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교과서는 엄격한 검증을 거쳐 만들어집니다. 현재 시점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지식이죠. 하지만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고, 특히 과학은 새로운 관측이나 실험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며 발전합니다. 우주와 생명의 진리에 다가서기 위해 오늘도 한 걸음을 내딛는 기초과학 연구자들의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지구와 생명체는 다양한 물질로 구성돼 있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뤄져 있고,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뤄져 있다.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뉘며, 양성자와 중성자는 각각 쿼크라고 하는 가장 작은 입자들의 조합으로 만들어진다. 쿼크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의 입자로, 현재까지 6종류가 발견됐다.
_고등학교 통합과학 교과서(비상교육, 2022) 중
표준모형은 현재 인류가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한 가장 근본적인 이론이다. 그리고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널리 받아들여진 이론이기도 하다. 표준모형이 우주를 설명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을 쪼개 볼 것이다. 갑작스럽겠지만 너른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길.
당신의 몸은 폐, 심장, 뇌 등 기관이 모여 구성된다. 이 기관을 잘게 쪼개면 세포가 된다. 세포는 물, 단백질, 지질 등 분자로 이뤄진다. 분자는 원자 여러 개가 붙어있는 형태다. 벌써 당신을 원자까지 쪼개는 데 성공했다. 원자는 19세기 인류가 알던 우주의 가장 기본적인 입자였다. 물론 그 뒤로도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를 찾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원자를 쪼개면 원자핵과 전자로 나뉜다는 사실을 안다.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로 나뉜다. 그리고 양성자와 중성자는 쿼크가 모여 만들어진다.
축하한다. 드디어 21세기 인류가 알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에 도달했다. 여기가 바로 표준모형의 영역이다. 표준모형은 쿼크 6종, 렙톤 6종, 게이지 보손 4종, 그리고 스칼라 보손 1종까지 총 17종의 기본 입자로 구성된다. 이중 쿼크와 렙톤은 알려진 모든 원자들을 구성한다. 게이지 보손과 스칼라 보손은 우주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에 성질을 부여하는 입자다. 한 예로 스칼라 보손, 즉 힉스는 쿼크와 전자에 질량을 부여한다. 그 외에도 게이지 보손의 네 입자는 각각 양성자 속 쿼크를 묶어주는 힘인 강한 핵력(강력)이나 전자와 원자핵을 묶어주는 힘인 전자기력, 입자의 종류를 바꿔주는 힘인 약한 핵력(약력)을 관장한다. 표준모형 속 세 가지 힘에 중력까지 더한 것을 ‘자연계의 기본 힘(상호작용)’이라고 부른다.
표준모형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
“표준모형과 일반 상대성 이론은 현재 자연을 가장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이론 체계이자, 실험을 통해 완벽히 검증된 이론입니다. 하지만 표준모형은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고, 여러 면에서 불완전합니다. 표준모형은 이미 발견된 대륙입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표준모형을 기반으로 또다른 신대륙을 찾는 겁니다.”
3월 12일 대전 기초과학연구원(IBS) 본원에서 만난 최기운 IBS 순수물리이론 연구단장은 “더 근본적인 이론이 존재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 단장은 순수물리이론 연구단에서 입자이론 및 우주론 그룹을 맡아 이끌고 있다. 우주 관측 데이터와 고에너지 물리학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넘어서는 새로운 물리학과 우주의 기원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목표다.
표준모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대표적 예시가 암흑물질이다. 암흑물질은 현재 우주의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 반드시 존재해야 하지만, 빛(전자기파)으로 관측할 수 없는 미지의 물질이다. 그 외에도 우주에서 관측되는 물질과 반물질의 양이 같지 않다는 물질-반물질 비대칭성 문제나 중성미자의 질량을 둘러싼 미스터리 등을 풀어야 최 단장이 설명한 ‘또다른 신대륙’에 도달할 수 있다.
IBS에서는 순수물리이론 연구단 외에도 지하실험 연구단, 희귀 핵 연구단,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 등 다양한 연구단이 표준모형으로 여전히 설명하지 못하는 우주의 모습들을 포괄할 더욱 근본적인 이론을 찾고 있다. 그런 물리학 이론을 과학계에선 ‘표준모형 너머의 물리학(Physics beyond the Standard Model)’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이나 뉴턴 같은 한두명의 천재가 물리학의 신세계를 열 수 있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최 단장은 “아인슈타인보다 100배 뛰어난 천재가 나와서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더라도, 자연의 선택을 받아 실험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표준모형 너머의 물리학을 연구하는 IBS 연구단들은 이론물리 연구자와 실험물리 연구자가 소속에 구애받지 않고 협업하며 변화를 이끈다.
표준모형이 확장되는 최전선, 중성미자
“연구자들 중에선 표준모형으로 예측하지 못하던 현상에 대한 연구 분야들을 ‘표준모형 너머’라고 불러도 될지, ‘확장된 표준모형(extended standard model)’이란 개념이 더 맞지 않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표준모형이 틀린 게 아니라 표준모형이 담지 못했던 거니까요.”
실험물리학자인 소중호 IBS 지하실험 연구단 책임기술원은 3월 6일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표준모형의 확장을 이야기했다. 그의 주요 연구 분야인 중성미자는 현재 표준모형의 확장이 가장 활발히 이뤄지는 최전선이다. 중성미자는 표준모형에 속하는 기본 입자다. 전자 중성미자와 뮤온 중성미자, 그리고 타우 중성미자까지 세 종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중성미자의 성질에 대해 연구하던 도중, 기존 세 종류의 중성미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실험 결과들이 나왔다. 이들 실험 결과는 표준모형에 없는 ‘비활성 중성미자’란 이름의 제4의 중성미자가 존재할 가능성을 나타냈다. 소 책임기술원은 “비활성 중성미자는 생성된 곳에서 얼마 이동하지 않고 다른 형태의 중성미자로 변환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비활성 중성미자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중성미자가 생성되는 곳에서 수십m 이내로 떨어진 매우 가까운 거리에 검출기를 설치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내의 경우, 전남 영광 한빛원자력발전소가 조건에 부합했다. 원자력 발전 과정에서 중성미자가 다량 생성되기 때문이다. IBS 지하실험 연구단은 발전소 인근에 단거리 중성미자 진동 실험(NEOS) 장치를 설치하고 비활성 중성미자를 검출하기 위한 실험을 진행했다. NEOS는 2021년 실험이 종료돼 현재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있다. 만약 분석 결과 비활성 중성미자의 존재가 확인된다면, 표준모형은 기존의 17개 입자에 비활성 중성미자가 하나 더해지는 대사건을 겪는다.
한편, IBS 지하실험 연구단은 몰리브데넘(Mo)-100의 이중 베타 붕괴를 관측해 중성미자의 성질을 규명하는 AMoRE II 실험을 2024년 중으로 시작할 전망이다. 실험은 주변 환경에서 오는 잡음을 최소화하고자 강원도 정선 예미산 지하 1000m에 마련된 고심도 지하실험실, ‘예미랩’에서 진행된다.
소 책임기술원은 “이중 베타 붕괴 현상이 벌어질 때 반 중성미자 두 개와 전자 두 개가 생성된다”면서 “그런데 만약 중성미자가 그 스스로 입자이자 반입자인 마요라나 입자라면, 생성된 중성미자 두 개가 만나 소멸하고 만다”고 했다. 이걸 중성미자가 방출되지 않는 이중베타붕괴라고 부른다. 그는 “이 현상은 관측 즉시 중성미자가 마요라나 입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말했다. 중성미자가 마요라나 입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물질-반물질 비대칭성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힌트가 생긴다. 그러면 표준모형 속 기본입자 간의 상호작용이 재정립되거나, 초기 우주론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도입될지도 모른다. 과학계의 또다른 전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IBS 지하실험 연구단의 주요 실험들은 몰리브데넘처럼 희귀한 원소의 원자핵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핵의 특성을 잘 알아야 실험을 잘할 수 있다. 그래서 IBS 지하실험 연구단에겐 희귀 원소가 붕괴하는 시간을 계산하거나, 실험장비에 대해 함께 논의하는 동료가 있다. 바로 IBS 희귀 핵 연구단의 이론 핵물리학자들이다.
한인식 IBS 희귀 핵 연구단장은 “희귀 핵 연구단의 연구 목표는 지구에 없는 희귀한 원자핵을 찾고 그들의 성질을 밝히는 한편, 우주의 무거운 원소들이 어디서 왔는지 그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라며 “우리 이론 핵물리학자들이 타 연구단과 협업하거나, 지하실험 연구단, 순수물리 연구단, 희귀 핵 연구단이 함께 중성미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등 IBS 입자 및 핵 물리 연구클러스터 내 협업이 활발하다”고 설명했다.
암흑물질, 표준모형 너머의 95%를 향해
표준모형이 설명할 수 있는 우주는 전체의 5%에 불과하다. 과학자들은 그 밖의 95%는 암흑물질(27%)과 암흑에너지(68%)로 구성될 것이라고 추정한다.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모두 아직 그 정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현재 우주의 모습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우주의 구성 요소다. 어둠에 가려진 95%를 밝혀야 비로소 우주 전체를 포괄하는 근본적인 법칙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특히나 암흑물질의 후보 ‘액시온’과 연이 깊다. 3월 6일 만난 윤성우 IBS 액시온 및 극한상호작용 연구단 연구위원은 “액시온은 강한 상호작용의 CP 대칭과 관련된 입자물리학의 오랜 미스터리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입자”라면서 “액시온에 대한 이론적 모델을 세계 최초로 만든 분이 바로 김진의 서울대 명예교수”라고 했다. 최근엔 액시온의 특성이 암흑물질의 조건을 충족한다는 연구 결과가 연이어 발표되면서 과학계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액시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만 하면 강한 상호작용의 CP 문제와 암흑물질이란 물리학의 오랜 질문 두 가지를 한 번에 풀 수 있다.
현재 액시온을 찾고 있는 세계 각국의 연구자들은 김진의 교수가 제시한 이론을 바탕으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최 연구단장은 “액시온은 한국 물리학계에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입자”라면서 “IBS는 그동안 세계의 액시온 연구기관 가운데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IBS에서 주목하는 또 하나의 암흑물질 후보로는 윔프(WIMP)가 있다. 윔프는 암흑물질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된 이래로 액시온과 함께 가장 유력한 후보로 여겨지는 입자다. 윔프를 연구하고 있는 이현수 IBS 지하실험 연구단 부연구단장은 “강원도 양양 양수발전소 연구시설(Y2L)에서 진행 중이던 윔프 탐색 실험을 검출기 규모를 두배 키워 예미랩에서 새롭게 시작할 계획”이라며 “코사인(COSINE)-200 검출기는 순수 한국 기술로 만든 검출기로, 오는 5월부터 더 낮은 질량 영역을 살펴 가며 윔프를 찾기 시작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했다.
지하 1000m의 예미랩에서 표준모형 너머를 탐색할 새로운 연구들이 속속 시작되는 가운데 IBS 순수물리 연구단에서는 초기 우주를 연구해 표준모형을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그 중심에는 2023년부터 IBS 순수물리이론 연구단 우주물리 및 중력이론 그룹을 맡은 야마구치 마사히데 연구단장이 있다. 3월 12일 IBS 본원에서 만난 야마구치 단장은 “저의 목표는 우주가 어떻게 태어났고, 진화했는지 알아내는 것”이라면서 “특히나 초기 우주는 물질 밀도가 높아 빛조차 빠져나오지 못한 시기로, 이런 극한 환경은 표준모형의 한계를 테스트해보기 좋은 상황”이라고 했다.
“우주배경복사를 분석하면 우주 초기 입자들 사이에는 어떤 상호작용이 있었을지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지구상의 어떤 가속기로도 볼 수 없을 현상을 관측하는 셈이죠.”
중성미자의 정체를 밝히거나, 액시온 또는 윔프의 존재를 입증하는 등의 발견이 IBS에서 나온다면 한국은 물리학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업적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표준모형 너머의 물리학을 연구해야 하는 이유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인류 역사 내내 과학자들은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모든 현상을 더 근본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을 던져왔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현상 뒤에 숨어있는 자연법칙은 뭘까.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작은 알갱이는 뭘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풀며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이해가 깊어졌다. 지금 우리는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이유가 중력에 있다는 것을 안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다 보면 원자란 작은 입자에 다다른다는 사실도 안다. 중력에 대한 이해는 인류가 지구를 떠나 달에 발자국을 남기도록 이끌었다. 원자핵을 쪼개 얻은 원자력 에너지는 인류의 주요 에너지원이 됐다. 표준모형, 그리고 표준모형을 넘어선 우주 근본의 법칙을 밝히는 과정에서는 또 어떤 발견들이 나와서 우리의 삶과 미래를 바꿀까. 남은 95%를 향한 여정이 설레는 이유다.