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법과학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놓지 않고 계속 걸었더니 이렇게 한 권의 책이 남았네요. 법과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도 이 책이
유용한 길잡이가 되길 바랍니다.”
이승환 화성의과학대 경찰과학수사학과 교수는 1991~2020년 대검찰청에서 법과학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의 과학수사에서 DNA 감식이란 새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최근 그가 치열한 법과학의 세계를 소개하는 신간 ‘보이지 않는 목격자’를 출간했다.
사건과 법정에 모이는 다양한 학문의 총체, 법과학
과학동아 독자들에게도 과학수사, 혹은 포렌식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익숙하다. 반면에 ‘법과학’이란 용어는 과학수사와 비슷한 것 같지만 다소 낯선 감이 있다. 이 교수에게 책에서 소개하는 법과학이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법과학은 과학수사에 이용되는 DNA나 화학 등의 자연과학, 심리 분석 같은 사회과학, 최근 더욱 강조되는 디지털 포렌식, 빅데이터 등의 정보기술(IT)을 모두 포괄한 개념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영역을 법과학이란 하나의 개념으로 구성하는 이유는 사건의 수사부터 기소, 재판에 이르는 일련의 사법 절차에서 활용하기 위해서죠.”
법과학은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필요한 과학의 총칭’인 셈이다. 이 교수가 ‘보이지 않는 목격자’에서 법과학의 개념과 함께, 법과학의 핵심 요소로서 DNA 감식, 분석의 중요성과 그 발전사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사람이 법과학의 한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 분야 전체를 모두 감당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게다가 법과학은 결국 법정에서 증거로 활용돼야하므로 전문성이 부족한 분야에 개입하면 그 부작용도 큽니다. 그래서 법과학은 다양한 인력과 전문 지식이 하나의 사건, 증거에 모여서 조율되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법과학자 한 명이 혼자서 다룰 수 없는 일이죠.”
“법과학자로서 저의 전문 영역 외에 다른 영역을 이해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울 때가 적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사건, 증거를 함께 다루는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과 소통하며 이 의견들을 조율하는 경험이 오래 쌓이면서, DNA 분야의 전문가인 법과학자로서 제 역할도 더욱 선명해졌죠.” 법과학의 이런 특성을 반영해 이 책 ‘보이지 않는 목격자’는 법과학을 구성하는 다양한 영역을 사실에 기반해 정확히 소개하면서, 저자인 이승환 교수의 전문 영역인 DNA 감식, 분석이 해결한 사건들을 아우르는 입체적인 구성을 택했다.
저자인 이 교수가 법과학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구축해온 경험이 책의 배경을 이루는 덕분에, 법과학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도 과학수사와 법과학의 관계부터 DNA 분석이 법과학에서 해내는 광범위한 역할까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범인의 가장 작은 흔적을 붙잡는 과학적 협업
‘보이지 않는 목격자’에는 이 교수가 DNA 감식, 다른 분야와의 협업으로 사건을 해결한 한국 법과학의 성장기가 고스란히 담겼다. 마약 범죄의 피의자가 필로폰을 만지며 남긴 DNA 프로필을 필로폰 표면에서 증폭, 검출해 그의 혐의를 법정에서 입증한 사건도 그중 하나다. “이 사건에선 포기하지 않고 궁리하는 것이 법과학에서 중요함을 말하려 했습니다. 다른 증거 수집이 어려울 때, 필로폰 표면까지 DNA 감식 대상으로 포착한 것이 핵심이니까요. DNA를 분리할 물질의 특성을 분석하는 화학 전문가와의 협업도 중요했죠. 필로폰은 알코올에 녹고, 필로폰에 묻은 DNA는 알코올에 녹지 않는 성질을 이용해 DNA만 침전, 농축시켰습니다. 이처럼 통상적인 접근이 어려운 사건에선 과거의 여러 경험을 반영한 과학적 원리의 응용이 중요해집니다.”
그렇다면 한국 법과학에 DNA 분석 기법을 남긴 이 교수는 법과학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할까. “모든 법과학 분야에 빅데이터, 인공지능(AI)을 아우른 데이터사이언스가 결합하고 있습니다. DNA 분석의 경우, 혈통 추정이 가능한 전 세계 남성의 Y염색체 정보를 축적하는 유럽의 YHRD처럼 DNA 데이터의 양과 질이 다변화되고 있어요. 증거물이 누구 것인지 밝히던 기존의 분석 범주가 언제, 어떻게 DNA가 남았을지 추정하는 범행 재구성까지 확장되는 추세고요.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하는 데이터사이언스의 기본적인 소양은 앞으로의 법과학에서 필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