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역사에는 큰 업적을 남겼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소하게 느끼는 과학자가 있다. 현대 핵물리학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핵폭탄이 만들어지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인 핵분열 현상을 발견하고 명명한 리제 마이트너가 그렇다. 이 업적으로 그는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후보로 49회 지명됐지만, 그럼에도 결국 노벨상을 받지 못했다. 그림자에 가려진 마이트너의 삶을 알아본다.
리제 마이트너
1878. 11. 7 ~ 1968. 10. 27
핵물리학자인 리제 마이트너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가족의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당대에 매우 드물었던 여성과학자로서 많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했고, 차별당하는 일도 많았다고 알려졌다. 대표적인 예시가 노벨상이다. 마이트너는 화학자 오토 한과 오랫동안 공동 연구를 하면서 핵분열 현상을 발견했지만, 노벨상은 한에게만 수여됐다. 마이트너가 뛰어난 재능과 핵분열 발견이라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노벨상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핵분열 말고는 두드러진 업적이 없는 연구자였다는 시각도 있다. 마이트너를 둘러싼 기존의 이야기들은 어느 정도나 맞는 것일까?
의혹 1. 여성이었기 때문에 차별당했다?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리제 마이트너를 “우리의 퀴리 부인”이라 불렀다. 둘은 당시 매우 드물었던 여성과학자라는 점 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받아들여지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고, 타국으로 떠나야 했으며, 경력 초기의 업적을 쌓는 과정에서 가까운 남성 동료가 있었다는 점이다.
마이트너는 187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변호사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유대인 혈통이었지만 개신교로 개종해 유대교와는 관련이 없었다. 1897년 오스트리아 대학에 처음으로 여학생이 입학할 수 있게 되자, 마이트너는 23살이 되던 1901년, 빈 대학에 입학했다. 1906년 여름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마이트너가 빈에서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직업은 무보수로 물리학을 가르치는 일뿐이었다.
1903년 자연 방사성 발견 업적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이 빈에도 널리 알려지며 마이트너는 방사성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마이트너는 부모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독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현 훔볼트대학)으로 갔다. 이전에 초청 강연을 왔던 막스 플랑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플랑크는 공식적으로 여성이 물리학을 공부하는 것에 반대하는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었으나 마이트너는 예외였다. 자신의 강의를 청강하는 걸 허락했을 뿐 아니라 수줍음이 많던 마이트너에게 자신의 두 딸을 소개해 삭막한 베를린의 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움을 줬다. 마이트너는 베를린에서 평생의 동료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화학자 오토 한을 만났다.
1912년 베를린 근교 달렘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왕실이 안정된 재정 지원을 하지만 연구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연구소였다. 한은 이곳의 방사성화학 연구분과 책임자로 내정됐다. 연봉 5000마르크의 교수직이었다. 마이트너도 이때 함께 초빙됐지만, 그는 월급도 직위도 제시받지 못했다.
이때 반전이 일어났다. 플랑크가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마이트너를 조교로 채용했던 것이다. 이유는 마이트너가 불공평한 대접을 받는 것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고, 재정 지원을 더 받기 힘들게 된 마이트너가 빈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한 것일 수도 있다. 마이트너는 프로이센 최초의 여성 조교가 됐다. 연봉은 1500마르크에 불과했지만, 마이트너가 난생 처음 받은 급료였다. 나중에는 연구소 측에서도 생각을 바꿔 마이트너를 한과 똑같은 지위로 초빙해 개인 연구실과 급료를 줬다.
비록 급료는 한보다 훨씬 적었지만, 당시 독일어권에서 여성으로서 그런 혜택을 받은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마이트너는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의 능력과 성취를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의 연구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는 1938년까지 독일에 머무르면서 핵물리학의 첨단 연구를 주도했다.
Kaiser-Wilhelm Institut für Chemie, Berlin(W)
1912년의 오토 한과 리제 마이트너. 마이트너와 한은 친구이자 연구 동료로서, 영국의 어니스트 러더퍼드나 프랑스의 이렌느 졸리오-퀴리 등과 경쟁하며 방사성 핵 연구에 매달렸다.
의혹 2. 여성이라서 노벨상을 빼앗겼다?
마이트너의 대표적인 과학 업적은 연구 동료이자 친구였던 한과 함께한 핵분열의 발견이다. 그러나 1944년 노벨 화학상은 “무거운 핵의 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한에게만 주어졌다. 한은 이후 자서전 등을 통해 ‘핵분열은 마이트너가 베를린을 떠난 뒤에 발견한 것’이라고 밝히곤 했다. 하지만 핵분열의 발견을 발표한 논문의 또 다른 공동 저자 프리츠 슈트라스만의 회고는 다르다. 1934년부터 시작한 핵분열과 관련된 연구를 리더로서 주도한 것은 마이트너였다는 것이다.
1938년 12월 한과 슈트라스만은 우라늄이 방사성 붕괴를 하고 난 산물에서 바륨의 동위원소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알파나 베타 붕괴에서는 바륨이 나올 수 없었다. 당시 마이트너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서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연구소 소속도 순식간에 잃어버린 떠돌이 신세였으나, 그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공동 연구를 지속했다. 한의 발견을 들은 마이트너는 표면장력이 약해지면 물방울이 쪼개지는 것처럼 원자핵도 일종의 물방울처럼 쪼개질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마이트너는 조카인 물리학자 오토 프리슈와 함께 우라늄 ‘물방울’의 표면장력을 계산하고 그로부터 바륨 원자핵이 생겨날 수 있음을 계산하는 데 성공했고, 이 현상에 ‘핵분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은 빠르게 핵물리학자와 핵화학자 사이에 퍼져나갔다.
즉 노벨상을 공동연구자 한에게 뺏겼다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에 가깝다. 특히 이미 열 번이나 한과 공동으로 수상자 후보에 올랐었던 마이트너가 1944년 노벨상에서 배제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런데 마이트너가 여성이라서가 아니라, 화학자가 아닌 물리학자이기 때문에 화학상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위원회의 공식 의견이었다. 이후 50여 년만에 공개된 노벨상 위원회의 기록은 마이트너 누락이 복합적 원인의 결과였음을 보여줬다. 핵분열과 같이 물리학과 화학 모두에 걸친 발견을 제대로 평가하기는 매우 어려웠고, 화학상 위원회가 물리학적 접근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이론물리학에 대한 전문성 결여를 극복하려면 국제적 협조가 필요했지만, 전쟁 중 스웨덴은 정치는 물론 과학에서도 고립됐다. 노벨상 위원회는 독일이 유대인의 과학 성과물을 파괴했음을 간과했다. 이런 경솔함이 이론물리학에 대한 무지와 학문 분야의 편향과 만나 잘못된 결정을 낳았다.
의혹 3. 핵분열 이외에는 업적이 없다?
그렇다면 핵분열을 제외한 마이트너의 과학 업적은 무엇이 있을까. 대개는 핵분열의 발견만이 거론되지만, 사실상 마이트너의 업적은 ‘핵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처음 정립되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기반을 놓은 것에 있다.
대표적으로 마이트너는 1917~1918년, 한과 함께 새로운 악티늄족 원소를 발견했다. 주기율표 맨 아랫줄의 원소들을 악티늄족이라 부르는데, 첫 원소가 악티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악티늄족 원소를 살펴보던 마이트너는 원자번호 90번 원소인 토륨(Th)과 92번인 우라늄 사이에 새로운 원소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이트너는 1909년 본인이 개발한 ‘방사성 되튐’ 기법을 써서 새 원소 ‘프로트악티늄(Pa)’, 즉 ‘원시악티늄’을 발견했다.
마이트너는 후대 물리학의 기반이 될 여러 정밀 측정도 진행했다. 그는 한과의 연구에서 베타 붕괴에서 전자의 운동에너지값이 일정 범위에 퍼져서 분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마치 에너지 보존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발견되지 않은 아주 가벼운 중성 입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고, 추후 이 입자는 ‘중성미자’로 밝혀졌다. 둘의 정밀한 측정이 아니었다면 그 존재를 몰랐을 것이다. 또한 마이트너는 쿠어트 필립과 함께 양전자의 실험적 증거를 우주선이 아닌 실험실에서 얻었으며, 전자와 양전자의 쌍생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핵물리학계의 가장 권위 있는 물리학자이자 유대인이었던 마이트너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 시작된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사업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을까? 조카인 프리슈를 통해 영국 정부가 여러 차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마이트너는 그 요청을 거부했다. 그는 한, 라우에, 하이젠베르크가 핵무기 개발에 참여한 것을 강하게 비판하는 편지를 보낼 만큼 과학자가 전쟁에 발을 담그는 것이 끔찍한 잘못임을 확신했다.
전후인 1947년,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의 소장이 된 슈트라스만은 마이트너를 다시 연구소로 초청하는 정중한 편지를 보냈다. 나치의 악명높은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의 희생자였던 마이트너는 몇 주 동안 고민한 끝에 그 초청을 사양했다. 그 광기의 세월에 양심 있는 독일인들이 나치와 히틀러에 대항하지 않은 것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인간다움을 잃지 않은 물리학자”라는 그의 묘비명이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가장 인간적인 삶을 살았던 그의 인생을 잘 요약한다.
현대 핵물리학의 기반을 닦은 물리학자로서, 여성과학자로서의 차별을 극복하면서 핵물리학을 전쟁무기 개발의 도구로 삼지 않았던 훌륭한 과학자였던 리제 마이트너의 이름은 109번 원소 ‘마이트너륨’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김재영
물리학의 역사와 철학을 공부하며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zyghim@ksa.kaist.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