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구개발(R&D) 예산 14.7% 삭감. 2024년 한 해 과학기술계는 말 그대로 ‘보릿고개’를 겪었다. 급작스런 예산 삭감은 국내 연구자의 해외 유출, 의대 입시 재도전 등 연쇄적인 문제를 낳았다. 바다 건너 미국 과학기술계의 칼바람은 현재진행형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선 이후 각종 연구 지원금이 축소되면서 국제 공동연구, 해외 연구자 네트워크 등 전 세계에 여파가 미치고 있다. 정치가 과학에 일으키는 연쇄작용. 현장의 첨단 산업 종사자부터 향후 이공계 진로를 희망하는 10대까지 우리 모두가 정치와 정책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2025년 6월 3일, 제21대 대통령 선거에 앞서 정치가 과학기술 연구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인공지능(AI) 공약을 통해 과학기술정책의 문제를 짚어봤다.
상흔과 숙제를 남긴 과격한 과학정책
과학자는 연구만 잘하면 되는 걸까. 과학이 점점 더 거대해지고, 정밀해질수록 연구엔 그만큼 더 많은 돈이 필요해졌다. 요즘엔 돈 없이 과학기술을 연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연구비는 정치적 결정과 정책에 달려 있다. 정책을 관리하는 행정부의 주판 한 번에 어떤 과학자들은 연구를 중단하고, 어떤 과학자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재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기 때와 마찬가지로 연구개발(R&D) 예산을 적극적으로 줄였다. 이에 따라 미국 과학기술 연구자들은 ‘탈 미국’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21대 대선에 앞서 정치의 입김이 과학계에 미치는 영향과 그 실태를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삭감’ 일지
1월 27일 I 미국국립보건원(NIH) 보조금 지원 중단 명령
2월 7일 I NIH 연구비의 평균 약 40%를 15%의 정액 비율로 삭감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정책 발표
2월 14일 I NIH뿐만 아니라, 미국환경보호청(EPA) 등 국가기관 소속 연구자 해고 및 대규모 구조조정
4월 18일 I 미국국립과학재단(NSF), 총액 7억 3900만 달러(약 1조 원)에 달하는 보조금 1040건 지급 중단
5월 2일 I 미국항공우주국(NASA), NSF, NIH 2026년 예산 전년(2025년) 대비 각 24.3%, 55%, 40%가량 삭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휘두르는 ‘예산 삭감’이라는 철퇴에 미국 과학기술계가 연일 홍역을 치르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1기 때인 2017년부터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에 공을 들여왔다. 2025년 1월 20일 출범한 2기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똑같은 기조를 고수하고 있다. 1월 27일(현지시간) 미국국립보건원(NIH)의 보조금 지원 중단 명령을 시작으로 R&D 예산을 전방위로 줄여가더니, 지난 5월 2일에는 내년도 예산안을 발표하며 대규모 삭감을 실행에 옮겼다.
2026년 예산안에 따르면 과학기술 연구 기관의 예산은 곳곳에서 감축됐다.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예산은 2025년 248억 달러(약 34조 7000억 원)에서 24.3% 축소된 188억 달러(약 26조 3000억 원)로 책정됐다. 미국국립과학재단(NSF)과 NIH 예산 역시 2025년 대비 각각 55%, 40%가량 삭감됐다. NSF는 미국 정부의 독립 기관으로, 의학을 제외한 자연과학과 공학 전반의 기초 연구와 혁신적인 기술 개발을 지원한다(생명과학 및 의학 관련 연구는 NIH에서 담당한다). 특히 NSF는 미국 대학에서 수행하는 연방 지원 기초 연구 자금의 약 25%를 지원하고 있기 때문에, 예산이 줄어든 만큼 대학 연구도 차질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연구 지원을 기관 우선순위에 따라 심사하는 등 보다 까다로운 예산 방침을 세웠다. 이에 신규 연구비 지급이 중단되거나 이미 승인된 연구비도 취소되는 사례가 이어졌다. 4월 18일부터 NSF는 7억 3900만 달러(약 1조 원)에 달하는 보조금 1040건의 지급을 중단했다. 4월 24일, 세투라만 판차나탄 NSF 총재는 임기를 16개월이나 앞두고 사임을 발표했다.

삭감 외치는 트럼프에 짐 싸는 美 과학자
판차나탄 총재를 비롯해 유수의 연구자들은 이미 트럼프 정부가 재편한 미국 과학기술계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국제학술지 ‘네이처’는 지난 3월 미국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에 나섰다. 미국의 R&D 예산 삭감으로 연구 종사자 1608명 중 75%에 달하는 1211명이 떠나겠다고 응답했다. 이러한 추세는 특히 경력 초반 연구자들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응답한 대학원 소속 연구자 690명 중 548명이 떠나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고, 졸업 후 연구를 이어 나갈 박사과정 학생 340명 중 255명 역시 같은 의견을 내비쳤다. doi: d41586-025-00938-y
또한 지난 4월 네이처는 “미국의 과학 분야 예산과 인력 축소가 본격화하자 2025년 1분기 동안 미국 과학자들의 해외 구직 활동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 증가했다”고 밝혔다. 네이처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1분기에만 미국에서 해외 연구소 등 외국 일자리를 탐색한 과학자들이 35% 늘었다. 3월에는 전년 같은 달 대비 해외 구직 활동이 68% 급증했다. doi: 10.1038/d41586-025-01216-7
이렇게 해외로 눈을 돌리는 미국 과학자들이 늘자 유럽연합(EU)에선 5월 5일(현지시간) 미국 과학자 유치를 위한 5억 유로(약 7800억 원) 규모의 지원 정책을 발표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파리 소르본대에서 ‘유럽을 선택하라(Choose Europe)’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정책에 따라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가 이뤄지도록 법적으로 보장하는 ‘유럽 연구 지역 법(European Research Area Act)’도 제정키로 했다. 중국도 미국 과학자들을 겨냥한 공고를 적극 내고 있다. 네이처에 따르면 올 3월까지 미국 소재 기관에 속한 연구자가 중국 연구소의 공고를 열어본 빈도가 30% 증가했으며 지원자 수도 20% 올랐다.
한국의 AI 개발 인력 ‘이주’ 현황

등 돌리는 韓 연구자, ‘헤어질 결심’하다
R&D 예산 삭감과 연구자 이탈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앞서 본 미국 내 과학계 예산 압력을 한국 역시 똑같이 겪고 있다. 어느 정권이든 과학기술계 이슈는 정치사회 이슈에 비해 후순위로 밀리는 경향이 있다. 그 와중에도 2024년은 한국의 과학기술계에 어느 해보다 가혹한 일 년이었다.
윤석열 당시 대통령은 2023년 6월 “나눠 먹기, 갈라 먹기식 R&D를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며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 등의 사업비 삭감을 위한 감사를 지시했다. 그리고는 예산을 좀먹는 ‘카르텔’을 척결한다는 빌미로 예산을 전격 감축하기 시작했다. 이후 2023년 8월, 정부는 당초 수립돼 있던 예산안을 뒤엎고 2024년도 R&D 예산 축소 계획을 발표했다.
결국 내년도 예산이 확정되는 12월, 2024년도 국가 R&D 예산이 26조 5000억 원으로 확정됐다. 이는 2023년의 31조 1000억 원이던 본 예산에 비해 14.7% 줄어든 금액이었다. 한국의 R&D 예산 그래프는 수십 년간 우상향을 그려왔다. 국가 R&D 예산이 전년도보다 감소한 것은 1991년 이후 33년 만에 처음이었다.
학계와 산업계에서 이어진 비판의 목소리에 2024년 초, 윤석열 정부는 결국 2025년의 R&D 예산을 삭감 전인 2023년 수준으로 원복한다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1년간의 예산 삭감 암흑기는 과학기술 연구자들에게 실질적인 타격을 입혔다. 그리고 일부는 ‘헤어질 결심’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현재 중국 허난성과학원에서 중력파 연구를 하고 있는 박찬 연구원이 그중 하나다.
2024년 7월 중국 허난성과학원 중력파천문연구소로 적을 옮긴 박 연구원은 순수 ‘국내파’ 연구자였다. 박 연구원은 중국으로 떠나기 전 10여 년간 국가수리과학연구소, 기초과학연구원(IBS) 등에서 중력파를 관측해 중성자 배열이나 블랙홀의 내부 구조 등을 추론하는 연구를 해왔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해외로 눈을 돌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R&D 예산 삭감이라는 일이 벌어졌고, 이내 그 여파가 들이닥쳤다. 그는 일하던 곳에서 “계약 연장이 힘들어졌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미 한국을 떠난 박 연구원 외에도 떠날 준비를 하는 연구자를 더러 만날 수 있었다. 대전의 한 출연연 계약직 연구원 조모(29) 씨는 “2024년 재계약 불가를 통보받아 올해(2025년) 상반기까지 근무하고 이후로는 싱가포르로 떠날 예정”이라고 했고, 수도권 한 국립대 공대 소속 박사과정 연구원 이모(30) 씨는 “졸업 후 ‘탈 한국’을 위해 남는 시간에 영어 공부에 열을 올리는 대학원생이 부쩍 늘었다”고 과학동아에 전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연구자로서 한국에 남아있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자조했다.

줄줄 새는 AI 인재, 수도꼭지 잠그려면
한국은 이미 여러 과학기술 분야에서 인재가 ‘수출’되는 나라다. 2023년 1년간 미국 국무부가 발급한 EB-1·EB-2 비자(연구직 등 고급 인력 대상 취업 이민 비자)를 받은 사람 중 한국 출신은 5684명에 달했다. 이를 인구 10만 명당 기준으로 환산하면 한국은 10.98명으로 2위인 인도(1.44명)에 비해 9배가량 높다. 유출은 한국 과학기술 경쟁력 하락에도 영향을 미쳤다. 2023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료를 보면 한국을 떠나는 과학자들의 과학저널 기여도는 2022년 기준 1.69인 반면, 한국으로 유입되는 과학 인재의 기여도는 1.41에 그쳤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인재들이 해외로 유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미래 먹거리로 불리는 인공지능(AI) 분야 인재 유치에도 빨간불이 커졌다. 지난 4월 미국 스탠퍼드대가 발간한 ‘2025 AI 인덱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AI 인재는 최근 연이어 빠져나갔다. 스탠퍼드대는 링크드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AI 인력이 어디로 ‘이주’하는지 매년 조사한다. 최신 보고서에서 2024년 한국의 AI 개발 인력 지수(2019~2024년 링크드인 등록 AI 인력이 1만 명 기준 몇 명이나 해당 국가로 이주하는지를 나타낸 수치)는 -0.36을 기록했다. 국가별로 링크드인 가입자 수가 다르기에, 지수는 국가별 순유입·순유출 절댓값을 해당 국가의 링크드인 가입자 수로 나눈 후 1만을 곱해 산출한다.
이 지표는 다른 모든 국가들과 국가 간의 상대적인 인재 이동 정도를 나타낸다. 지수가 0보다 낮다는 건 유입된 인재보다 외국으로 빠져나가는 인력이 더 많았다는 뜻이다. 올해 보고서에서 한국은 48곳의 조사 국가 중 이스라엘(-2.10), 인도(-1.55), 헝가리(-1.15), 튀르키예(-0.49) 다음으로 AI 인재 유출이 많은 국가로 조사됐다.
한국의 인력 유출은 어느덧 만성화 되고 있다. 2023년 AI 개발 인력 지수 역시 -0.3을 보이며 2년 연속 유입보다 유출이 많은 상황이다. 이렇듯 AI 인재가 새어 나가는 수도꼭지를 잠그기 위해, 제21대 대선 후보들은 AI 정책에 집중하고 있다. R&D 예산 원복과 더불어 AI 핵심 인재를 어떻게 지킬 것인지가 이번 대선의 과학기술 분야 화두다. 파트 2에서는 차기 정부의 AI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살펴본다.
AI에 집중한 2025 대선 과학정책 방향을 묻다
6월 3일, 제21대 대통령 선거(대선)를 앞두고 정당별 과학기술 공약이 발표됐다. 단연 인공지능(AI)이 화두였다. 후보들이 내건 AI 공약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한국 과학기술정책과,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과학기술정책 연구자들과 함께 살폈다.
양당 대통령 후보의 인공지능(AI) 공약

이재명(더불어민주당)
· AI 세계 3대 강국 도약
· AI 투자 100조 원 시대 개막. 민간 투자 활성화를 통한 AI 관련 예산 증액
· 국가인공지능위원회 강화
· 국가 AI 집적 클러스터 조성을 통한 글로벌 AI 허브
· GPU 5만 개 이상 확보 및 NPU 개발 및 실증 지원
· 글로벌 AI 공동투자 기금 조성
· AI 인재 양성을 위한 STEM 교육 강화, 지역별 거점 대학 AI 단과대 설립,
AI 분야 병역특례 확대, 해외 인재 유치
· AI 규제 합리화 및 AI 산업 생태계 조성 관련법 정비, AI 특구 확대
김문수(국민의힘)
· AI·에너지 3대 강국 달성
· AI 민관합동펀드 100조 원 조성
· AI 인재 20만 명 양성
· 과학기술부총리 신설, 과학기술 총괄 리더십 구축
· 글로벌 초고속 AI 데이터센터 구축
· AI 관련 규제혁신 기준국가제 도입, 글로벌 스탠더드화
· AI 생태계 혁신 전방위 지원, 차세대 AI 집중 투자
· 원전 비중 확대로 AI 시대 전력 수요 대응
5월 12일, 제21대 대통령 선거 유세 첫날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는 대전을 각각 방문해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들은 같은 날 선거관리위원회(선관위)에 10대 주요 공약을 등록했다. 두 후보는 모두 입 모아 “인공지능(AI) 세계 3대 강국으로 도약하겠다”고 말했다.
AI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AI는 미래의 핵심 산업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국가의 경제·안보·산업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략 기술이다. 이에 오늘날 전세계 주요국은 물론 개발도상국까지 국가가 나서서 AI 연구에 투자하고 있다. 한국의 AI 과학기술정책은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전문가들과 함께 AI 관련 주요 공약을 분석했다. 전문가들의 관점은 다양했지만, 그만큼 정책 설계에 고려해야 할 쟁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강 대 약’의 싸움 AI, ‘3대 강국’은 타당한 목표인가?
AI 기술 전반에 관한 투자와 개발을 해야 할 때
AI는 대부분의 나라가 국가전략 기술로 상정한 첨단 기술이다. 동맹국에조차 최전선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또한 현재 AI는 기술 패턴이 굉장히 빠르게 변화해, 자칫하면 주류 연구에서 쉽게 벗어난다. 때문에 뾰족한 방향과 목표를 둔 정책은 오히려 위험하다. 또한 AI는 소위 말하는 ‘앞단’의 기반 기술이다. AI와 바이오를 결합하고, AI와 국방을 결합한 기술이 개발된다. 이때 앞단의 연구 없이 뒷단을 올릴 수 없다. 따라서 2025년, 현재는 기술 자립을 목표로 한 AI 정책의 기조와 커다란 목표 설정이 필요하다.
AI 2대 강국인 미국과 중국에 비교하는 것을 멈춰야
원천 기술 개발 측면에서 한국이 분명 떨어지는 부분은 있다. 하지만 인적 자원과 연구 재원의 규모가 다른 미국, 중국과 한국을 비교하면서 불필요한 채찍질을 할 필요는 없다. 한국은 과학기술 선도국과 비교해 모든 분야에서 추격자로 시작해 지금의 생태계를 일궜다. 한국은 AI 분야에도 현재 훌륭한 팔로워다.
한국만이 갖는 핵심 기술을 찾는 것이 필요
한국이 지금까지 국제사회에서 과학기술 분야로 경쟁력을 확보한 원천은 기술 활용 능력과 양산 능력, 그리고 공정 기술 축적이었다. 이처럼 AI 분야에서도 한국만이 할 수 있는 분야를 반드시 개척해야 한다. 양자정보기술 분야에선 핀란드 기업 블루포스가 좋은 예다. 블루포스는 오랫동안 극저온 냉동기 연구를 한 과학자들이 2008년 창업한 회사다. 현재 블루포스는 전 세계 양자컴퓨터의 약 95%에 냉동기를 납품한다. 이 기술 때문에 미국과 유럽의 주요 과학기술 국가들도 양자컴퓨터를 도입할 때나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때 핀란드를 대우한다. ‘입장권’ 역할을 하는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정부가 바뀌어도, 정당이 달라도 반복되는 AI 공약, 득일까 실일까?
안정성과 연속성 있는 정책은 AI 기술 개발에 필수
한국은 정책 안정성과 연속성이 큰 나라다. 국민적인 합의가 있는 주요 정책은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AI 정책에 양당의 세부 계획이 다른 듯 같아 보이는 이유, 국가전략 기술 등의 차수가 바뀌어도 큰 틀에서는 다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를 나쁘게 말하면 ‘정책을 빨아 쓴다’ ‘포장지만 갈아 끼운다’라고도 표현한다. 하지만 정책 안정성이 크다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과학기술정책의 경우 정권이 바뀌어도 예측이 가능해야 연구가 안정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특히 AI는 국가가 기업가처럼 적극적으로 개입해 산업을 이끌고 있다. 정책 안정성이 필요하다.
유지하고 있는 정책이 바람직한지 점검이 필요
정책 안정성을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 효과가 있다는 진단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정책에 대한 진단이 부족하다. 과학기술 정책은 지금까지 산업계, 학계 그리고 연구 분야가 하나의 시스템으로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 왔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로는 ‘추격자 아닌 선도자’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계속하지만 그 전환을 20여 년간 이루지 못했다. 이는 한국의 기존 시스템으로는 혁신이 불가하다는 뜻이다. 시스템상의 돌파구가 필요하다.
AI가 부처 간 칸막이를 넘게 만드는 것은 관심
안정적인 경로에서 벗어나는 순간이 필요하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기업벤처기업부, 교육부 등 현재 행정부처 중에 AI와 무관한 곳을 찾기 어려운 만큼, AI는 부처 간 협력을 기반으로 한 통합적이고 교차적인 정책 추진이 중요하다. 그런데 정부 부처는 각자의 전문성을 갖고 각각 예산을 꾸려 운영되다 보니 소위 말하는 ‘부처 간 칸막이’가 존재한다. 대통령실이나 국무총리 주재의 직속 위원회만이 이 칸막이를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모든 위원회가 유효한 것은 아니다. 위원장이 관심을 두고 들여다보아야만 제대로 기능한다. 국가인공지능위원회나 과학기술부총리 등에 힘이 실린다면 혁신적인 AI 연구 및 생태계 구축에 도움될 것이다.

AI 인재 유치 경쟁, 한국만 ‘비장의 카드’ 있나?
AI는 개인이 아닌 팀워크가 중요, 지리적 한계를 넘는 전략 필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해봐야 한다. 특히 AI는 뛰어난 연구자 한 사람을 ‘모셔’ 오는 것보다 팀워크가 좋은 연구자들을 그룹으로 섭외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연구 시너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AI 연구 기업을 한국에 유치하고자 하는 노력도 좋은 전략이 될 수 있다. 산업과 연구 생태계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무엇보다 한국에 연구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 두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은 AI 분야의 고급 인력을 두고 미국, 중국과 돈으로는 경쟁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급 인력이 바라고 원하는 연구 환경을 조성하는 것으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 연구 자율성을 보장하는 문화가 한국 연구 조직과 사회 전반에 정착돼야 한다.
R&D 평가 제도 개선에 관한 논의 필요
한국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R&D 사업이 효과적으로 수행됐는지를 측정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발전해 있다. 연구개발 활동을 성과 중심으로 평가하는 ‘국가연구개발사업 등의 성과평가 및 성과관리에 관한 법률’이 있다. 반면 미국이나 유럽연합(EU)은 사업 평가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한 연구 현장에서는 ‘촘촘하게 짜인 연구 평가 제도가 오히려 연구를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다. 연구가 아닌 연구 평가에 시간과 에너지가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인 만큼, 적절한 심사와 관리가 없다면 방만한 국가 경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과제 평가보다 선정에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며, 평가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정부출연연구기관 외국인 연구자 비율 0%대
유럽연합(EU)이 미국의 R&D 예산 삭감 사태로 유출되는 과학기술 인재를 영입하고자 굉장히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이 EU처럼 당장 인재 영입을 도모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지난 20여 년간 한국에서 외국 과학기술 인재를 유치하고자 하는 정책이 많았다. 그런데 한국은 영어를 쓰지 않는 나라라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또한 과학기술자를 유치하는 것에 성공해도 이들이 계속 한국에서 연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어렵다. 한국은 외국인이 조직 내에 있는 것이 당연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문화적인 갈등과 불편함이 산재해 있다. 그럼에도 한국 인구는 2024년 5200만 명에서 2072년 3600만 명으로 감소할 전망이다. 이를 생각하면 장기적인 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