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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자연×과학] 늙고 현명하고 거대한 동물을 잃게 된다면

북대서양긴수염고래(Eubalaena glacialis)가 수면 위로 뛰어오른다. 몸길이 약 16m, 무게는 7톤(t) 가까이 자라는 이 거대한 동물은 현재 세계에 300마리 정도 남아있는 멸종위기종이다. 2024년 12월 20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는 북대서양긴수염고래의 수명 중간값이 약 22.3년에 불과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 doi: 10.1126/sciadv.adq3086

 

그레그 브리드 미국 페어뱅크스 알래스카대 교수는 북대서양긴수염고래와 유전자적으로 거의 동일한 남방긴수염고래(Eubalaena australis) 두 종의 관찰 데이터를 기반으로 기대수명 예측 모델을 만들었다. 이를 통해 살펴본 두 종의 수명 중간값은 크게 달랐다. 북대서양긴수염고래의 경우 평균 22.3년 사는 한편, 남방긴수염고래는 평균 73.4년 살았던 것. 연구팀은 두 종의 수명 중간값 차이가 인간 탓에 생겼다고 설명했다.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무분별한 포경 탓에 북대서양긴수염고래 개체 대다수가 늙기 전에 죽은 것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고래에서만 관찰되는 것이 아니다. 포경, 사냥, 기후변화, 서식지 파괴 등 다양한 이유로 지구의 동물들은 늙기 전에 죽는다. 그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2024년 11월 21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된 리뷰 논문 ‘지구상의 늙고, 현명하고, 거대한 동물의 손실(Loss of Earth’s old, wise, and large animals)’은 150여 개의 논문을 분석해 늙은 동물이 사라지면 어떤 악영향이 찾아오는지 정리했다. 함께 살펴보자.

 

▲Shutterstock
전 세계의 개체수가 300여 마리뿐인 멸종위기종 북대서양긴수염고래가 수면 위로 뛰어오르고 있다

 

내 나이가 어때서? 늙은 동물 무시하지 말라

 

흔히 나이가 많은 동물은 어린 동물보다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노쇠해 스스로 먹이를 구해오는 능력이 떨어지거나, 생식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동물 세계에서 늙은 동물은 통념과 반대로 자신, 나아가 다른 동물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속속 나오고 있다.

 

호주 찰스 다윈대, 영국 엑서터대, 미국 텍사스 A&M대 등 국제 공동연구팀은 동물의 노화에 따라 벌어지는 개체, 집단, 그리고 생태계의 변화를 다룬 논문 150여 편을 분석했다. 그 결과 늙은 동물이 가진 이점을 ‘생식과 개체수 증가’ ‘행동, 지식, 사회성, 그리고 문화’ ‘생태계 구조와 기능’ ‘전 지구적 변화에 대한 저항능력과 적응능력’ 네 가지 측면으로 분류할 수 있었다. doi: 10.1126/science.ado2705

 

사례와 함께 살펴보자. 어떤 동물은 마치 나무처럼 계속해서 성장한다. 이것이 ‘생식과 개체수 증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대왕조개류는 성장기가 길다. 그래서 평균 수명인 100여 년을 살아가며 꾸준히 몸 크기를 키울 수 있다. 번식기의 대왕조개는 한 번에 수억 개 이상의 알과 정자를 방출한다. 몸의 크기가 클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으므로, 건강하고 많은 자손을 만드는 데 유리하다.

 

새는 좀 특이하다. 펭귄이나 팔색조, 참새 등 다양한 경우에서 새는 수컷과 암컷이 함께 육아를 한다. 그 덕에 새 부부는 나이가 많을수록 자녀를 더 잘 키울 수 있다. 연구에서는 2020년 발표된 다양한 동물의 어미 나이와 그 자손의 생존 확률을 분석한 논문을 인용했다. 이 논문에는 “새의 경우 예외적으로 어미의 나이가 많을수록 생존 확률이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면서 “노화에 따라 어미의 체력이 조금 부치더라도 배우자가 자식을 돌볼 수 있으므로 나타난 결과일 것”이라고 쓰여 있다. 서로 도와 양육하니 체력의 한계는 극복하고, 노련함의 장점이 십분 발휘된 셈이다. doi: 10.1098/rspb.2020.0972

 

늙을수록 지혜로워진다는 말은 범고래에게 딱 맞는다. 연구팀은 ‘행동, 지식, 사회성, 그리고 문화’ 측면의 예시로, 나이 든 암컷 범고래의 위기 대처 능력을 꼽았다. 범고래 사회에는 소수의 리더가 있다. 대부분 나이 든 암컷 범고래가 맡지만, 종종 젊은 수컷 범고래에게 이 자리를 넘겨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먹이가 부족해진 상황에서 범고래 집단은 노인의 지혜에 의지한다. 젊은 수컷이 리더를 맡을 확률은 급격히 감소하고, 나이가 든 암컷 범고래가 집단을 주도적으로 이끈다.

 

문화적인 유행도 나이 든 개체가 젊은 개체에게 전한다. 인간 사회에서 ‘복고 유행’이 있듯, 범고래 집단에서는 요즘 복고 패션이 유행이다. 1987년 미국 워싱턴주 서부의 퓨젯 해협에는 연어 모자가 대유행이었다. 이 지역 범고래들이 너도나도 죽은 연어를 이마에 슬쩍 얹어 놓고 다녔던 것. 

 

이 유행은 삽시간에 사라졌다가 2024년 10월 25일 다시 등장했다. ‘J27 블랙베리’라고 불리는 32살 된 수컷 범고래 개체가 다시 이마에 빛나는 연어를 얹고 다니는 모습을 지역 사진가가 포착했다. 블랙베리의 나이를 고려하면 그는(?) 1987년 연어 모자 대유행을 보지 못했다. 연어 모자 유행은 어떻게 돌아온 걸까.

 

미국 워싱턴대에서 범고래를 연구하는 데보라 길스 연구원은 내셔널지오그래픽과의 인터뷰에서 “1987년이 그랬듯, 2024년은 아주 간만에 연어 개체수가 많아 식량이 풍족했던 해”라면서 “당시 연어 모자 대유행을 겪었던 개체들에게 연어를 모자로 쓰는 문화를 배운 게 아닌가 추정한다”고 했다.

 

▲GIB
턱끈펭귄은 알을 낳고, 품고, 새끼가 알에서 깨어난 뒤 둥지를 떠날 때까지 내내 부부가 공동육아를 한다. 턱끈펭귄의 수명은 평균 20년이다.

 

▲GIB
바다를 지배하는 범고래의 강함은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에서 나온다. 범고래 무리의 우두머리는 대부분 나이 든 암컷이 맡는다. 암컷 범고래의 평균 수명은 50살인 반면, 수컷 범고래의 평균 수명은 30살이다.

 

생태계는 노인을 필요로 한다

 

‘생태계 구조와 기능’ 측면에서 나이 든 동물이 사라진다는 건 이들이 전체 집단에 주던 이점을 놓친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점을 고려하지 않는다. 연구팀은 논문에서 “늙고, 경험 많고, 거대한 개체가 인간에 의해 과하게 사냥당하는 등 개체수 감소를 겪게 되면, 그 개체가 살던 생태계의 안정성이 파괴된다”고 경고했다. 나아가 이들 중 많은 개체가 생태계 속의 에너지 자원을 꾸준히 비슷한 양 섭취하는 소비자다. 이들이 줄어들면 그 빈자리는 보다 수명이 짧고, 개체수가 환경에 민감하게 변화하는 종이 차지한다. 그러면 그만큼 생태계에 변동성이 증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이 앞으로 나이 든 개체를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 산불, 홍수 같은 재해와 인간의 활동으로 인한 서식지 감소는 장수하는 동물들이 설 자리를 빼앗는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장수하는 동물들의 경우 한번 개체수 감소를 겪게 되면 다시금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전 지구적 변화에 대한 저항능력과 적응능력’ 측면에선 단명하는 종의 경우에도 나이 많은 개체가 감소하는 것은 종 전체의 생존에 악영향을 준다. 호주에 서식하는 개구리, 휘파람나무개구리(Litoria verreauxii alpina) 개체군에 곰팡이성 감염병이 돌면서 집단 내 나이가 많은 개체가 대거 사라지자, 휘파람나무개구리 전체 개체군이 가뭄과 같은 환경적 변화에 더 크게 영향을 받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안정적으로 번식하던 나이 많은 개체들이 사라지면서 개체군의 규모를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 탓이었다. doi: 10.1111/1365-2656.12569

 

연구팀은 논문에서 “아직 세계자연보전연맹(IUCN)도 멸종위기종 목록에 연령에 따른 개체수 구조를 밝히고 있진 않다”면서 “나이 많은 동물들은 생물다양성을 확보하고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만큼, 관련 정책을 확충해 이들을 보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GIB
사냥을 오락으로 여기는 ‘트로피 사냥’은 나이 많은 아프리카코끼리 개체수가 급감한 원인이 됐다. 아프리카코끼리의 평균 수명은 50~70년이다.

 

▲Shutterstock
수명이 짧은 동물에게도 나이 든 개체는 중요하다. 호주국립대 연구팀은 휘파람나무개구리 개체군에 전염병이 돌면서 나이 든 개체가 사라지자, 전체 집단이 가뭄과 같은 환경적 영향에 더 취약해졌다는 연구 결과를 2016년 발표했다. 휘파람나무개구리의 평균 수명은 5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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