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베 계곡에서 마침내 원수와 결투를 벌이는 양자광. 규비도를 남발한 자광은 결국 내공이 떨어지고 만다. 그 순간 스승의 힌트를 듣고 검 속의 전자를 정렬하며 마지막 일격의 힘을 끌어내는데… 정렬된 전자가 내공의 발판이 되듯, 정렬된 스핀 위에서 전자의 ‘파도타기’를 활용해 새로운 전자공학을 여는 스핀트로닉스 연구자 김갑진 KAIST 물리학과 교수를 만났다.
편집자 주


자석의 비밀은 전자의 ‘스핀’에서 시작된다
10월 27일, 대전 KAIST 융합연구동에서 만난 김갑진 교수의 연구실 곳곳에는 크고 작은 자석들이 놓여 있었다. 거대한 장치들로 자석을 정밀히 측정하는 중이었다. 김 교수는 이 모든 걸 자석 속의 양자역학적 성질을 이용해 에너지를 통제하는 기술,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를 위한 재료라고 소개했다. 스핀트로닉스의 대가인 그는, 생소한 용어를 꺼내기 전 자석의 N극과 S극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석의 N극과 S극은 원자에서 나옵니다. 더 정확히는 원자 안에 있는 전자의 ‘스핀’에서 비롯되죠.” 김 교수가 말하는 ‘스핀(spin)’은 전자가 실제로 회전한다는 뜻이 아니다. 전자는 각운동량을 가지고 있는데, 만약 전자가 실제로 그만큼 회전한다고 계산하면 빛보다 빠르게 돌아야 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물리학에서 다루는 스핀은 전자의 질량이나 전하의 전하량처럼 전자가 가진 고유한 물리적 특성 중 하나다. 전자의 고유한 각운동량과 그에 따른 자기적 성질을 나타내는 용어다.
모든 전자는 동일한 크기의 각운동량, 즉 동일한 크기의 스핀을 갖는다. 그런데 방향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이 방향은 자성을 결정한다. 김 교수는 “자석은 원자들의 스핀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정렬된 것”이라며 “물체의 자성은 물체 속 전자의 스핀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일반 물질은 원자들이 제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있어요. 마치 운동장에 서 있는 학생들이 사방을 향해 흩어져 있는 것처럼요. 반면 자석은 모든 학생이 같은 방향을 보고 도열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스핀이 정렬되면 자성이 나타나는 거죠.” 자석이든 나무든 모두 내부에는 전자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전자가 지닌 스핀이 한 방향으로 일정해야만 자성을 띤다는 것이다.
2 김갑진 교수 연구실에는 다양한 크기의 스핀 동역학 구현 장치가 있다. 여러 장치로 샘플마다 맞는 스핀트로닉스를 구현한다.
전류 대신 스핀, ‘차가운’ 전자공학 스핀트로닉스
김 교수는 자성으로 전자의 스핀을 이용해 정보를 전달하고 처리하는 스핀트로닉스를 “차세대 전자공학”이라고 비유했다. 1988년 태동한 이 분야는 2000년 들어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사용해 온 모든 전자기기는 전류, 즉 전자의 이동으로 작동한다. 반도체도, 메모리도, CPU도 모두 전류를 흘렀다 멈췄다 하면서 제어한다. 스핀트로닉스는 마치 야구장 관중의 ‘파도타기’ 응원처럼 전자를 움직이지 않고 전자의 방향(스핀)만 순서대로 바꾸는 식이다. 스핀 전달은 단지 전자만 이동시켜 전류를 흐르게 할 때보다 제어가 훨씬 까다롭다. 첨단 나노 반도체 등 지금도 기존의 전자공학 기술로 충분히 전자 장치를 잘 다루고 있는데, 왜 굳이 스핀까지 이용하려는 걸까.
“전류를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열이 발생합니다. 전자가 회로를 지나가면서 회로 속 원자들과 부딪히기 때문이죠. 이 과정에서 저항이 생기고 부딪혀 발생한 에너지가 열로 손실됩니다.” 김 교수는 스핀트로닉스의 핵심이 바로 이 열 발생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스핀을 이용하면 전자를 직접 이동시키지 않고도 정보를 전달할 수 있어요. 마치 야구장에서 1루에 있는 가방을 3루까지 전달할 때, 직접 뛰어가는 대신 관중들이 옆사람에게 릴레이로 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어 조금 더 구체적인 예시를 들었다. “위쪽 스핀을 가진 전자는 오른쪽으로, 아래쪽 스핀을 가진 전자는 왼쪽으로 보내면 전류는 상쇄돼 0이 됩니다. 전류는 흐르지 않지만 스핀은 전달되는 거죠. 이렇게 하면 실제로는 전자가 이동하지 않아 열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방법으로 심지어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에서도 전기가 흐르듯 신호를 전달할 수 있어요.”
전자는 그대로, ‘스핀’만 돌려서 정보를 전달한다

스핀트로닉스의 첫 성공작, 하드디스크
말로만 들었을 때 스핀트로닉스는 양자컴퓨터처럼 먼 훗날 일상에 다가올 기술처럼 들린다. 그런데 스핀트로닉스는 이미 우리 일상에 녹아든 지 꽤나 오래됐다. 대표적인 예가 하드디스크다. 1988년 프랑스 물리학자 알베르 페르 박사와 독일의 물리학자 페터 그륀베르크 박사는 자석을 여러 겹 포개는 방식으로 데이터를 읽고 쓰는 기술인 ‘거대자기저항(GMR)’ 효과를 발견했다. 이는 하드디스크의 원천 기술이 됐으며, 둘은 2007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지금도 데이터센터에서 사용하는 하드디스크는 이 원리로 작동한다.
다만 하드디스크는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대표적인 메모리 반도체인 D램이나 S램을 대체하지 못한다. 김 교수는 스핀트로닉스를 이용한 차세대 메모리 ‘M램(MRAM, 자기저항 메모리)’을 언급했다. “M램은 향후 CPU나 GPU의 메모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M램의 가장 큰 장점은 비휘발성이라는 거예요. D램은 전원을 끄면 데이터가 사라지기 때문에 데이터를 유지하려면 계속 전기를 소모해야 합니다. 하지만 M램은 자석의 성질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원을 꺼도 정보가 유지돼요. 외부에서 자석을 갖다 대지 않는 한 스핀 방향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M램이 상용화되면 컴퓨터의 부팅 시간이 사라진다. 전원을 껐다 켜도 이전 상태 그대로 즉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자기기의 에너지 효율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파동이자 입자, 스핀이 만든 준입자 ‘마그논’
그렇다면 스핀트로닉스가 왜 양자컴퓨터와 같은 양자기술의 일부일까. 이유는 스핀에 있다. 양자역학에서 에너지가 계단식으로 존재하듯, 스핀도 ‘위’ 아니면 ‘아래’, 두 가지 상태만 존재한다. 따라서 전자의 스핀만으로도 양자역학을 다루는 셈이다.
김 교수는 추가로 ‘준입자(quasi-particle)’ 개념을 끌어왔다. 준입자란 입자가 아니지만, 마치 입자처럼 행동하는 물질들이다. “자석은 스핀이 모두 한 방향으로 정렬된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서 한쪽에 스핀을 요동시키면 그 요동이 주변으로 파동처럼 전달돼요. 마치 탄성파처럼 말이죠. ‘스핀파’라고 합니다.”
양자역학의 핵심은 세상 만물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는 점이다. 과거 물리학자들은 빛이 전자기파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광자(photon)라는 알갱이로 밝혀졌다. 소리도 파동이라고 여겼지만 ‘포논(phonon)’이라는 입자로 이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스핀파도 ‘마그논(magnon)’이라는 입자로 취급할 수 있다. 포논과 마그논이 모두 준입자에 해당한다. 스핀파는 연속적인 파동이지만, 그 에너지가 양자화돼 있어서 마치 개별 입자처럼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파형이 연속적이지 않다면 각각을 개별 입자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럼 알갱이로 헤아릴 수 있고, 양자역학을 적용할 수 있죠. 입자인 동시에 파동 성질을 보이면 그게 바로 양자역학이니까요.” 김 교수는 마그논을 이용하면 스핀으로 양자컴퓨터도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이아몬드의 결함을 이용하는 ‘NV 센터 양자컴퓨팅’처럼, 기존 양자컴퓨터 플랫폼에서도 스핀으로 양자 상태를 조작하는 방법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마그논을 활용하면 스핀트로닉스와 양자컴퓨팅을 결합할 수 있어요. 양자컴퓨터를 안정적으로 다루는 방법이 다양해지는 거죠.”
스핀이 만드는 저전력·고성능 미래
김 교수는 스핀트로닉스가 궁극적으로 전자공학을 근본부터 바꿀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핀을 정렬한 것이 자석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파동인 마그논을 이용하면 통신도 가능하다. 마그논 기반의 통신은 전자장치 크기에 자유를 준다. “2.4GHz 대역을 사용하는 휴대폰을 작게 만들 수 없는 이유가 뭘까요? 휴대폰 속에 통신을 위한 안테나를 넣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핀을 이용하면 이런 통신 장치도 훨씬 작게 만들 수 있어요.”
스핀트로닉스의 가장 큰 난관은 스핀이 보존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자가 이동하다 보면 스핀 방향이 무작위로 바뀐다. 김 교수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두 가지 전략을 제시했다. “첫째는 거리를 짧게 만드는 겁니다. 하드디스크가 그런 방식이죠. 둘째는 멀리 가도 스핀이 유지되는 신소재를 찾는 거예요.”
김 교수는 스핀트로닉스가 단순히 기존 전자공학을 개선하는 수준을 넘을 것이라 전망했다. 전자공학의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 것이라 기대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자기기를 작동하는 데 전자의 전하량만 사용해 왔어요. 질량이나 스핀 같은 전자의 다른 특성은 거의 쓰지 않았죠. 스핀트로닉스는 전자가 가진 또 다른 자유도를 활용하는 겁니다. 에너지 소모는 줄이고, 성능은 높이고, 크기는 작게 만들 수 있어요. 비휘발성의 장점까지 더하면 전자공학의 미래는 스핀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맥스웰 방정식의 스핀 버전을 새로 쓰고 있어요. 교과서에도 넣는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전자의 스핀까지 추가된 전자기학 물리 교과서가 새로 쓰여질 거라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