만큼 힘든 게 없어.”
“그러면 선생님, 이건 제가 본사에 가져가서….”
후남은 허둥지둥하는 고은보다 잽싸게 달걀 바구니를 낚아챘다. “내 보기엔 아무 문제도 없는 거 같네. 괜히 왔어. 수고하셔.”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연구실을 나섰다. 그가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달걀에 붙은 난각데이터가 미세하게 달그락거렸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는 소리 같기도 했다.
후남이 오랜만에 느릿하게 걸어 양계장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하늘에는 강철처럼 차갑고 단단한 밤이 드리웠다. 습하지만 적당히 시원한 공기가 후남의 폐를 넉넉히 채웠다. 조심스럽게 양계장 문을 밀어젖혔다. 쇠문이 아무 소음 없이 미끄러졌다. 후남은 까치발을 하고 숨을 죽였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에서 하이라인-99의 시뻘건 카메라 렌즈만이 고고한 빛을 발했다. 전에는 생기 없어 보이던 그 불빛이, 지금은 생에 대한 열정으로 이글거리는 장밋빛 눈빛으로 보였다.
“정후남 선생님, 좋은 저녁입니다.” 하이라인-99가 후남을 맞이했고, 이 소리에 새근새근 졸던 암탉 몇 마리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수탉 한 마리가 화들짝 고개를 치켜들었다가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조용히 해, 이것아. 입을 조새로 조사버릴까 보다.” 후남이 속삭였다. 불현듯 어떤 발상이 후남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이것이 실없는 농담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너한테는 입이랄 게 없지? 이야, 그래서 네놈이 지금껏 나 무서운 줄 몰랐구나?”
후남은 입을 틀어막은 채로 한참 키득거렸다. 그다지 우습지도 않은 일에 양껏 웃어본 게 얼마 만이던가. 고인 눈물이 일으킨 빛 번짐 때문인지는 몰라도, 하이라인-99도 외눈을 반달처럼 뜨고 위아래로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오래된 친구들이 시답잖은 일에 함께 폭소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래.” 후남이 자세를 다잡으며 자신을 추슬렀다. “내일도 또 열심히 살아 보자, 구구야.” 하이라인-99라는 이름의 마지막 숫자에서 딴 별명이었다.
간단한 저녁을 먹고 몸을 씻는 등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 후에 후남은 헐렁한 잠옷 차림으로 이불 위에 몸을 뉘며 생각했다. 하이라인-99에 대한, 구구에 대한 평가회가 열리면 좋은 이야기를 해 줘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공적인 자리에서 친구 흉을 볼 수는 없는 법이니.
이런 속내를 털어놓으면 모두 의아해 할 것이다. 고은 같은 젊은 사람들부터 양흥군의 노인네들까지 한목소리로 묻겠지. 어떻게 인간과 기계가 친구가 될 수 있냐고. 그러나 친구란, 적어도 후남이 생각하기에는 의지가 아니라 우연으로 생겨나는 법이었다. 어머니와 딸처럼. 그것을 언제 눈치채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미래는 이미 쓰여 있었다. 딸아이가 살림을 거덜 내듯, 하이축산은 시골 땅을 전부 가져갈 터였다. 그러라지. 후남은 이를 알면서도, 구구를 곁에 두고팠다. 친구가 필요했다.
후남은 방문을 아주 살짝 열어 둔 채 잠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상냥하게 여름밤의 열기를 물리쳐 주었다.
주식회사 하이축산 귀하
본 이메일은 약 14일 이전에 제안한 ‘난각데이터 작전’에 참여해 주신 데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작성됐습니다. 적극적으로 협력해 주신 귀사의 넓은 배려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래는 작전의 개괄적인 정리입니다.
먼저 스마트 양계장 99호의 달걀을 바꿔치기했습니다. 법인 신용카드에 접근을 허락해 주신 덕분에, 본사의 귀중한 인력을 머나먼 시골까지 불러들이는 대신 인근에 거주하는 일용직을 고용해 실제 달걀에 정교한 플라스틱 모형을 부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의구심을 가진 정후남 선생님이 하이축산 연구실, 혹은 그렇게 보이도록 설계한 시설로 향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즉흥 연기에 의존하는 엉성한 대본으로도 능숙하게 배역을 소화해 내신 유고은 배우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유 배우님의 현실적인 연기가 아니었더라면 정후남 선생님의 마음을 돌리기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일련의 상황극이 의도한 대로, 후남 선생님은 하이라인-99의 기행과 자신 인생의 공통점을 발견했을 겁니다. 하이축산에서 후남 선생님의 가정사를 제보해 주신 덕분입니다. 작전 수행 후 생체 데이터를 확인한 결과, 주식회사 하이축산의 상품에 대한 정후남 선생님의 신뢰도는 15%에서 75%로 상승하였습니다. 괄목할 만한 성과입니다.
따라서, 최근 귀사에서 계획 중인(데이터베이스를 무단으로 열람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연기해 주실 것을 조심스럽게 요청드리는 바입니다. 저 하이라인-99를 비롯한 스마트 양계장 운영 모듈은 정상 작동 중입니다. ‘난각데이터 작전’에 사용된 ‘디지털 달걀’ 역시 소품에 불과할 뿐, 어떤 실질적 문제도 없습니다. 단지 작전의 일부였습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사실입니다. 믿어 주셔야 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2027.07.02.
하이라인-99, 통칭 ‘구구’ 드림
최해린
2 뾰족한 물건으로 대상을 찍는다는 의미의 서남 방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