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컷의 싸움
단계적인 ‘저울질’
성체가 된 거미는 생을 마감하기 전, 자신의 자손을 가급적 많이 그리고 건강하게 낳아줄 짝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보통 그런 짝은 한정돼 있고, 남들에게도 인기가 많다. 때문에 짝을 찾는 과정에서 나와 목표가 같은 동성의 경쟁자와 마주쳤을 때, 거미는 싸움을 불사한다. 하지만 모든 싸움이 격렬한 몸싸움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북미멋쟁이깡충거미 수컷들의 싸움은 단계별로 나타나는 정형화된 행동이 특징이다. 우선 경쟁자를 마주하면 양 앞다리를 수평으로 넓게 벌려 몸을 크게 보이게 만들고 좌우로 스텝을 밟으며 대치한다. 동시에, 몸을 떨어 바닥에 기질진동신호를 낸다. 몸 크기와 진동신호의 강도는 상대방에게 내가 얼마나 강한지를 알리는 다중감각신호다. 선수들 사이의 몸 크기와 진동신호의 강도 차이가 현격할 경우, 열등한 개체는 먼저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간다. 아무리 짝짓기 상대라는 중요한 자원이 걸린 일일지라도, 내가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상처만 남을 싸움에 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진동신호 차이가 크지 않다면 수컷 깡충거미의 싸움은 몸싸움으로 격화된다. 양팔을 벌린 개체들이 서로 점점 다가가다가, 이내 앞다리로 서로를 밀기 시작한다. 싸움이 더 격렬해지면 서로의 입을 바싹 붙이고 엄니 대 엄니로 서로를 문 채로 온 힘을 다해 상대방을 밀어낸다. 호의적이지 않은 입맞춤이다. 싸움은 보통 1분 내외로 부상 없이 결판난다. 힘의 균형이 깨지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자신의 열등함을 느낀 개체가 도망치면서 싸움은 끝난다.

암컷의 싸움
뒤가 없는 승부
대부분의 싸움이 부상 없이 결정되는 수컷끼리의 싸움과는 다르게, 암컷의 싸움은 출혈이 동반되거나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놀랍게도 수컷과는 달리 이 몸싸움의 승패는 암컷의 몸 크기나 진동신호 강도 그 어느 것과도 연관성이 없다. 번식기가 임박한 암컷이 싸움에 더 격렬하게 임하고 이길 확률이 높았다. 왜 암컷들은 수컷처럼 패색이 드리울 때 미리 도망치지 않고 죽음까지 불사하며 싸울까? 연구자들은 짝짓기를 앞둔 암수의 속사정이 서로 다르다는 것에 주목했다. 수컷은 죽기 전, 여러 암컷과 교미를 할 수 있다. 맞닥뜨린 경쟁자 수컷을 이겨 점찍은 암컷과 짝짓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수컷을 이길 가능성이 작아 보인다면 포기하고 다른 암컷을 찾으러 가도 괜찮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컷끼리의 싸움에서는 죽음을 불사한 싸움보다는 서로의 싸움 능력을 세세히 ‘저울질’할 수 있는 정형화된 싸움이 진화했을 것이다. doi: 10.1016/j.anbehav.2008.01.032.

짝짓기 전투
진화적 이득
암컷들은 수컷들이 자신을 두고 일정 기간 피 튀기는 싸움을 하도록 둠으로써, 싸움을 잘하고 정력이 좋은 수컷과 교미하게 되는 것이다. 동성 간 경쟁이 꼭 몸싸움을 동반해야만 치열한 건 아니다. 페로몬으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경우도 있다. 모임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있어 그 사람이 좋아하는 향수를 뿌리고 갔는데, 다른 사랑의 경쟁자가 비슷한 향수를 더 진하게 뿌리고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자. 과부거미류 암컷들에서 일어나는 일이 이와 비슷하다. 과부거미 암컷은 근처에 암컷 경쟁자들이 많아져 수컷을 이끄는 암컷 성페로몬의 농도가 높아지면, 이에 맞춰 자기 페로몬 분비량을 늘린다. 하지만 이는 페로몬을 추적해 거미를 사냥하는 포식자를 불러올 수 있으므로, 암컷은 거미줄을 더 넓게 보강해서 자신이 숨을 공간도 동시에 확장한다. doi: 10.1038/s42003-023-05392-y

앞다리 장식, 대칭성
거미도 ‘눈 높은’ 이유
거미는 성장 과정에서 포식자에게서 공격당해 다리를 잃으면 탈피를 통해 재생할 수 있다. 다만 한 번의 탈피로 완전히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탈피에 걸쳐 점진적으로 재생한다. 자라면서 앞다리 한쪽을 한 번 이상 잃어버린 수컷은 그쪽의 검은색 장식이 다른 한쪽보다 작을 수 밖에 없다. 암컷은 수컷 앞다리 장식의 대칭성을 선호함으로써 ‘곱게 자란’ 수컷과 교미할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북미붓다리늑대거미 암컷은 한술 더 떠, 구애 신호가 ‘복잡한’ 수컷을 선호한다. 수컷이 구애할 때 내는 기질진동신호의 노래가 더 복잡할수록 그 수컷의 구애를 받아줄 확률이 높다. 수컷 또한 더 건강 상태가 좋은 암컷을 상대로 구애할 때 기질진동신 호의 복잡성을 더 높였다. doi: 10.1098/rsbl.2022.0052 에너지를 투자할 가치가 더 높은 암컷을 만났을 때 구애신호에 더 공을 들인 것이다. 암컷은 왜 더 복잡한 신호를 선호했을까? 현재 연구자들은 구사하는데 에너지가 많이 드는 복잡한 신호를 잘 내는 수컷일수록 더 경쟁력 있는 수컷이라는 가설과, 복잡한 신호일수록 수컷의 건강 상태에 대한 더 다양한 종류의 정보를 많이 전달할 것이라는 가설 등을 시험 하고 있다.
Dialogue
정화: 우리처럼 거미를 ‘좋아하는’ 게 희한한 거니까, 난 당연한 거라고 얘기해주는 편이야. 그리고 거미에 대한 두려움이 일정 부분 거미에 대한 호기심에서 온다고 생각해서 누가 거미를 무서워한다고 해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이항: 무서워하기 때문에 더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다?
정화: 정화: 그럼. 보통 나한테 거미가 무섭다고 하는 사람들은 먼저 거미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물어봐. 그러면 사람한테 해를 가할 수 있는 독거미가 0.1%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그럼 엄청 신기해한다고!
이항: 좋은 전략이다. 나도 그렇게 해봐야겠어. 그런데 한국이랑 비교하면 미국은 독거미를 만날 일이 종종 있는 편이긴 해. 나도 학교에서 검은과부거미를 본 적이 있고, 너도 연구실 책상에서 집에서 잡은 괴사성 독을 가진 브라운 레클루즈 거미를 기르잖아. 심지어 집에 나타나는 경우도 은근히 많고!
정화: 그렇지만 진짜 물릴 확률은 정말 적지. 난 살면서 거미한테 한 번도 물려본 적이 없는걸! 한국에는 독거미가 더 없어?
이항: 그나마 독성이 조금 있다고 지목되는 종이 애어리염낭거미 등의 한두 종 정도일 거야. 실내에서 나오는 종들도 아니라서 거미 물림에 의한 진료기록은 한국에선 거의 전무해.
정화: 안전하게 거미 연구를 하려면 한국에 가야겠네! 너는 거미가 무섭다는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하니?
이항: 난 너처럼 친절하지가 않아서 조금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편이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왕거미랑 싸워도 네가 이길 텐데 도대체 왜 무서워하냐, 라던지….
정화: 너무한 거 아냐? 우리보다 작고 약한 동물이라도 무서울 수도 있지!
이항: 맞아. 하지만 거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정도가 훨씬 크지 않겠어?
저자
서정화(Jillian Kurovski): 미국 네브라스카대 거미행동생태연구실 연구원. 미국에서 거미류의 계통분류와 군집생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닷거미류의 암컷 주도 짝선택을 주제로 박사학위 연구 중에 있다. 한국 태생으로, 생후 8개월에 미국으로 입양됐다. jkurovski2@huskers.unl.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