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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기사] [인터뷰] ‘수학계 노벨상’ 아벨상 수상한 미셸 탈라그랑 “매진하되 지치지 않는 것이 성공의 비결”

 

2024년 5월 21일(현지 시각), 수학계 노벨상인 ‘아벨상’ 시상식이 노르웨이 오슬로대에서 열렸다. 수상의 영예를 안은 주인공은 미셸 탈라그랑 프랑스 소르본대 및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교수. 어린 시절 시력을 완전히 잃을 뻔한 어려움을 딛고 수학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세운 그의 인생 에피소드가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탈라그랑 교수와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그가 걸어온 길, 그리고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 들었다. 

 

▲Calle Huth/Studio/Abel Prize, Department of Mathematics -University of Oslo
아벨상은 2002년 노르웨이 의회가 자국의 천재 수학자 닐스 헨리크 아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제정한 상이다.

 

노벨상에는 수학상이 없다. 대신 수학 분야에는 아벨상이 존재한다. 아벨상은 2022년 허준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가 수상한 ‘필즈상’과 함께 수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린다. 필즈상이 만 40세 이하의 유망한 수학자에게 주어진다면 아벨상은 일생동안 쌓은 업적을 인정받은 수학자에게 수여된다. 따라서 아벨상은 수학자에게 가장 영예로운 상이라고 여겨진다.

 

2024년 아벨상은 미셸 탈라그랑 프랑스 소르본대 및 국립과학연구센터(CNRS) 교수에게 돌아갔다. 노르웨이 한림과학원과 아벨상위원회는 3월 20일(현지 시각) “확률론과 함수해석학에 획기적으로 기여하고 수리물리학과 통계학으로 응용할 수 있는 업적을 세운 공로를 인정해 탈라그랑 교수를 아벨상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아벨상 위원회는 탈라그랑 교수의 세 가지 주요 업적을 아벨상 선정 이유로 꼽았다. ‘확률과정의 최댓값’ ‘집중 현상’ ‘스핀 유리’가 그것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무작위적인 과정을 수학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수학 분야를 ‘확률론’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복잡한 세계는 무작위적인 사건의 연속이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확률론이 필수적이다. 실제로 확률론을 바탕으로 한 알고리즘은 일기 예보, 대규모언어모델(LLM) 등 곳곳에 활용된다.

 

탈라그랑 교수는 화려한 업적으로 로에브상, 페르마상, 쇼상 등 내로라하는 수학상을 이미 휩쓴 바 있다. 그런데도 아벨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땐 잠시 사고가 정지될 정도로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탈라그랑 교수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로에베상과 페르마상은 특정 연구 분야에 수여하는 상으로, 평생에 걸친 연구를 인정받는 쇼상이나 아벨상에 비해 경쟁이 훨씬 덜 치열하다”며 “쇼상을 받았을 때 매우 놀랐는데, 그 후에 내가 아벨상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료 수학자들은 탈라그랑 교수의 아벨상 수상을 예견한 듯했다. 이번 아벨상 시상식에서 ‘거의 모든 곳에 탈라그랑이 있다’는 제목의 강연을 한 아사프 나오르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는 영국 뉴사이언티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탈라그랑 교수는 놀라운 발견을 했을 뿐만 아니라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는 세상에 놀라운 통찰력과 다양한 도구를 제공했다”고 밝혔다.

 

탈라그랑 교수의 업적
▲Zureks(W)
 
미셸 탈라그랑 교수는 원자를 스스로 배열하는 물질인 스핀 유리의 특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물리학계를 놀라게 했다. 조르조 파리시 이탈리아 사피엔자대 교수는 2021년 이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다.

 

병실에 누워 수학을 생각하다

 

 

확률론의 대가인 탈라그랑 교수가 처음부터 수학자를 꿈꿨던 건 아니다. 그가 수학의 흥미를 느낀 건 아이러니하게도 실명 위기에 처했던 15살 때였다. 탈라그랑 교수는 5살에 유전병으로 이미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는데, 그로부터 10년 뒤 15살에는 망막이 안구 내벽에서 떨어지는 망막 박리를 여러 번 겪었다. 공부보다 노는 것에 관심이 많은 평범한 학생이었던 그는 시력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긴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다.

 

탈라그랑 교수를 어둠 속에서 꺼낸 건 아버지인 피에르 탈라그랑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버지는 퇴근한 뒤에 항상 병실에 들러 눈에 붕대를 감고 있는 탈라그랑 교수에게 간단한 수학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아버지에게 들은 내용을 추상화하면서 오히려 수학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수학 내용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려워서 수학의 아름다움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버지는 제가 이 중요한 단계를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또한 풀지 못한 문제에 막혀 좌절하지 않도록 격려해 주셨죠. 수학의 규칙을 이해한 뒤, 제가 수학을 못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수학에 열정을 가지게 됐습니다.”

 

다시 학교에 돌아간 탈라그랑 교수는 본격적으로 수학 공부에 집중했다. ‘시력을 잃을지 모른다는 트라우마는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교과서에 있는 모든 문제를 푸는 등 진정한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의 절실함은 그가 과거에 썼던 칼럼에서도 잘 드러난다. 

 

꾸준한 노력의 결과 탈라그랑 교수는 고등학교 3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프랑스 올림피아드 ‘콩쿠르 제네랄’에서 수학과 물리학 부문 전국 3위를 차지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우리는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낙담하기 쉽다. 하지만 탈라그랑 교수는 자신의 어려움을 그야말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았다. 어떻게 이러한 회복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에게 묻자, 한국의 사례를 들며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답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내면에 저마다의 회복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1980년에 한국에 갔는데, 들판에서 소가 땅을 경작하는 모습과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개울에서 빨래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한국은 매우 부유한 나라가 됐고, 전 세계가 한국 문화를 갈망하고 있어요. 이것이 바로 회복력이 아닐까요?(웃음)”

 

탈라그랑 교수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프랑스 리옹대 수학과에서 수학했다. 한때는 현실적인 이유로 수학 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그의 우수성을 알아본 수학자 장 브라코니에가 CNRS에 지원해 볼 것을 권유했다. 결국 1974년 탈라그랑 교수는 CNRS에서 운명처럼 수학자의 길에 접어들었다.

 

 
탈라그랑 교수의 아버지 피에르 탈라그랑.

 

“수학으로 얻은 기쁨, 수학에 돌려줄 것”

 

 

탈라그랑 교수는 자신처럼 연구자의 삶을 꿈꾸는 과학동아 독자들에게 “목표를 향해 자신을 완전히 투자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지치게 만들면 안 된다. 필요한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뇌가 최대 효율로 기능하기 어렵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는 수학만큼이나 마라톤, 유리공예 같은 여러 취미 생활을 즐긴다. 마라톤 풀코스(42.195km)에 도전해 3시간 30분 이내로 완주하기도 했다. 그의 취미 생활에서도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면 제대로 끝을 보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탈라그랑 교수는 “예술, 과학, 스포츠 등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의 목표에 전념하지 않고 정상에 도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탈라그랑 교수는 그동안 받은 수학상의 상금을 또다시 수학을 위해 쓰고 있다. 그는 자신의 웹사이트에 ‘내 상으로 부자가 되세요’라는 제목으로 문제를 올렸다. 그리고 실제로 문제를 푼 사람에게 자신의 상금을 나눠줬다. 이번에 아벨상 상금으로 받은 68만 5000유로(약 10억 원) 역시 전액 새로운 수학 분야 상을 제정하는 기금으로 쓸 예정이다.

 

“쇼상과 아벨상으로 받은 상금을 합치면 이미 거의 200만 달러에 달하는 기금을 모았어요. 결혼 생활을 포함해 내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좋은 일은 수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내가 받은 것을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상금 이름에는 저희 부부의 이름이 들어갈 예정이고, 늦어도 2032년에 첫 번째 상을 수여하려고 합니다.”

 

 
탈라그랑 교수는 수학만큼이나 마라톤을 즐긴다. 30세부터 55세까지는 매일 10km씩 달렸고, 마라톤 풀코스에서 3시간 28분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탈라그랑 교수와 아내 이완수 교수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아래 필름 속 사진은 탈라그랑 교수가 아버지와 함께한 유년시절부터 손자들을 맞이한 현재까지를 담았다.

 

한국인 아내가 본 탈라그랑 교수

 

 

탈라그랑 교수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1981년 이완수 당시 미국 오하이오주립대 경영학과 교수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은 제 마음속에서, 그리고 제 성공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했다. 또한 “모든 성공한 남성 뒤엔 위대한 여성이 있는 법”이라며 “아내는 내가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줬다”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드러냈다. 탈라그랑 교수의 아내인 이 교수를 4월 26일 화상으로 만나 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Q.탈라그랑 교수님이 연구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지켜보셨을 것 같아요.

남편은 아침 7시쯤 일어나 식사를 하고는 점심도 안 먹고 오후 4시까지 연구에 매진했어요. 그러고는 잠시 조깅을 나갔다가 이른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연구를 했죠. 연구하는 장소나 환경이 정해진 건 아니었어요. 어디든지 앉으면 자신만의 세계로 들어가요. 여행할 때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도 생각에 잠기곤 했어요.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이 사람이 연구하는 모습이에요.

Q.탈라그랑 교수님이 아내분께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하셨는데,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남편이 연구를 할 때는 온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방해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대신 잠시 머리가 쉴 수 있게 유리공예를 같이 해보자고 제안했어요. 제가 먼저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남편이 저보다 더 잘하더라고요.

Q.연구자가 아닌 아빠로서의 탈라그랑 교수님은 어떤 모습인가요?

수학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가족과의 시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전 세계 110개국을 여행했죠. 또 남편은 시간 날 때마다 아이들과 함께 수학 퍼즐을 풀기도 하고, 과학적인 토론을 하기도 했어요. 현재 두 아들 모두 컴퓨터 과학을 전공해 연구의 길을 걷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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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김진화
  • 사진

    Michel Talagrand
  • 디자인

    이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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