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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이중나선의 아버지’의 문제적 삶, 제임스 왓슨을 되돌아보며

▲Cold Spring Harbor Laboratory/Jan Arkesteijn(W)

 

제임스 왓슨이 2025년 11월 6일(현지시간)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대단한 과학자였다는 사실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제임스 왓슨은 1953년 그의 동료인 프랜시스 크릭과 함께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미국의 생물학자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과학자였느냐 묻는다면 논란이 뒤따른다. 왓슨의 업적은 훌륭했으나, 위대하다고 불리기엔 그에게 많은 결함이 있었던 탓이다. 좋거나, 나쁘거나, 평생 화제를 불러일으킨 제임스 왓슨의 삶을 되돌아봤다.

 


“DNA는 아직 신비에 싸여 있었다. 따라서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든 주제로 선택할 수 있었지만 누가 그 비밀을 밝혀낼지, 그리고 과연 DNA가 그렇게 가치 있는 주제인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경쟁은 끝났다. 이 경쟁에서 이긴 승리자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경쟁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았고, 신문에 보도된 기사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제임스 왓슨이 1968년 발표한 책 ‘이중나선(궁리, 2019)’의 첫번째 장에 쓰인 내용이다. 11월 6일 향년 97세로 생을 마감한 제임스 왓슨은 DNA가 이중나선 구조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밝힌 공로로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생물학자다. 그가 자신의 저서에서 말한 대로, 1940년대 중후반 과학계에서는 DNA란 분자에 유전정보가 적혀 있을 거라는 추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DNA에 대해 밝혀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떻게 생긴 분자일까. DNA는 어떻게 유전정보를 저장할까. 당시 과학자들이 몰두하던 수수께끼였다.


DNA의 비밀을 풀던 수많은 과학자 가운데 왓슨과 영국의 생물학자인 그의 동료, 프랜시스 크릭은 아직 주목받지 못하던 치기어린 도전자였다. 두 사람은 1951년 영국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만나 DNA의 구조를 밝히기 위한 전세계 과학자들의 경쟁에 뛰어들었다. 그때 왓슨은 23세, 크릭은 35세였다. 그들의 라이벌은 당대 최고의 화학자로 꼽히던 미국의 라이너스 폴링이었다. 분자 간 결합에 관한 한 세계에서 제일가는 전문가였던 폴링에 비해서, 아직 젊은 과학자였던 왓슨과 크릭은 유력한 우승 후보로 거론되지 않던 언더독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해냈다. 1953년의 일이었다.

 

▲Nature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발표한 논문은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생물학의 판도를 뒤바꿨다. 논문의 길이는 단 두 장이었다.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화제의 과학자

 

1953년 4월 25일 왓슨과 크릭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핵산의 분자 구조: 디옥시리보핵산(DNA)의 구조’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고작 두 페이지짜리인 이 논문이 생명과학의 판도를 바꿨다. 논문에서 이들은 DNA가 두 가닥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 사슬이 나선 형태로 꼬인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DNA가 삼중나선구조라고 생각하던 당시 통설과 정반대되는 주장이었다. doi: 10.1038/171737a0


왓슨과 크릭은 두 가닥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는 아데닌과 타이민, 구아닌과 사이토신이라는 네 종류의 염기가 쌍을 이뤄 연결되는 방식으로 결합한다고 주장했다. 아데닌은 반드시 타이민과, 구아닌은 반드시 사이토신과 결합한다. 따라서 두 가닥의 폴리뉴클레오타이드 속 염기서열은 사실상 같은 정보를 품게 된다. 이들은 논문에서 “이처럼 염기가 쌍을 이뤄 결합한다는 모델은 유전물질 속 유전정보가 복제 가능하다는 기존 학설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한다.


DNA의 구조를 밝힌다는 건, 생명체 내에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지 밝힌 것이기도 했다. 1962년 노벨위원회는 앞서 소개한 논문 속 구절을 “과학 문헌 역사상 겸손하기로는 가장 유명한 문장 중 하나”라고 평했다. 그만큼 대단한 성과였다.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이후로 왓슨과 크릭은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 뒤에서 주목받지 못한 ‘다크 레이디(dark lady)’가 있었다는 사실은 왓슨과 크릭을 평생동안 따라 다녔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왓슨, 크릭과 같은 시기 영국의 킹스 칼리지 런던대에서 DNA 결정을 X선으로 쵤영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던 생물물리학자였다. 그가 촬영한 이미지 중 ‘사진51’은 왓슨과 크릭이 DNA 구조를 밝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점은, 프랭클린의 동료였던 모리스 윌킨스가 사진 51을 프랭클린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공유했다는 지점이었다. 윌킨스는 왓슨, 크릭과 함께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프랭클린은 그보다 4년 전 난소암으로 투병하다 사망한다. 결정적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왓슨은 자신의 저서 ‘이중나선’과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등에서 프랭클린을 “DNA 구조를 촬영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의미를 제대로 해석할 능력은 없었던 고집불통”으로 표현했다.

 

▲A. Barrington Brown
제임스 왓슨(왼쪽)과 프랜시스 크릭이 1953년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자신들의 DNA 모형을 소개하고 있다.

 

노벨상을 팔아버린 논란의 과학자

 

젊은 나이에 일생일대의 업적을 낸 왓슨이지만, 그의 성과는 DNA의 구조를 밝혀내는 데에서 끝나지 않았다. 왓슨은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캘리포니아공대, 하버드대 등을 거친 다음 1968년엔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 연구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뛰어난 행정가로서 제2의 삶을 시작한다. 왓슨이 부임한 이후,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는 뉴욕 롱아일랜드의 작은 사설 연구기관에서 노벨상 수상자 8명이 거쳐간 세계 최고의 생명과학 연구소로 자리매김한다.


한편, 1990년부터 미국 국립보건원(NIH)에서 진행한 ‘인간 게놈(유전체) 프로젝트’의 초대 책임자를 맡았던 것도 왓슨의 주요 성과 중 하나다. 인간의 유전자 속 30억 쌍 염기서열을 모두 분석해,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가졌던 프로젝트다. 2001년 인간 게놈 지도 초안을 완성하는 데 성공하면서 유전질환을 치료하고, 나아가 인간을 유전자 단위에서 이해하게 된 시작점이 됐다.


DNA 구조를 밝힌 왓슨과 크릭 중에서 늘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사람은 왓슨이었다. 그 이유로는 주로 왓슨이 책을 썼기 때문이라는 차이점이 꼽힌다. 왓슨은 좋게 말해서 시원시원하고, 나쁘게 말해서 무례한 화법을 구사하던 이였다. 그가 거침없이 써 내려간 자서전 ‘이중나선’ ‘유전자, 여자, 가모브’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는 불편하리만치 솔직한 과학자의 삶이 가감없이 적혀 있다.


세 권의 책은 그에게 유명세를 가져다 줬지만, 거꾸로 그가 대중의 비난을 받을 계기도 함께 줬다. ‘이중나선’을 통해서는 그의 여성차별적인 시선, 그리고 동료들을 폄하하는 태도가 주목을 받았다. 왓슨이 2007년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 출간을 기념해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와 인터뷰하던 도중 한 말은 그가 평생 쌓은 커리어에 커다란 오점을 남겼다.


그는 인터뷰에서 “아프리카의 미래에 대해 본질적으로 비관적이다”라며 “우리의 사회 정책은 흑인들의 지능이 우리와 같다는 전제 위에 세워져 있지만, 모든 연구 결과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고 했다. 이어 “모든 인간이 평등하길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망이지만, 흑인 직원들과 직접 일해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영국의 언론사 ‘인디펜던트’지는 이 발언을 두고 “세계 각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 ‘과학의 탈을 쓴 인종차별주의’라 비판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왓슨은 즉시 “내 믿음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전혀 없었다”며 사과했지만,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는 그에게 정직 처분을 내렸다.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는 그를 명예 위원으로 남겨뒀다가, 이후 2019년에도 왓슨이 비슷한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을 계기로 그의 모든 직책을 박탈했다.


이어 2014년 왓슨은 가족 부양과 과학 연구 지원을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노벨상 메달을 경매에 부쳐 또다시 논란의 중심이 됐다. 이 경매를 두고 ‘왓슨이 자신을 버린 과학계를 원망한다는 제스처’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었다. 러시아의 재벌 알리셰르 우스마노프가 메달을 약 53억 원에 구매한 뒤, 다시 왓슨에게 돌려줬다. 그를 위대한 과학자로 여기는 이가 적어도 하나쯤은 있었던 셈이다. 


제임스 왓슨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세계 각국의 언론은 그의 부고를 전하며 왓슨이 남긴 위대한 성과 뒤에 ‘그러나’로 시작되는 문장을 남겼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왓슨과 가까웠던 동료들은 오래전부터 그의 공과가 엇갈리는 유산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했다”고 썼다. 영국의 BBC는 “그러나 그의 명성과 업적은 그 자신이 한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발언에 의해 큰 상처를 입었다”고 평했다. 미국의 뉴욕타임즈는 “그러나 그의 커리어는 2007년 그의 발언을 계기로 불명예스러운 끝을 맞았다”고 했다. 


왓슨 본인은 마지막 책 ‘지루한 사람과 어울리지 마라(이레, 2009)’의 들어가는 말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평한다. 아래 문장은 사실 왓슨이 자신의 삶을 본받으란 의도로 쓴 말이다. 그러나 그가 떠난 이후, 왓슨의 말은 또 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다지 모범적인 사례는 아니지만’ 나름의 교훈을 준 그의 삶을 되새겨본다.  

 

▲Shutterstock
영국 캐번디시 연구소 인근의 음식점 ‘이글(Eagle)’은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매일 식사를 하며 DNA 연구 이야기를 나눴던 ‘생물학계의 성지’로 남았다. 왓슨과 크릭이 DNA가 이중나선임을 처음 밝힌 곳도 이글이었다.

 


“(내 이야기는) 과학자의 성장사로서 그다지 모범적인 사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 내가 험난한 과학계와 학계를 헤쳐 나가고자 어떤 태도들을 취했는지 회상해봄으로써 나름의 조언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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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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